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비평적 모랄과 방법 ◈
카탈로그   본문  
1957. 9. 18
고석규
1
비평적 「모랄」과 방법
 
 
2
「애정비평시론」이라는 작가 이무영씨의 글이 《자유문학》 7월호에 발표되자 40대 이상의 기성들은 이에 대하여 뇌동적인 갈채를 보냈는가 하면 이하의 신진들은 약간의 불만과 더불어 냉소하거나 아니면 시틋하는 것을 보아 왔다.
 
3
그의 내용인즉 불필요한 인신공격을 제거하고 경거망동을 삼가하라는 작가로서의 중용적인 호소였으되 얼핏 3자의 눈으론 이씨 자신이 처우할 세대적인 발언이라 아니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애정비평시론」엔 세대적인 유착과 반목을 시정하기 위한 공동과제가 은근히 제시되었다고 믿는 바이니 하나의 얼치기에 불과한 나지만 이러한 비평 아닌 비평에 있어 보다 중요한 문제성을 발견하게 된 것을 여간 기뻐해 마지 않는다. 씨의 변명과 같이 「비평무용론」이 아니라 「비평개조론」이라는 관점에 있어선 더욱 그러하다.
 
4
과연 이씨는 어떤 의미에서 「애정」이란 말을 썼을까? 이의 실제적인 설명을 돕고자 나는 아래와 같이 인용하려 한다.
 
 
5
애정을 느끼는 사람한테는 욕설을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비평은 애정세계에 살면서도 엄숙한 존재다. 비평에 불필요한 어구가 드는 것은 비평의 생리가 아니며 애정도 아니다. 과학에 개인 이야기가 나올 리가 없다.
 
 
6
이렇듯 씨의 애정비평관이란 정실적인 이해에만 그치지 않고 오히려 엄숙한 존재로서 비정화되며 동시에 방법적인 지식을 획득하여 「과학」과도 일치되는 비평양식을 요청함에 있다 할 것이다. 그나마 「애정」의 시비를 방법적인 문제와 관련지어 논의한 이유를 나는 직관으로 알아볼 수가 있었으니 생각컨데 이즘은 동고상린에 자만하고 있는 40대 이상의 기성들과 또한 의사과학적인 방법론에 들뜬 2·30대의 신진들에 대하여 씨는 꼭같은 화살을 던졌던 것이다. 화살인 줄 모르고 맹목적인 갈채를 보내는 축보다는 차라리 시틋하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으나 어쨌든 양세대가 범하고 있는 극단적인 오류를 지적하면서도 저들의 모순을 지양해 나아갈 가능성을 기대한 것으로 미루어 양세대간엔 모순과 함께 마땅히 절충되어야 할 다른 조건들이 얼마든지 내재되어 있다는 역설을 발견하게 된다. 매양 독설과 「선손」치기를 직업삼아 발호하는 비평가가 있다면 양식에 호소하여 그로 하여금 영락없이 우리 문학의 공동적으로 지탄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앞으로 시정되고 건설되어야 할 「애정비평」의 범주를 그렇게 뒤떨어진 비행에만 겨누어 말할 계제가 아닌줄 생각한다. 하물며 「애정」의 의의를 비평적 「모랄」과 매한가지로 새길진대 「과학」으로서 헤아려진 비평의 생리란 그와 결부된 비평적 「방법」을 시사한 것이나 다름 없겠다. 따라서 양세대간의 모순은 한 마디로 「모랄」과 「방법」의 대립이라고 불러 마땅할 것인데 이씨는 이러한 세대간의 대립을 미리부터 해소할 동기에서 였던지 소위 「애정」으로써 대표되는 「모랄」과 방법문제를 동시에 제기한 것이었다.
 
7
씨의 견해는 다시 《자유문학》 8월호에 실린 「소설과 모랄」에 있어서 더욱 드러난 느낌을 주었으니 「방법」을 통하여서의 「모랄」을 추구한 점에 있어 이 글의 앞의 「애정비평시론」과 불가분의 위치를 점한다고 믿어졌다. “나는 먼저 예술의 창조성과 소설의 「모랄」과를 결부시켜 보고 싶은 것이다”라는 구절에서와 같이 씨는 「방법문제」를 다만 창조성이란 말로써 대처하였을 뿐 색다른 구명이라곤 보여주지 않았으니 임의대로 「창조성」이 결여된 비평을 「애정」이 결여된 비평 내지는 「모랄」이 결여된 비평이라고 귀납한다해도 씨의 논리에서 우리는 아무런 당착도 느끼지 않는다. 이는 작가로서의 씨 자신이 부딪치고 있는 고민의 일단이라고 추측되거니와 한편 비평문학의 현황을 바라보는 씨 자신의 전용적인 투시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씨가 풀이한 작가로서의 「창조성」과 비평가로서의 「창조성」 간에는 상당한 차질이 개재 되며 이 두 가지를 함부로 혼동한 이유로 해서 끝내 「애정비평시론」은 시론을 넘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8
「애정」과 「과학」 그리고 「모랄」과 「방법」이 서로 대립할 수 없다는 전제에 입각해서 씨의 창조성의 이론은 전개되었지만 소설의 경위와 비평의 경위가 어떻게 다른가를 미쳐 분별할 겨를 없이 한갖 동위개념으로만 집필한 원인으로 말미암아 한세대는 뇌동하는데 다른 한 세대는 시틋거리지 않을 수 없는 대립적인 반향을 짓고야 말았던 것이다.
 
9
하지만 이씨 자신을 애써 고발할 만한 뾰족한 이유를 골라잡기 위해서 보다는 오히려 작가적인 견해를 그대로 묵인하고 버려둔 