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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0
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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摸索[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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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몸을 조금 움직거려, 그 우습게 궁상스런 포즈를 한 부분을 헤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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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골몰했던 참이지만 춥기도 무던히 추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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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후로 치면 벌써 춘분이니 봄도 거진 완구해 올 무렵이요 하지만, 진달래꽃머리 요 때면 으례껏 하는 버릇으로 기어코 요란떨이를 한바탕 차례를 잡자는 요량인지 연 사흘째나 날이 개질 듯 말 듯 끄물거리면서 새침한 바람끝이 수월찮이 쌀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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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날씨가 그러한데다가 또 아침 군불 같은 것은 이름도 곧잘 알 줄 모르는 항용 학생 하숙집의 방 명색이고 보니, 섣불리 한겨울의 제철 추위보다도 오히려 견디어나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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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일요일도 아닌 여느날 훤한 대낮인데 학생 하숙집 방구석에 우두커니 사람이 들어앉았는 것부터서 자못 부자연스러 보이는 노릇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대신 금새 날아갈 듯이 두 무릎을 잔뜩 쪼글트리고 쪼글트린 무르팍 위에다가는 팔짱 낀 팔을 얹고 그리고 그 위에다가는 허리를 옹송크려 한편 볼을 파묻고, 이러고 앉아서 가만가만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는 그 근천스런 포즈만은 구들장이 얼음장 같고 썰렁하니 붙일성 없는 이 방안의 어설픔과 빈틈없이 잘 얼리는, 그래서 차라리 자연스런 배경(背景)이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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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당장—옥초는 생각이 한참 잦아지는 동안 싸늑싸늑 스미는 찬 기운에 몸과 사지가 제풀로 옴츠라들어 부지중 앉음앉음이 그래진 것이지 위정 앉아서 그런 궁상을 피웠던 것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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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를 아무려나 거진 한 시간 그 모양을 하고 앉았던 끝에 그럭저럭 또 생각이 바닥이 나고 말아, 비로소 다뿍 신어붓잖은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쳐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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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쳐들면서 입맛을 쩟! …… 팔목에 눌렸던 볼때기는 자죽이 유난히 빨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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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낮! …… 밤낮 고추 먹고 맴맴, 생 먹고 맴맴, 밤이나 낮이나 매앰맴만 허어구우! 제엔장마아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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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저더러 구누름을 한다는 게 농의 소리가 되어버리니까는 제야 바륵 웃으면서 두 팔을 쭉 뻗혀(좀 체통은 아니지만 보는 사람이 없는 대로) 기지개를 불끈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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폈던 우산을 접으면 여러 갈래로 퍼져나갔던 살들이 도로 죄다 꼭지로 모여들고 말듯이 옥초의 생각이라는 것도 마치 그 본이어서, 이리도 뻗히고 저리도 뻗히고 궁리가 두루 많기야 하지만 마지막 결론에 가서는 아무것도 신통한 게 없다는 것, 그래서 하나도 마음 내키는 게 없다는 것 이것뿐이고 말곤 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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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복판으로는 아무렇게나 밀어던져 둔 신간잡지가 깨끗하게 한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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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도(옥초 제것은 다른 짐짝서껀 마루청 구석에 놓아둔 채 들여놓지도 않았고) 이 방의 원 주인인 동무의 것이고 잡지도 동무가 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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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화려해도 인조견같이 광택이 유난한 백양지(白羊紙) 표지가 우선 보매 싸늘한 게 기가 질렸으나 기지개를 켰던 팔이 내려오면서 이왕 손에 잡힌 길이라, 아무려나 앞으로 끌어당겨 후르륵 책장을 넘기다가 되는 대로 한 대문을 펴놓고 읽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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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따위가 시방 하 그리 탐탁하게 읽고 싶던 건 아니지만 오래 신던 헌 구두만큼이나 구면이면서 별반 반가울 게 없는 그 궁리 조건을 가지고 다시금 의식적으로 되풀이를 하잘 흥도 나지 않고 해서 주의를 딴데로 번져뜨릴 겸 심심파적삼아 앉아서 들여다보던 것인데, 걸려든다고 걸려든 것이 공교롭게도 소설이고, 우환중에 또 그 소설 명색 것이 하릴없이 식어빠진 조밥덩이처럼 깡깡하고도 퍼슬퍼슬하고도 천하 멋없기라고는 둘째 가라면 서럽달 망측한 물건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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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십오 분 너댓 페지나 읽었을까말까, 그만 싫증이 나서 대체 이런 걸 소설이랍시고 끼적거리고 앉았는 그 샌님은 얼굴이 소처럼 생겼을까 곰처럼 생겼을까 작히 한번 구경함직하겠지 하고 콧등을 찡긋거리면서 일찌감치 책장을 덮어 치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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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마음이 아무데고 잠착하지를 않으니 방안은 불시로 더 추운 것 같고 자연 더 어설프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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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아야 신산스럽기만 하고, 하다가 문득 거기는 아직도 스팀을 피우고 푸근해 십상이려니 싶어 학교 기숙사 생각이 간절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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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 그믐까지는 그런 대로 기숙사에 눌러 있어도 아무 상관 없는 것을 괜한 청백을 부리느라고 졸업식을 마치던 이튿날로 짐짝을 떠짊어지고 나왔고, 나와서는 이 고생이니 고생이자면 제가 사서 하는 고생이지 뉘 탓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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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 그믐까지라고 해도 십사일날 졸업식을 했으니 다직 두 주일이다. 또 사월 신학기의 기숙사 학생이 새로 들어오기 전이니 누가 그야말로 눈치를 하거나 등을 밀어 내쫓거나 할 리도 없는 것이고 해서 실상 급히 떠나지 않는 몇몇 동무들은 시방 떳떳이 기숙사에 그대로 처져 있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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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오히려 옥초더러 고향이나 일터로 떠나는 길도 아니면서 그다지 서둘러서 딴 사처를 잡고 나갈 게 무엇이냐고 이 다음에는 제발 좀 와서 함께들 있어보고 싶어도 못하는 노릇이니 그런 정을 생각하여 단 며칠이라도 더 있을 수 있는 날까지들 같이 있는 게 즐겁지 않으냐고 서로가람 만류를 하고, 또 사감선생도 옥초는 웬걸 그리 도망군이매니로 부랴부랴 봇짐을 싸느냐고 웃음말 섞어 역시 만류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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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초는 그러나 아무래도 이왕 떠나야 할 마당일 바이면 선뜻 털고 일어서는 게(가려운 자리를 아프더라도 박박 긁어야 시원하듯이) 섭섭은 해도 그럴듯한 제맛이 있는 법이지 무얼 제 길로 한 길씩 다 자란 것들이 소녀애들처럼 다뿍 감상(感傷)이 나 가지고는 회포니 추억이니 투정을 하고 있었자 속 빠안히 들여다보이는 수작이요, 진정이라고 하더라도 늙은이 같은 주접을 떠는 궁상이라서 아주 질끔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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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또 둘째라고, 다른 동무들은 제가끔 다 활발스럽게 저 갈 데로(좋거나 궂거나) 처억척 떠나가는데 이건 영락없이 온겨울 팔다가 팔다가 못 팔고 재어 남은 구멍가게의 자반비웃 꽁댕이처럼, 또 어떻게 보면 밥값 셈을 못 치러 볼모로 붙잡혀 앉았는 궁꾼처럼 늦게늦게까지 기숙사 구석에 처박혀 굼싯거리고 있다께 차마(그 김빠져 보임이여, 우울해 보임이여) 남 점직해 그런 비위치레는 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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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무때리고 이튿날로 기숙사를 떠나 나왔던 것이요, 그러므로 시방 와서도 그걸 뉘우치거나 할 며리는 없는 것이지만 한갓 잠시나마 몸을 담그고 있는 거처가 이렇게 어설프고 한데는 자연 그 푸근하니 좋던 기숙사의 방이 생각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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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도 실상은 기위 사처를 정하는 길이면 어디 조용하고 쌍스럽지 않은 염집을 방궈서 혼자 거처를 하도록 하려니, 하되 군불 같은 것도 날이 훨씬 푹해질 때까지는 조석으로 지펴 달라고 아주 식비에다가 그만 것을 더 쳐서 얹어내기도 마련을 하려니 이렇게 다 세심한 염량을 하기는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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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리미리 염량은 두루 그러했으면서도(몹시 성급하고 소심 청백스런 반면, 한량없이 성미가 누그러지고 범연한 그는 역시 제값을 하느라고) 그동안 단 한번인들 사관을 물색하러 나와 다녀보는 법은 없이 이내 그대로 청처짐하고 있었고, 하다가 마침내 자리를 뜨는 그날을 딱 당해서야 들이 콩튀듯 튀면서 쩔쩔 매고 돌아다녔고, 하는 것을 마침 재학생인 친한 동무 하나가 보기에 딱했던지 제가 넓은 이칸방을 혼자서 쓰고 있으니 위선 아쉰 대로 한동안 같이 있어보자고 권을 하는 덕에 아무려나 얼른 짐짝을 떠싣고 옮아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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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구러 벌써 한 주일, 그런데 동무는 거진 매일같이 오후와 밤으로 찾아오는 은근한 궐(厥)이 있어 놔서 객꾼의 처자가 민망하기도 하고, 그래 번번이 주인네 안방으로 자리를 피해 주어야 하는 불편이 있고, 그뿐더러 옥초 저로도 호젓한 사처를 얻어 조용히 거접을 하자는 생각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면서, 또 제일에 방이 이 모양으로 찬 데는 무던히 고통스러워하기는 하면서, 그러나 그는 선뜻 달리 무슨 구처를 하려고는 않고서 그냥 저 민두름히 하루씩을 지우곤 하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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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러니 다른 건 다 그만두고라도 당장 방이 찬 것쯤은 주인 노파더러 뜨듯하게 불을 지펴달라고 해서 위선의 절박한 곤란은 모면하도록 해야 할 것이고, 그게 또한 대단스런 교섭인 것도 아니고 한 것을, 그러나 그는 주인이라는 노파가 번연히 방이 차서 손이 곤란한 줄을 모르잖아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르쇠를 하는 속인데, 그걸 갖다가 굳이 이편에서 말 개두를 하여 조르든지 하고 보면 사람이 잔망스럽고 치사해 못쓴대서 차라리 입을 봉해 버리고 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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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그렇거들랑 또 수중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니겠다, 돈장이고 선뜻 내주면서 나무를 사다가 군불을 넣어 달라고 이르게 되면(제야 원 사를 오던지 낭탁에 따담고서 있는 나무를 때든지) 아무렇게든지 구들을 덥혀는 줄 것이고, 따라서 여재수재가 분명하여 피차간 떳떳한 일이고 할 것을, 그건 또 곧이곧대로 돈 경우만 가지고 빠안히 남을 무안을 주는 노릇일뿐더러 그러자고 들면 자연 저 사람과 매한가지 약삭빠른 짓을 하고 앉았는 깍쟁이 놀음을 하는 게 되겠으니 더구나 점잔찮아 못쓴다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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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에 이렇듯 다심한 성미이면서 일변 지극히 범연스런 그의 솔성이 혹은 마지막 학업을 마치고 난 직후가 되어 긴장이 한꺼번에 탁 풀리는, 단지 일시적 반동이더냐 하면 일반으로야 물론 그러하다고 보는 게 근리하겠지만 시방 여기 옥초의 경우는 노상 그런 것만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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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스 냉기가 속속들이 몸에 배어들고 선하품이 절로 내씹힌다. 부질없이 방안을 둘러보곤 하는 것이나 그렇다고 점잖지 못하게 이불을 뒤쓰고 앉았을 수도 없고, 가도록 심산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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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바이면 차라리 거리로 나가서 누구 시내에 있는 동무든지 또 아직 떠나지 않은 동무를 찾아 학교 기숙사로든지 놀러라도 가나 볼까, 그래 본들 무슨 그다지 탐탁스런 재미야 있을꼬마는 글쎄…… 아무렇든 아침에는 날이(제자의 결혼 청첩을 받은 올드 미스 ✕선생님의 얼굴처럼) 다뿍 찌푸렸더니 시방은 좀 어떤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앞문에 붙인 유리쪽으로 무심히 바깥을 내다보다가 얼른 반겨 쌍창을 드르륵 열어젖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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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나절에는 그리도 음산하게 흐렸던 날이 어느 밑에 죄다 벗어지고 마루에도 맑은 볕이 환히 드리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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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우내 이 마루를 문턱 밑까지 하나 가득 다양하게 쬐어 주던 나머지리라. 인제는 춘분이라서 훨씬 물러내려간 햇살은 그래도 널따란 앞마루를 반이나 되게끔 그어 바깥쪽으로 선명하니 들여비치고 있다. 게다가 제법 봄볕이라고 가물가물 양념이 가물거리는 게 더욱 재롱스럽다. 마음이 지나친 탓이겠지만 마루폭의 솔공이 자죽에서 송진이 금새로 끊어오르는 성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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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초는 저도 모르게 방싯이 웃으면서 마룻전으로 나가 사풋 쪼글트리고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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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방의 흰모래가 일광을 반사하여 눈이 부시다. 얄따란 깜장 세루 치마저고리가 볕을 폭신 받아 금시로 따스한 온기가 살에 까지 배어든다. 온기는 속으로 배어들고 깜장이 속에 숨었던 짙은 남빛은 햇볕을 타서 비로소 날카롭게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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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이던 것을 허드레옷으로 입고 있는 참이라 저고리 고름 매듭에는 ✕✕여자 전문의 배지가 그대로 달려 있다. 옥초는 눈에 뜨이는 대로 예쁘장스런 고놈을 손끝으로 만지면서 무심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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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제는 제 성명을 잃은, 그러나 가만히 재미스런 장식품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다시는 새옷에까지 옮겨 달지야 못한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부리나케 떼어 팽개쳐야 할 만큼 눈에 거슬리거나 두루 성가신 거침새도 아니고 하여 그 덕에 그는 엔간히 매몰스런 저의 주인 아가씨한테건만 괄시 대신 아직은 조그마한 은총을 받고 일신을 부지해 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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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절간 같다고 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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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드세게 불던 바람도 오후를 기다리느라 아직은 잠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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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으로 오후로 저녁으로면 뱃사람 여대치게 들입다들 소리지르고 지껄이고 쾅당거리고 음악하고 하느라고 남 정신 못 차리게 떠드는 선머슴 중학생들이 들어있는 뜰아랫방들은 으스스한 그늘이 진 툇마루에 저의 주인들처럼 터설궂게 생긴 헌 신발짝들만 얌전스럽지 못하게 널려 있지 모두 교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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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도 아무 기척이 없는 게 주인 노파도 담뱃대를 물었던 입을 헤벌리고 누워 낮잠이 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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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 이렇게 세월을 잠깐 잊어버린 듯 깜박 조용하고 햇볕만 따사하니 맑아, 한량없이 한가로운 품이 평화한 꿈속이나 그런 딴 세계인 것 같이 재미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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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초는 봄머리의 햇볕이 이만큼 고맙고 반갑기도 난생 처음인 듯싶고 (그리하여 절절히) 그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을 즐기는 흥이란 도저히 섣부른 예술, 가령 조금 아까 몇 장만 읽다가 차마 내던지고 만 채 무엇이(蔡某)라더냐 하는 기막힌 작가의 그 뚝뚝하고도 멋없는 소설 따위에 비길 바가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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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초는 그래서 한참 시방 정신이 팔려 방금 동무를 찾아 놀러라도 나가볼까 하던 생각도 아무것도 죄다 잊어버리고 고스란히 앉아 있는데, 그러자 얼마만인지 몰라도 별안간 오정 사이렌이 요란히 제가끔 사방에서 울어댄다. 뒤미처 낸들 빠져서 쓸까 보냐고 마루 뒷벽의 늙은 괘종이 처억(씰그럭 처르르 담을 배앝아 청을 가다듬었다는 게 잔뜩 목이 쉰 소리로) 늘어지게 하나씩 하나씩 열 번을 치더니 그 다음은 시치미를 따고 도로 뚜욱 따악 뚜욱 따악, 종내 암말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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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량두 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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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초는 뱅깃이 우스운 입을 쫑긋하면서 부전스런 떡심쟁이 늙은이더러 핀잔을 한다. 만일 시계 치는 소리도 아울러, 요란한 사이렌들이 그의 조그마한 엑스타시의 세계를 괴란시킨 데 대한 가벼운 반감만 아니었으면 그는 이 낡은 괘종의 유머를 손뼉을 치면서 재미있어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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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노파가 팔짱 낀 손에 담뱃대를 쥐고 얼굴이 (아니나다를까) 부석부석해서 마루로 나오다가 누런 하품을 소담스럽게 내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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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박 그만 잠이 들었든가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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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는 싱겁게 히뜩 웃으면서 옥초가 하고 앉았는 본으로 안방 마루 끝의 양지 짝에 가서 쪼글트리고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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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초는 인사상으로 애매하게 웃어보이던 얼굴을 젖혀 노파를 곰곰이 바라다보다가 이윽고 고개를 돌린다. 그러면서 먼저와는 다른 일종 비양스런 미소가 입가로 갈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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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는 생리(生理)! 괜한 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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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초는 제가 아는껏, 이 노파에게서 생명과 생활의 이유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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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에 동막으로 출가를 시킨 반편(低能兒) 딸 하나를 데리고, 그리고 이 집 한 채를 지니고 서른다섯에 과부가 되었더란다. 그때부터 집 한 채 이것을 밑천삼아 학생 하숙을 시작했고. 한 지가 꼬박 열다섯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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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다섯 해…… 열다섯 해면 날수로는 거진 오천오백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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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쉽지 오천오백 날이라는 그 하고한 날을 아침이면 어둑어둑해 일어나서 쌀을 씻고 불을 지피고 밥상을 차리고 행여 늦을세라 부지런히 서둘러 십여 명 학생들의 학교 시간밥을 대고, 그리고 저녁이면 또 시간을 맞추어 저녁밥을 짓고 군불을 지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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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되 사면팔방에서 뿔뿔이 모여들어 제각기 삼신이 다 다른 그 여러 선머슴애들의 성미를 골고루 맞춰 주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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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잘릴세라 잘 촉량해서 밥값을 받아야하고 받아서는 그대로 고스란히 싸전가게와 나무값과 반찬가게와 전기회사와 경성부와, 죄다 이렇게 찢어서 나눠주어 버리고 그중에서 극히 여리게 이문 남은 것을 병신딸의 시집 밑천으로 아껴두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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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라고 밥은 숱한 입들이 단 찌꺽지가 아니면 누룽지요, 호사도 없고 음악도 없고 연극이나 영화도 없고 오직 곰방대에 피우는 희연봉지가 있을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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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를 여축없이 십오 년에, 오천오백 날 그중 하루도 거르거나 다른 무슨 변이 없이 꼬박꼬박 되풀이를 해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치 그것은 이 하숙 영업을 처음 시작하면서 사 걸었다는 뒷벽의 저 낡은 괘종이 그새 십오 년을 두고 매일같이 한모양으로 뚜욱따악 뚜욱따악, 바늘은 그 복판 거기를 맴돌아 하루 스물네시간씩을 새기면서 오천오백 번을 그 짓을 되풀이해 왔다는 것과 꼬옥 같은 것이 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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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앞으로도 그는 아주 늙어 꼬부라져서 마침내 일을 감당 못할 그날까지 십 년이나 십오 년은 더 역시 그동안의 십오 년과 다름 없는 밥짓기로써 나머지 생명을 하루씩 하루씩 외수없이 치러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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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는 시간을 주장(主張)하자는 이유나 가졌다지만 저 생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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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초는 새삼스럽게 뒷벽의 괘종과 노파를 번갈아 보고 보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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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명색이야 없는 한낱 서민(庶民)이라고 하더라도 삼십 년 동안이나 두고 반생을 인간의 폐물이 되는 그날까지 그다지도 꾸준히 그다지도 충실하게 다만 그 한가지 생활에 철저하지를 않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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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으니 대체 그게 무어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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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이 있을까 긴장이나 뉘앙스가 있을까, 비약은커녕 실팬들 있을까, 남이 당자를 대신하여 들고 나서서 분개를 할 일이지 대관절 무얼 하자는 노릇이며 무엇이 어쨌단 말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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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혹시 가다가 더러 생각이 나서 아뿔싸 허망한지고! 이럴 법이 있더란 말인가! 하면서 무연히 한숨이라도 지을 적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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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히나 그렇다면 조금은 동정을 해도 좋으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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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초는 문득 여기까지 생각을 하다가 보니 다른 게 아니라 제 자신이 결국 또 한번 어떤 인간 하나의 무의미하고 명색없는 생활을(가던 중에도 지지리 더 하잘 것없는 것을 갖다가) 골몰해 들여다보고 앉았던 셈이 되고 만 게 되어서 저야말로 허망할 노릇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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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러나 역시 오늘에 비롯한 것이 아니요 하필 하숙집 노파로 하여 우러난 것도 아니고, 차라리 이왕에 도달한 결론을 다시금 증명이나 해주는 지날녘의 한낱 여담에 불과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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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을 마친 후 응당히 실사회에 나가 몸소 가져야 할 실제생활이랄지 또 그 ‘생활의 테마’랄지를 이윽고 잠심해서 생각을 하게 되던 작년 봄 졸업반에 오르고 나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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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초는 제 자신의 역량과 컨디션과 그리고 그러한 역량과 그러한 컨디션 밑에서 제가 조만간 거기에 참예를 할 현실사회의 생활과 이런 것을 가지고 갖추 세세하게 상량을 해보았다.
 
74
그는 노력의 결과가 실질적으로 약속이 되는 발전의 명일을 믿지, 심프손 부인 식의 행운을 미신하거나 더우기 제 자신을 요술장이로 착각하는 법이 없는 가장 리얼스트이었었다. 그러한 만큼 그는 위선 제 자신의 역량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데도 정직하게 그것을 계산할 줄을 알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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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제 자신의 재능을 학교의 시험성적표에 적힌 점수를 가지고 산출을 했다. 그것이 n이라는 숫자이었었다. 그 다음 제 자신의 포퓰러리티는 평소에 제가 어거하던 동무의 수효를 가지고 산출을 했다. 그것이 m이라는 숫자이었었다.
 
76
이 n과 m이 옥초의 총역량이었었다. 그것은 노상 미련하거나 못난이의 급은 아니라도 결코 천재나 영웅의 부류에 들 수 있는 것은 아니었었다. 이 사실을 그는 가장 사무적으로 승인을 했다.
 
77
컨디션은, 나이 마침 스무 살 스물한 살에, 몸은 건강하고 집안이 넉넉한 덕에 아뭏든지 당장 생계를 걱정할 필요는 없고, 물론 여자전문 하나를 마쳤다는 간판이 있고 하여 비교적 양호한 편이라는 것을 그는(역시 사무적으로) 시인했다.
 
78
역량이(출중은 못해도) 그만은 하고, 그보다는 컨디션이 그렇게 무던하고 하니 교문을 나서는 날을 생각할 때에 우선 결혼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도 차라리 상식이었을 것이다.
 
79
옥초는 아닌게아니라 고향에서 진작부터 혼담(婚談) 하나가 저 혼자서 익어가고 있는 게 있었다. 별반 그리 탐탁스럴 것은 없어도 한낱 혼처(婚處)로 보아서 일변 무난한 자리기도 했었다. 그러므로 만일 결혼을 하자고 든다면 십상 거기일테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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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형편인만큼 자연 그것이 염두에 들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어서 옥초도 위선 졸업 즉시의 결혼이라는 것을 생각은 해보았었다. 그러나 그는 이어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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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결혼 같은 것은 인간생활의 한 반주(伴奏)에 지나지 못하는 것인데 아직 인간으로서 독자한 생활이랄지 그 테마를 잡지도 못했으면서 덮어놓고 결혼을 한다는 것은 옥초의 생각 같아서는 번연히 전체를 내버리고서 부분과 바꾸는 일종 자살행위와 다를 게 없는 것이었었다. 황차 학교의 ✕선생님처럼 삼십이 넘었다거나, ✕선생님처럼 사십이 다 된 바도 아니면서 무엇이 그다지 급하다고 그 옹색하고 푸달진 부분 속에다가 인생 전부를 영영 감금하잘 며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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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문제는 그리하여 한옆으로 접어놓았고 그 다음, 집안이 넉넉하고 하니(가령 양행까지는 몰라도) 동경쯤 건너가서 한 이삼 년이고 공부가 되었던지 연구가 되었던지 그런 걸 한번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었었다.
 
83
그것은 그러나 평생을 학리의 천착에다가 바치지 않을 바에야 고작 이삼 년이나 더 배워 본댔자 별반 두드러지게 큰 소득이 없을 것인데, 그러한 정도라면(이미 기초는 얻었겠다) 집에 앉아서 독서를 하는 것으로 능히 성취할 수가 있을 테고 한 것을 굳이 유학을 가네 어쩌네 떠버릴 필요는 없는 것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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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남자도 학자란 건 사람이 흘게가 빠지지 않으면 성미가 괴퍅해서 못쓰는 법인데 우황 여자로 잘못 어물어물하다가는 학교의 ✕선생님이나 ✕선생님처럼 천하 서커스 감의 괴물이 되고 말 테니 썩 삼가야 할 노릇이었었다. (학자님네를 인간적으로 그렇듯 존경하지 않는대서 그들의 공로인 학문 그것까지도 소중히 여기지 않으냐 하면 그건 천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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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 다음 명색이 문과를 치렀겠다 남처럼 저널리즘 언저리에서나 약게 납뛰어 시인으로든지 소설가로든지 하다못해 수필문사로든지 아무렇게고 간에 문단 행세를 장만하는 길 하나가 또 있었다.
 
86
그러나 그는 도무지 문학이라는 것에서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애당초에 그가 문과에 학적을 둔 것도 무슨 문학 그 방면에 흥미나 포부가 있었던 때문이 아니라 여자전문이라고는 거기 한 군데뿐인데 보육이나 가사나 그런 과는 괜히 남의 집 유모나 안잠이가 연상이 되어서 들여다보기도 싫었고 음악과는 타고난 재주가 더 없어 보이고 그러고 나니 만만한 게 문과였던 것이다.
 
87
그러한 만큼 그는 ✕교수가 신이 나서 딱딱거리는 로렌스의 강의나 ✕강사가(재갸 혼자 흥이 나서) 시일실 눈을 감아가면서 외어주는 고시조보다는 저 혼자 읽는 아인시타인의 한 페이지나 파브르의 곤충기가 훨씬 더 재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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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뿐더러 그는 붓재주에 하나도 자신이 없었다.
 
89
이것은 그 뒤 훨씬 지나서 이학기 방학때의 일이지만, 어느 부인잡지에서 졸업 감상을 써달라는 것을 몇번 졸리다 못해 붓을 잡아본 것이 원고지 석 장어치를 가지고 닷새를 씨름을 했어도 잡지에는커녕 작문이라면 넉 점을 맞기가 어렵게 생긴 물건이 되었었다. 그래 할 수 없이 원고는 찢어버리고 마침 재촉을 온 그 잡지의 부인기자인 선배한테 말로 이야기를 해주고서 그 곡경을 겨우 면했었다. 했더니 그 뒤에 잡지 한 권이 기증으로 왔길래 펴본즉 제가 이야기해 준 말을 골자삼아 닷 발이나 되게 허겁스런 문구로 늘려논 글이 크막한 사진과 한가지로 게재가 된 데는 낯이 화끈했고 아무려나 그런 걸 보아도 진작에 여류문사 지망은 작파하기를 대단히 잘한 노릇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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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다음은 그저 번둥번둥 놀면서 독서나 하고 요행 이해할 줄은 아는 덕에 미술이며 음악 같은 것이나 찾아 감상이나 하고 제법 사내들처럼 거뜬한 여행이나 다니고 하는 것이겠는데, 그러나 그는 사람이 전혀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이 사철 놀고만 지낸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못할 만큼 불편하고도 부자연스런 일이었었다.
 
91
결혼도 않고 공부도 더 않고 여류문사는 낙제고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놀다니 안될 말이고, 그렇다면 마지막 가서 (먼저 것들과는 혈통이 많이 다른) 소위 취직이라는 게 남아 있을 뿐이었었다.
 
92
이 취직이라는 것을 두고 생각할 때에는 마침 여름방학이 지나고 제 이학기로 접어들면서 학교가 상하 어우러져 졸업생의 취직 문제를 가지고 웅성거리기 시작하던 무렵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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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직을 지망하고 나선 동무들은 제마다 속으로 긴장이 되어 누구는 초조해서 누구는 바빠서 모두들 애를 쓰는 양이 보기에도 민망할 지경이었었다.
 
94
옥초는 마음에 확실한 작정도 서지 않았고 일변 또 그 난리에 섭쓸리기도 사람이 치사한 것 같아 넌지시 삐어져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저도 지망만 하고 나선다면 은행 회사 등속의 여사무원 붙이야 목을 매어 끌어도 가지 않겠지만, 가령 미션 계통으로 여자중등학교의 영어교원쯤은 아무려나 차례가 돌아올 무엇이 없지도 않았었다. 또 그러한 것이면 여자의 직업으로 가히 무난하다 할 것이었었다.
 
95
그러나 그것은 입에 붙은 말로라도 교육의 직접 담당을 갖다가 천직이니 희생이니 하는 사람일세 말이지 이상이 거기에 있지 않은 옥초로서야(굳이 의식을 벌자는 것도 아니면서) 무엇이 대끼어 그 비위생적이요 사람 고루한 그 짓을 하잘 며리가 없는 것이었었다.
 
96
뿐만 아니라 몇 개 안되는 그 교원 자리에 너도 나도 머리를 싸고 들이미는 판인데 그것이 진정으로 세상을 이되게 하는 ‘사업’일진대 경쟁이 붙을 지경이면 사람이 없어서 ‘사업’을 못할 바 아니니 핍절한 의식 문제로 발을 벗고 나선 동무들에게 남 좋은 일이나 시킬 것이지 구태라 그것을 넘겨다본다는 게 객적은 짓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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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교의 교원은 그러하고, 그 밖에 속은 잘 모르겠어도(속을 몰랐기 때문에) 부인기자라는 것이 어떨까 싶어 아무려나 전자에 졸업감상을 쓰라고 하던 그 선배 부인기자더러 지날말같이 물어보았더니(눈치를 챘던지 웃으면서) 그 무내용한 품이라든지 불량성(不良性)의 속성(屬性)의 수월찮은 품이라든지 고운 아가씨네의 가히 취할 직업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주제에 또 혼자서 뽑아도 곧잘 빠지지 않는 만인계(萬人契)니라는 게 대답이었었다.
 
98
그러나저러나 글 한 줄 반반히 쓸 줄도 모르는 터수에 신문 잡지의 기자 구실을 생각하다니 생각하는 내가 도시에 망녕이지 하고 그는 스스로 고소를 하고 말았다.
 
99
그러고 나니 직업도 마땅히 가짐즉한 것이 없고.
 
100
직업도 가질 만한 것이 없을 지경이면 옥초는 마침내 학업을 마치고 교문 밖으로 나서는 그 날 그 시각부터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될 테라는 결론에 도달치 않을 수가 없었다.
 
101
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결론의 말 내용은 그러나 먼저의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이 그저 놀면서 지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거나 따라서 그에의 복귀(復歸)인 것이 아니었었다.
 
102
대수학(代數學)에서는 마이너스도 한 수(數)의 자격을 갖는다. 그와 마찬가지로 옥초의 그 경우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이 그저 놀면서 지낸다는 사실도(비록 가치는 부정이 될망정 존재는 긍정을 받아) 하나의 ‘생활’로서의 자격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금의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던 결론은 그 놀면서 지낸다는 사실까지도 부정을 하는 절대의 부정으로, 따라서 어느 공간이 아니라 진공(眞空)이어서 전연 제로를 가리킴이었었다.
 
103
진실로 해괴하기 짝이 없고 마치 항공(航空)이라면 에어 포켓을 의미하는 이 결론 앞에서 옥초는 스스로 망연치 않을 수가 없었다.
 
104
비록(아직은 이 고장의) 여자라고는 할값에 소학교부터서 치면 열다섯 해씩이나 두고 공부를 하노라고 했고 그 덕에 명색은 전문학교까지 마친 이력이 있고 뛰어난 천재나 영특한 인물은 아니라도 바보나 천치는 역시 아니고 나이 갓스물 스물 하나에 몸은 건강하고 요행히 집안의 생계를 부담할 처지는 아니고 무엇보다도 몸소 어떤 일을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날카로운 의욕과 불타는 정열이 있겠다, 흰말이 아니라 얻다가 내다 버려도 제 한 몫은 능히 감당해낼 잡이인 것을, 백줴 졸업장을 받아 들고 학교 문턱을 넘어서다가 에어 포켓에 푹 빠지는 맥으로, 아무것도 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 테라니.
 
105
딜레머하고는 천하 해괴한 딜레머이지, 부득불 살아 있는 인간인데야 호흡과 영양의 섭취야 배설작용과 이런 것까지도 않는달 수는 없을 테지만 그 이상 더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서 식물과 같이 가만히 있어야만 할 것이었었다. 보다 더 철저하자면 아주 자살을 해버릴 노릇이고.
 
106
옥초는 이 딜레머를 극복하기 위하여 새로운 체세를 차려야 했었다. 그러나 이 때의 그에게는 그가 이미 다 부정을 해버린 여러가지(그가 장차 가질 수 있는) 생활을 물색하던 중에 은연중 얻어진 바 학문과 인간과의 참된 관계에 대한 한 개의 관념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실은 그새까지에 막연만 하던 것이 정리가 되어가지고 전면으로 선명하게 나타나던 것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107
결혼은 하고 아무렇게나 가정으로 도피를 한다든지 다시금 동경 같은 곳으로 유학을 떠난다든지 글은 못 쓰나마 여류문사 행세를 한다든지 여학교의 교원이나 부인기자나 하다못해 여사무원이라도 얻어 한다든지 그도 저도 아니면 흥떵거리고 놀면서 지낸다든지 이러한 생활들이 두루 불가하다는 소치는(그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일껀 애써 배우고 쌓은 귀중한 학문을 갖다가 하나도 옳게 풀어 쓰지 못하는 것이라는 데 있었던 것이다.
 
108
주부의 상식으로, 좀스런 학자님이 될 소용으로, 멋도 없는 여유문사 행세거리로, 교단에 선 살아 있는 딕셔너리로 남의 집 서사질이나 해줄 밑천으로, 다직해야 앉아서 홀로 문화를 향락하는 확대경(擴大鏡)으로, 이렇게 학문과 인간이 단지 기계적으로 혼합이나 되어 아무 의미도 없이 행동을 한대서야 그는 결국 학문에 대한 모독이요 인간 제 스스로의 자살이 아닐 수가 없었다.
 
109
‘혹시 아름드리 통나무를 큰 도끼로 꿍꿍 찍어젖히고 나서는, 마지막 이쑤시개 한 개피를 집어들고 나섰다면 차라리 위인 고지식하다고나 웃고 말지.’
 
110
학문은 그러나 결단코 그처럼 잔망스럽거나 무의미한 악용을 당할 것이 아니라 그는 마땅히 주체(主體) 인간과의 유기적인 협력 아래서 그의(主體의) 새로운 행동의 창조에(더불어 참예하는) 적극적인 동력이 되어야 할 것이었었다. 옥초에게 준비가 되어져 있는 학문의 사명에 대한 관념이란 것은 바로 그러한 즉 주체 인간과 객체 학문과의 유기적 화합(混合[혼합]이 아니라 化合[화합])에서 지양이 되는 제삼의 행동인 새로운 현실의 창조……라는 한 개의 명제이었던 것이다.
 
111
옥초는 이(눈 높은) 명제를 받들어 들고 일변 백지로 일단 돌아가(돌아간 줄로 여기고서) 더 널리 더 깊이 생활현실을 탐색하노라 새로이 탐색을 시작했었다.
 
112
마치 그것은 소설가가 어떤 테마를 두고 그를 살리기(具象化하기) 위하여 그에게 현실생활을 부여하듯이 옥초의 태도도 그의 명제를 현실화시킬 생활의 창조적 발견을 하자는 노력이었었다.
 
113
무엇들을 하고 있느냐보다도 이번에도 어떻게 하고 있느냐를 파헤치고 보기가 주장이라 상하와 귀서(貴庶)의 분별이 없이 위선 많은 여러 생활들이 천착을 받았다.
 
114
전기작자적(傳記作者的)인 태도를 빌지 않은 눈으로 학교의 교장선생님도 꼬느어보았다. 옥초가 친히 그네의 생활을 테스트할 수 있는 인물치고는 그가 제일 고급(?)이었을 것이다.
 
115
뚝 떨어져서는 화양절충식 행주치마에 큰 쪽에 굵은 다리와 넓은 발에 조그마한 게다를 끌고 진고개 복판의 골목 어귀에서 한가한 오마니가 빨강 유리알을 박은 반지를 양편 손가락에 하나씩 낀 것과 더불어 동무네 집 안잠이가 방물장사한테서 이원 십전짜리 누렁 금빛 돋는 비녀를 한사코 사느라고(차라리 값도 덜하겠다 수수하니 점잖은 은비녀를 이왕 살 테거든 사라는 주인마님의 권념은 안 듣고 돈만 떼쓰듯 졸라) 한달 월급 사 원에서 반을 선대를 받는 양이, 그래서는 마침내 그 금비녀처럼 생긴 누렁 비녀를 사서 꽂고는 입이 귀밑까지 째지는 양이 옥초에게는 비극은 비극 같은데 하나도 슬플 수가 없었다.
 
116
그 중간 길로는 여교원이며 여사무원이며 여류문사며 부인기자며는 물론 말할 것도 없고 여점원으로 전차나 버스의 여차장으로 공장의 여직공과 카페의 여급은 기회와 반연이 없었으나 기생도 한 톨 끼여 있었다.
 
117
이렇듯 옥초는 노력만은 가히 볼 만한 게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제 스스로 생각에는 일단 백지로 돌아간 요량이었었지만 실상인즉 본시 세태 인정을 투철히 체득하지도 못하고 태어난 만큼 자연 세상 물정의 ‘기상’과 ‘지리’에 어둔 반면 다분히 고답적이요 성미 까다로운 그 명제를 갖다가 안경 쓰고서 보는 이상(선입관념이 그다지 분명치 않던 먼저 차례와도 더 달라) 대하는 사물이 결코 굴절(屈折)이나 착색(着色)이 없이 제마다 다 올바로는 보였을 리가 없는 것이었었다. 그리하여 그는 숱한 그 여러 생활들이 제가끔 제 성깔대로 짜 내놓은 여러가지의 피륙들을 하나 둘 다섯 열 연해 연방 물색을 해왔으면서도 필경 제 생활을 옷 지어 입을 현실은 한 끄터리도 옷감 끊지 못했었다. 죄다가 하나도 무늬며 빛깔이 신통치 않은 것도 많은 것이거니와 스빠를 섞은 혼방이지, 순면이 아닌 성만 싶던 것이다.
 
118
마침내 옥초는 아무래도 새로 한벌 해 입었어야 할 새옷을 해 입지 못하고서 낡은 교복을 그대로 입은 채 졸업하는 교문을 나서고 만 셈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혼자 말했다. 세계는 상식과 습관과 값 헐한 욕망이 왕 노릇을 하고 있고 개성은 지혜로 더불어 생리의 종노릇을 하고 있고 하더라고.
 
119
이 니힐한 색채를 드리운 독설(毒舌)은 일변 그의 명제를 현실화시킬 소위 창조적 생활이라는 것을 얻어낼 수가 없더라는 의미가 (제 자신은 의식을 하고 않고 간에) 간접적으로는 포함된 말이었었다.
 
120
옥초는 그러나 결코 정면으로 그 최종적 결론을 내리지 않고서 언제까지든지 미루어나갈 권리를 스스로 보유했다. 그러고서 한편으로 그는 끊이지 않고 생각하고 궁리하고 하면서 탐색의 계속을 중단시키지 않았다.
 
121
‘무얼 하기는 해야 할 텐데……무얼 한다?……그건 그렇고 저건 저렇고 그리고 이건 이렇고…… 아무개는 이러고이러고 하던데?…… 아 요건 또 어떨꼬? 으음 글쎄……’
 
122
이렇게 그는 그새 두고 줄곧 하루에도 몇 번씩 앉아서 궁리요 생각이고 시방도 역시 그러하다. 하되 또 여간한 신세리티가 아니다.
 
123
다만 궁리와 생각이 그렇듯 골똘했던 끝에는 보나 안 보나 그 비정적 처분을 받고 난 재료에 대하여 으례껏 한두 마디씩 독설로써 또 한번 유린을 하곤 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피로한 머리를 풀자는 청신제에 그치고 말기에는 과히 니힐한 색채가 차차로 짙어가는 무엇이 없지 못했다.
 
 
124
주인 노파는 선잠이 깨어 아직도 정신이 덜 났는지 마룻전의 양지짝에 멍하니 쪼글트리고 앉아서 연신 눈을 끔적거린다.
 
125
기름기도 없고 누러니 시들어빠진 노파의 옆얼굴을 한번 더 말끄러미 건너다보고 있던 옥초는 마지막
 
126
‘선량한 백성……그러나 존경할 수 없는 선량……쓸데없는 선량……’
 
127
이런 생각을 하다가 그래서 그 끝에
 
128
“제엔장 참!”
 
129
소리가 나오는 것을 하품으로 더불어 씹어 삼키면서 고개를 돌린다.
 
130
노파는 이윽고 불 꺼진 담뱃대를 갖다 대고 씨익씩 두어 번 빨아보다가 내키잖게 한옆으로 내려놓으면서 게으른 기지개를 불끈, 하품을 뱉으며 삼키면서, 아이 볕두 따뜻해 좋기두 하다! …… 아이 즘심을 채려 드려야지…… 즘심이나마 하두 으설퍼서 원! …… 어쩌구 혼자 중얼거린다.
 
131
옥초는 미상불 그 찬밥덩이에 알량한 반찬 나부랑이를 명색 점심 밥상이라고 받을 일을 생각하니 생각만 해도 있던 입맛까지 달아나고 마는 것 같았다.
 
132
그러느니 차라리 무어라도 좀 시켜다 달랠까 그건 또 번폐스럽고. 어떡할꼬…… 에이 귀찮아, 점심이고 무엇이고 다 그만둘까 보다, 그래도 좀 시장은 한데……
 
133
그러나저러나 생활의 테마가 어떠네 상식세계의 거절입네 희떠운 소리는 해싸면서도 기껏 앉아서 한다는 수작이 점심 어설픈 걱정이나 하고, 흥……
 
134
옥초는 마침내 어처구니가 없다고(그 어느 편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인지) 혼자서 빙그레 웃는데.
 
135
“아이! 볼수록 참 좋게두 생겼다!”
 
136
별안간 노파가 커다란 소리로 절절히 탄복이다. 아까부터 어찌어찌하다가 새삼스럽게 옥초의 그 소위 좋게 생긴 데에 주의가 끌려, 건너다보고 건너다보고 하느라고 점심 차리자던 것도 잊어버리고는 그러자 마침 또 그의 무심히 웃는 양이 차마 아무 소리도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좋아보였던 속이다.
 
137
그렇다고 옥초가 무슨 어디가 두드러지게 또는 깎아논 듯이 이쁘장스런 미인인 것은 아니다. 본시 그저 바탕이 푸짐하니(밥술이나 먹음직하게) 좋게 생긴 얼굴인데다가 한참 시방 스물한 살을 맞은 봄이겠다(딱이 밉게 생긴 처녀더라도 어느 한 구석은 그럴 듯해 보이게) 잘 피었을 무렵이고 게다가 옷이 시방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는 깜장치마 저고리만 하더라도 죄다가 헝클어지고 구기고 하기는 했을 망정 ✕✕여자전문의 고 밉살스럴 만큼 태가 고운 옷맵시라 놔서 옷으로 하여 인물이 훨씬 돋보이는 것도 또한 없지 않았다.
 
138
“아 난두 젠장맞일 그 아들내미가 한 놈 있더람 그런 대루 대학교 공부라두 시켜설랑 처억 저런 버젓한 색시를 골라서 며누리두 얻구 다아 응? 그랬을걸 고만, 호호호……”
 
139
옥초는(소위 시골 토반의 집 태생이라서) 노파의 하는 수작이 기어오른다는 푼수로 좀 괘씸은 했으나 그렇다고 정색을 하는 것도 어린애 짓이고 해서
 
140
“그럴라 말구서 쥔마나님두 진작 시집을 가지요? 그랬으면 그새 벌써 아들두 낳구 다아 인제……”
 
141
“호호호! 것두 참 그렇군 그랴! 일찌감치 영감이나 얻어서…… 호호…… 그 색시 우순 소리두 일쑤 잘 하는구랴? 다아 참 얌전한 줄만 알았더니…… 아이 참 얌전하다구야! ……”
 
142
“내가 얌전한지 못 얌전한지는 또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나요?”
 
143
“아 보문 걸 몰루…… 일상거지두 조신하련과, 아 보아허니 다아 저만 나이에 안직 연애두 않는가 보던데? 호호호!”
 
144
“네에! 연애를 안하니깐 얌전하군요! …… 괜히 두 번만 얌전했다가는……”
 
145
“에구 참 쉬위……”
 
146
노파는 허겁스럽게 눈짓 고갯짓, 주인이 있지도 않은 건넌방을 조심해싸면서(그게 애교랍시고) 수군덕수군덕
 
147
“……괜히 동무학생이 들으문 날 욕하지! …… 머 참 그 학생이야 다아 전문학교두 다니구 나이두 들 만침 들구 했으깐 머 연애두 할 만허잖우?…… 근데 글쎄 저 아랫방에는 아 인제 겨우 쥐알만큼씩헌 계집애들이 생판 연애를 한답시구 남의 집 선머슴애들을 찾아와설랑은 사뭇 다 디굴구 에이! 에이 망칙해! 에이 꼴불견!”
 
148
노파는 신이 나서 연신 말재간을 부리는 모양이나 옥초는 우습지도 않아서 물끄러미 건너다보고만 앉았다가 또 무어라고 하는지 보자고
 
149
“그런데 내가 연애를 않는 줄은 또 어떻게 아시나요?”
 
150
“다아 아는 수가 있다우……”
 
151
노파는 요술이나 한바탕 할 듯이 뽐내더니 기껏 한단 소리가
 
152
“……아 연애를 하략시면 색시가 저렇게 혼자서 심심해 하겠다, 누가 말래? 아 그이, 하이칼라상이 측 찾아와설랑, 다아 참 동물완 산뽀두 같이 가구, 화신상으루 들러서 떡 벌어지게 즘심두 한턱 쓰구 밤일라치면 붐빠라 붐빠라 활동사진 구경두 가구……조옴 좋아! …… 끄응! 이러니저러니 해두 젊어서 한때가 좋습넨다다아……”
 
153
노파는 어느 틈에(편리할 대로) 연애와 청춘의 찬미자로 표변을 하더니 꺼지럭꺼지럭 발부리로 신발을 끌어가다 꿰고 부엌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직도 끝이 없었겠지만 본즉 옥초는 햇볕으로 두 손길을 나란히 내뻗치고 앉아서 제 손등을 바라다보면서 딴 생각에 잠착해, 이편의 이야기는 듣는 시늉도 않는 것 같아 그만 파흥이 되었던 것이다.
 
154
햇볕이 따끈하게 와서 쪼이는 손길은 혈색 좋은 손톱하며 동글고 복슬복슬한 게 이뻤다. 옥초의 주의는 그러나 시방 그 손길에 가서 있는 게 아니라 노파가 실없이 뜅긴 연애 소리에 그리로 정신이 팔렸던 것이다.
 
155
‘미상불 이렇게 무료할 바이면 어디 소위 그 연애라도 한번 해보자나?’
 
156
‘어쩌면 그다지 심심하든 않으렷다? 한바탕 심장이 들이 아스러지게시리…… 연애는 심장으로 하는 게라지?’
 
157
‘그렇지만 연애란 건 일종 열병이란다는데, 그러니 병을 어디 맘대로 앓고 말고 하는 수도 있나? 장질부사처럼 배양균(培養菌)으로 주사를 맞든지 집어삼키든지 하기 전에야……’
 
158
‘하면 또 누구하고 하노? 와락 눈에 안기는 거 누가 있을라구?’
 
159
‘그러나저러나 간에 연애를 그걸 해본다 한들 막상 그리 신통한 무엇이 있을 건 무언구? 하숙집 점심밥상보다야 좀 덜 어설플 테지만……’
 
160
‘만나 주고, 따라다니고, 좋아하고, 슬퍼하고, 어쩌구 다 그래야 할 테지? 에이 귀찮아! 그걸 누가…… 누가 부전부전 쫓아나가서 그 열병을 치르려 든담? 두고 보기나 할 거지…… 두고 보느라면 연애쯤 한번 기회가 없으리?…… 시방은 이 햇볕과 이 한가로움이 천하 제일이다!’
 
161
마침 이렇게 정신을 팔고 앉았는데 그러자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실상은 호랑이 잡이도 못되고 그저 그 비슷한 자라고 해야 맞지만) 혹시 노파의 입잣이 방정맞았던지 별안간 대문간이 요란하게
 
162
“이리 오너라.”
 
163
찾는 소리가 나면서 뒤미처 웬 양복장이가 끼웃이 고개를 들이밀던 것이다.
 
164
옥초는 그 음성이 장히 귀에 익으나 미처 분간을 못했는데 이내 들이미는 고개를 보니 옳아! 상수였다.
 
165
옥초는 좀 의외였으나 그렇다고 깜짝 놀랄 며리는 없던 것이고 그래 천연이 웃으면서 일어서고, 상수도 얼른 옥초를 알아보고서 싱글벙글 쫓아들어온다.
 
166
“아니 그래…… 그래 이렇게 도망을 해 있기요? 으응?……”
 
167
첫인사가 이렇고, 그렇게 왁자지껄 떠들어대면서 부리나케 대뜰로 올라선다.
 
168
“언제 오섰어여?”
 
169
옥초는 아닌게아니라 제가 한 가늠이 있어놔서 바륵바륵 웃으면서 대뜰로 마주 내려설 듯하다가(쯧!) 그만둔다.
 
170
“아니 그래 사처를 옮겼으면 기별을 해줄 것이지 온 아무리 답장 잘 잘라먹기루 당대 제일이기루서니…… 마구 이렇게 사람을 갖다가 골탕을……”
 
171
방금 집안이 떠나가고, 주인 노파가 호기심과 놀람에 눈이 둥그래서 김치 보시기를 손에 든 채 멍하니 내다보고 섰다.
 
172
그만해도 벌써 재작년 여름방학인데 그때 이후로는 옥초가 작년 여름방학에는 원산으로 가서 지내느라고 고향에 내려가지를 않았고 다른 짧은 방학에는 내려가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내려가기는 했어도 마침 공교로이 상수가 타관 출입을 하고 없었고 해서 그럭저럭 일 년 반, 햇수로는 삼 년 만에 만나는 상수다. 물론 그동안에도 들음들음 소식도 듣고 더욱이 상수 당자의 꾸준한 통신이 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존재를 망각까지는 해버릴 수 없는 오랜 교분(交分)과 걸린 숙제가 있는 걸로 하여 그의 건재만은 아무려나 ‘인정’을 하고 지내왔었다.
 
173
그래 그 재작년 여름방학에 만났을 때까지도 상수는 마침 동경서 학업을 마치고 갓 돌아왔던 참이라 더구나 대학 물림의 헌 교복을(사세가 궁한 것도 아니면서) 털털하게 그대로 입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 태가 하나도 벗지 않았었다.
 
174
하던 그가 척 갈라붙인 양복에 면장님 해 같은 봄외투에 이건 또 삼십 전 총각도령이 웬 내력 없는 몽당수염을 코밑에다가 가꾸어 붙이고 아주 헌다한 촌 신사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남과 주위를 상관 않고 큰 목소리로 떠들고 덤비는 수선스럼도 어쩐지 전과는 다른 취미(臭味)가 나는 것 같았다.
 
175
이 시끄런 청년신사가(아무려나) 옥초의 소위 그 결혼 후보자이던 것이다.
 
176
둘이는 한 고향의 한 동네요 어려서는 학년의 층은 있었지만 보통학교도 잠깐 같이 다녔고 그 뒤에도 이내 상종이 있어 왔고 하는 동안에 자연 둘이는 남녀라는 성별과는 상관이 없이 위선 피차간 숭허물없는 동무가 되었고 그리고 그것이 이내 그대로 연장이 되었고…… 했던 것이다.
 
177
그러나 톨톨 털어서 죄다가 그것뿐이요 그러므로(남이 보기라도 연애는커녕 내외간이 아니냐고 망발을 할 만큼) 서로 말과 태도가 소탈한 것도 온전히 그러한 향토적인 친숙에서 우러나는 것일 따름이던 것이다.
 
178
남도 아닌 당자의 한 사람 상수가 그런데 대단히 행복스러운 착각을 일으켜 일찌기 저와 옥초와는 연애를 하느니라 했고 그 다음에는 장차 둘이서 결혼을 할 것이니라 했고 그리고는 마침내 자 인제 옥초가 졸업을 하면 이어서 바로 결혼식을 거행한다고 해버렸다. 양편 집안에서는 또 저희끼리야 연애를 하거나 말거나 상수가 마땅한 사윗감이요 옥초가 좋은 며느릿감이요 했기 때문에 결론은 상수와 일치했었고 그리하여 시방 상수 못지 않게 ‘결혼식’의 날을 기다리는 참이다.
 
179
상수는 그러므로 이번 길이 불원간 신부가 될 애인 옥초를 영접하는 경의를 표할 겸 재촉하여 데리고 갈 겸 매우 감격하고 축하스런 걸음인 만큼 허위단심 찾아 올라온 신부자리 애인의 행방을 놓치고서 한바탕 애를 태우고 쩔쩔맸다는 것 쯤 옛날 풍속의 ‘댕기풀이’로 발바닥 몇 대 맞은 셈만 치면 그만일 뿐 아니라 유쾌한 화제가 뒤에 남으니 오히려 이문이라고는 할 수가 있을 것이었었다.
 
180
“……그래 뭣이냐 서울 당도하기는 벌써 그저끼 아침에 당도를 했는데 글쎄 학교 기숙사루 찾아가니깐 아 빈탕이겠지! 허허허허.”
 
181
“수고하섰군요! 앨 쓰구 찾으시느라구……”
 
182
이 치하의 대답을 그의 눈초리로 입가로 떠오르는 비양스런 미소와 아울러 새김질을 한다면
 
183
‘대체 무슨 그리 긴한 소간이 있다고 그다지 들레고 다니면서 나를 찾더란 말이냐.’
 
184
는 박절한 구박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나 요행 상수에게는 그런 것에다가 낭비를 할 신경의 여유는 자못 적었던 것이다.
 
185
“하! 수고면 약간한 수고던가?…… 아 글쎄 어떻게 들이 헐떡거리고 돌아댕겼다구! 그래두 영 아는 장사가 있어야지?…… 글쎄 막상 모르는 노릇이니 경식군 더러라두 한번 물어보구서 떠났으면 좋았을 게 아니야, 허허……”
 
186
경식은 고향에 있는 옥초의 오라버니다.
 
187
옥초는 주인 된 도리가 늦어감을 잊었던 것은 아니나 흔연히 마음이 내키지를 않아서 주저주저하던 것인데 그렇다고 영 몰인사하잘 수도 없고, 하릴없이 그 주체스런 생철통이를 방으로 청해 들인다.
 
188
옥초는 상수가 시방 우렁이 속 같은 속이 있어서 열불나게 쫓아올라 온 꼴이 우습기도 하고 밉살스럽기도 하고 하여 한두 마디 비꼬아 주고 하기는 한다더라도 (그것 역시 친함에서 우러나는 악의 없는 농이어야 할 것이고) 멀리 고향에서 찾아와 준 다정한 동무로서 오래간만에 만나는 존경하던 선배로서 당연히 우정과 도리를 갖추어 전과 다름없이 그를 반가이 맞고 흔연히 대접하고 했어야 할 것이지 그렇게 갖다가 주체스러하고 마음 내켜하지 않고 할 일이 아니었었다.
 
189
그만 경우는 옥초도 모르던 것이 아니고 그래서 속으로는 민망한 생각도 또한 없지 못했다. 그러나 기분이란 고정한 것이어서 억지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190
여자의 젊은 신경이란 건 참으로 직감이 예민한 것이 있었다.
 
191
대체 그새가(오랬다고는 하지만) 다직 일 년 반 남짓한 동안인데 이 상수라는 사람을 차차로 주의해 보면 볼수록 위인이 고약하게 변한 자취가 사방에서 드러났다. 발산하는 인간의 기품부터가 전일의 그 상수가 아니었었다.
 
192
어디라 없이 촌때가 낀 것 같고, 꼈으되 그 촌때는 순박한 농촌의 구수한 때가 아니라 술집 색시네 새서방의 삼팔저고리 동정에 묻은 때와 같은 그런 주접스런 때였었다. 그리하여 그에게서는(엄살을 하기로 하면 골치가 아플 만큼) 고약한 속취(俗臭)가 풍기던 것이다.
 
193
그러나 그보다도 더 망측한 것은 그의 그 떠들고 덤비는 것인데, 처음 언뜻 보기에도 전자의 그것과는 도저히 계통이 같은 물건이 아니었었다.
 
194
전일의 그가 떠들고 덤비던 것은 하나의 진정에서 우러나는 정열로서 아무 가식과 표리가 없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었다. 그러나 시방은 겉으로는 그럴싸하면서도 속은 말짱하니 다르고 그래서 버엉떼엥하고는 남을 엎어 삶는 일종의 말재주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었었다. 이 말재주만 남고 정열의 알맹이는 빠져버린 상수의 떠드는 수작에서 옥초는 거리의 약장수를 연상치 않을 수가 없었다.
 
195
그것이 공평하고 사 없는 판단이냐 아니냐는 알 바 없고 다못 인상이 그처럼 외로 가고 보니 자연히 옥초는 전처럼 가슴을 활짝 터놓고 소탈한 심성으로 옛 우정과 도리를 갖추어가면서 그를 맞고 대할 마음이 내키지를 않던 것이다.
 
196
이편 상수는 그러나 누가 눈치를 하건 코치를 하건 알려고도 않고 또 알았더라도 모른 체할 판이요 면장님 같은 봄외투와 모자를 벗어 들고 성큼성큼 방으로 따라 들어오면서 여전히
 
197
“……아 그래 헐 수 없이 경식군한테루 전보를 쳤더니……”
 
198
하고 떠벌리다가 주인이 미처 권하기도 전에 아랫목 방석 위에 가서 털썩 주저앉는다.
 
199
“……아 그랬더니 이제 방금야 편지루 회답이 왔길래 그래 시방…… 허허허허. 원 그렇게두 사람을 갖다가 골탕을 먹이더람? 허허허허.”
 
200
인제는 아무려나 찾아내기는 찾아냈으니 다 안심이요 굴지고 그리고 다시금 반갑다는 속이리라. 고개를 됫새 들고 입을 히죽벙긋, 위로 아래로 옥초를 건너다 보기에 그 한시도 지껄이지 않고는 못 배기는 말도 잠시 잊어버린다.
 
201
“건데 뭣이냐 저어……”
 
202
이윽고 상수는 한참이나 그렇게 옥초를 건너다보고 앉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그리고 또 입도 그만했으면 심심할 때도 되었고
 
203
“……즘심을, 즘심을 먹어야지? 아직 안 먹었지?”
 
204
“네, 아직……”
 
205
“나두 아직 안 먹었는데…… 그럼 우리 좀 있다가 같이 나갑시다그려. 같이 나가서 즘심두 먹구……”
 
206
“저는 괜찮아요 예서 아무꺼나……”
 
207
“허어! 그럴 법이 있나! 날 같은 촌사람 안내두 해줄 겸 같이 거리루 나가야지 응? 안내해요?”
 
208
“안내야 해드리지요.”
 
209
“아무렴! 그렇다면 몰라두!”
 
210
옥초는 이 사람이 농을 그렇게 하거니 하고 얼굴을 치어다보았으나 아주 천연덕스럽다.
 
211
“……그리구…… 허어 이거 내가, 이거 인사가 늦어서…… 뭣이냐, 이번에 참 영광스럽게 졸업을 해서 대단히 참……”
 
212
“영광은 그까짓 게 무슨 영광인가요? 괜히 거저……”
 
213
“허어! 그럴 리가 있나! 대단히 영광스럽지 않구! …… 그리구 뭣이냐 시굴 댁에서두 두 분 노인께서 다아 안녕하십디다. 경식군은 머 자주 만나서 놀기두 허구 가끔 술추렴두 허구 하니깐……”
 
214
상수가 술을 먹다니 선뜻 의외로왔으나 사람이 저다지 변했을 바에야 오히려 당연한 타락이거니 싶었다. 옥초는 그것을 타락이라는 관념 이외에 달리는 생각할 거리가 없었다. 또 술을 먹으면 타락을 한단 소리는 일찌기 상수가 제 입으로도 부르짖던 말이고……
 
215
그런 일 저런 일을 생각하면서 옥초는 빙긋이 웃고 말이 없고, 상수는 저 역시 지나간 그 당절의 제 말이 옥초의 기색에서만 해도 생각이 날 만한 자리라 헤벌쭉 한번 웃더니
 
216
“거 어디 헐 수 있더라구! 뭣이냐 명색 교제두 해야 허구 그러자니 자연…… 허허허허.”
 
217
“교제를 다아 하시는군?”
 
218
“허허허허,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미처 편지루라두 기별은 못했지만 뭣이냐 이번에 내 벼실을 한 자리 했지 벼실을, 허허허허…… 읍회의원을 하나 얻어 했어요! 허허허허.”
 
219
필요 이상으로 거듭 그리고 더 야단스럽게 너털웃음을 치는 것은 과거 일 년 몇 개월 동안을 두고서 서서히 치른 변화를 시방 이 자리에서는 단 이 분이나 삼 분 동안의 시간 안에다가 압축을 해서 노출을 시키자니 제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빛깔이 선명해 보이거늘 황차 옥초(옛날 그대로의) 옥초의 앞인데야 아무래도(처음 한 번쯤은) 무렴을 타지 않을 수 없는 피부(皮膚)인지라 시방 그 무렴을 얼버무려 넘기자는 동정스런 노력임을 옥초도 모를 바는 없었다.
 
220
말이 없이 다만 비양스런 미소를 드러내고 말끄러미 바라다보는 옥초를 상수는 마주 히죽히죽 건너다보다가 또 한마디 발명하듯
 
221
“머, 거저 일종 명예직이지!”
 
222
“네에! 읍회의원을 하시구…… 네에! 명예를 타시구……”
 
223
옥초는 여전히 빙긋이 웃는 입초리로 연신 혼잣말을 뇌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감심을 하여 마지않는다. 한 가지 두 가지 차차로 차차로 비어져 나오는 사실이 의외는 의외이었으나 그러나 예외 없이 죄다가 이 사람이 분명코 그동안 위인이 변했구나 하고 아까 미리서 짐작을 했던 그 짐작과 일일이 들어맞는 것이어서 그것이 옥초에게는 구경답고 감심스럽던 것이다.
 
224
“……잘하섰군요! 축하합니다!”
 
225
옥초는 짐짓 입초리의 웃음을 지우고 정도 이상으로 고개를 깍듯이 숙인다. 태도와 기색하며 말이 이렇게까지 나오는데야 번연히 비양인 줄을 모를 이치가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상수는 종시 상수라 여전한(보다도 과연 읍회의원 영감다운) 너털웃음을 한바탕 치더니
 
226
“거 머 그리 푸달진 명예라구!…… 심심하니깐 무어나 얼거리라두 장차 생길까 하구서 우선……”
 
227
우선 그래 둔 것이고 명년에는 도의원 선거에 출마를 할 테란 소리는 할까말까 하다가 그만두던 것이다.
 
228
“네에! 일을요오!…… 어쩌문 다아 그렇게…… 네에…… 그럼 그 묵자철학(墨子哲學)이라더냐, 아따 저 거시키 터럭 안 뽑는 철학 그건 인전 그만두섰나요?”
 
229
“허허허허 어허허허! 이거 내가 이렇게 몰리다가는 당최 이건 앉구 못 일어서겠군! 그래! 허허허허. 그러나저러나, 차일시 피일시 아니우? 어떡허우?…… 나두 많이 두구서 생각두 해본 나머진데 별수 없어요! 밤낮 서생인가? …… 거저 우리 같은 범인은 괜히 혼자서 고고했자 별 뾰족수 없구, 거저 현실과 타협을 하는 게 가장 현명한 노릇이야! 현실과 타협해서 …… 친하구 응?…… 시대가 시방 시대가 다아 그런 걸 어떡허나? 그렇잖다구?”
 
230
“네에! …… 아무턴지 한 두어 길 넉넉 뛰섰구먼요!”
 
231
옥초는 상수의 변화도 변화려니와 그의 턱없는 비약이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잉어가 한 길을 뛰니까 망둥이는 두 길을 뛴다는 속담을 생각하고 하는 말이었었다.
 
232
“두 길을 뛰었다? 허허허허……”
 
233
말귀를 알아들었더라도 그런 조롱쯤 아무렇지도 않아하고 짐짓 모른체했을 테지만 아무려나 눈치를 채지 못한 모양이다.
 
234
“……그렇지 두어 길 뛴 셈이지! …… 옳아! ‘산당도비’를 했어 ‘산당도비’를! 허허허허.”
 
235
웬만큼 그래도 말 귀가 틔었어야 비양도 할 맛이 있는 법이지 이 생판절벽한테는 아무 효험도 날 게 없었다.
 
236
“……그런데 말이지 ‘산당도비’가 됐거나 ‘도당도비’가 됐거나 내 제발 빌께시니 옥초두 날 갖다가 읍회의원 나부랭이나 얻어 하구 다닌다구 비양만 하지 말구서 자알 이해를 해주어요!”
 
237
“허어! 괜시리 시방……”
 
238
상수는 일찌기 동경서 ✕✕대학의 지나철학과를 마쳤고 그리고는 또 무슨 의사로 이태 동안이나 ✕✕대학에서 정치경제를 연구하고 그리고서 마지막 돌아온 것이 그때 재작년 여름이었었다.
 
239
그전에도 그러했지만 그때까지도 그는 현실이 나의 이상과 맞지 않는 바이면 터럭 하나라도 세상을 위해서는 뽑지 않는다고 정열적으로 부르짖던 젊은이였었다. 그 기개가 자못 핍절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감동을 받게 했었고 그 운덤에 발일모이 위천하라도 불위(拔一毛而爲 天下不爲)라는 그 한마디는 특히 옥초에게 깊은 영향을 끼쳐주었었다. 오늘의 옥초의 고답적인 결벽은 은연중 그 말 한마디가 들어서 길러 주었던 것이다.
 
240
아뭏든 그리하여 그때 당시의 상수를 생각하고 시방 오늘의 상수를 볼 때에는 우선 석금의 회포가 없지 못할 만큼 변천이 놀라왔다.
 
241
하기야 그동안 겨우 일 년 반 남짓한 세월에 세상은 눈이 부시게 급격한 변천을 했고 세상이 변하니 당연한 추세로 사람도 따라 변하기야 할 것이었었다. 그러나 이 상수만 하더라도 자못 핍진한 체 현실을 내세우고 시대를 내세우고 하기는 하는 것이나 옥초가 앉아서 보기에는 그것은 마치 약효도 없는 약을 가지고 단지 약이라는 이름(이름만) 밑에서 오늘 밤 제 집의 저녁 양식을 벌기 위하여 허풍을 치면서 입담 좋게 지껄이고 섰는 거리의 약장수와 같은 협잡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었었다.
 
242
이렇듯 일찌기는 그만큼이나 근엄도 하고 순직도 하여 족히 존경하기에 빠질 곳이 없던 그 상수가 불과 일 년 반 동안에 능청스럽게도 거리의 약장수다운 협잡꾼이 되어버렸던 것이고 그리하여 그 얌체 없이 무성한 발육이 곧 옥초의 완상의 촛점이었던 것이다.
 
 
243
옥초는 마음이 대단히 상쾌했다.
 
244
그는 실상인즉 그새까지는 결혼문제를 두고서 상수에게 대하여 의리에 가까운 부담을 잠재적으로 느껴온 것이 사실이었었다. 찐더분한 일종의 걱정스러움이었는데 그것이 방금 상수를 만나 잠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마치 공중으로 올라가다가 사라진 연기처럼 홀연히 다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245
무거운 꿈에서 시원하게 깨난 것 같다고 할는지 어떻게나 마음이 거뜬한지 몰랐다.
 
246
하기야 일변 생각하면 불행이라고 할 수 있는 남의 소위 ‘타락’에서 요행을 횡재해가지고 기뻐하는 셈쯤 된 게 되어 적잖이 잔인한 짓이기도 했으나 그렇더라도 막부득이한 노릇이었었다.
 
247
마음이 아뭏든지 그렇게 해방이 되고 나니 오히려 상수를 대응하기가 그새까지 보다도 두루 임의로왔고 그랬기 때문에 상수가 점심을 같이 하러 나가자고 다시 청하는 것도(먼저에 얼추 대답을 한 것도 있고 하여) 꺼리지 않고 선뜻 응낙을 했다.
 
248
다만 한가지 구경꾼이 주욱 따라오기 마침감인 이 “무지한 생철동이”를 길거리로 차고 나가기가 좀 안된 것 같기는 했으나 그것도 세파트가 아닌 바에 망신이면 제 망신이지 내게 무슨 상관이랴 하면 그만이었었다.
 
249
설혹 신사로 승차가 되지 않았기로서니 레디의(황차 약혼이 절로 익은 미쓰의) 출입 전에 필요한 용무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야만은 아니었을 것이고 그런지라 상수는 먼저 방을 피해 나오더니, 험 험, 대단히 근량이 나가는 밭은기침을 해가면서 넌지시 대문 밖으로 완보를 띄어놓는다. (안방에서는 주인 노파의 자라 모가지가 나왔다 들어갔고.)
 
250
상수는 자못 만족한 형편이었었다.
 
251
와서 보니(찾기에 힘은 좀 들었어도) 전과 다름 없는 말썽꾼이는 말썽꾼이로되 그러나 역시 전과 다름 없는 친숙한 ‘애인’임에 틀림이 없고, 읍회의원 일건도 생각하더니보다는 오히려 깊이 괘념을 않는 눈치요, 배식을 청한즉 처음에는 사양을 하다가(그야 사양을 하는 게 지당하지! 걸신 들린 천민처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네에 하고 따라나설까? 적어도 우리 옥초양인데) 두 번째의 청에는 흔연히 응하고 나서 주고……
 
252
컨디션이 다 이만큼 양호하니 이따가 점심을 먹으면서 오늘 밤차로 둘이서 같이 동반해 내려가지고 달래면 별반 고집 세우지 않고 말을 들을 것이고……
 
253
전후사가 두루 이러하고 보니 상수야 만족치 않을 수가 없고 큰기침이 나오지 않을 이치가 없던 것이다.
 
254
이윽고 옥초가 끝동 없이 고름만 자주로 단 하얀 하부다이 저고리에 무늬가 맘껏 굵은 벨벳의 맑은 남빛 치마를 치렁치렁 받쳐 입고 새로 마추어 두었던 깜장 에나멜 구두를 손에 들고서 마루로 나선다.
 
255
주인 노파가 좋아라고 흐물흐물 웃으면서 쪼르르 옆으로 쫓아온다.
 
256
“그러문 그렇지! 글쎄 이렇게 좋게 생긴 처자가 괜히 글쎄 연애하는 이가 없대서야 오온!”
 
257
옥초는 웃으려다가 말고 말끄러미 노파를 건너다보면서
 
258
“그이가 나허구 연애하는 사람 같아요?”
 
259
“아니문? 호호호…… 허긴 또 어떻게 보문 먼촌 오라버니 같기두 허드구면서두…… 그래 진정 누구요?”
 
260
옥초는 자그락거리는 구두를 디디고 일어서면서 바륵바륵
 
261
“먼촌 오라버니는 아니라두 그저 그렇답니다. 아무 걱정두 마세요! 마나님 말씀마따나 아직두 얌전하니깐요, 네.”
 
262
하고는 고개를 까댁, 돌아서서 가분가분 걸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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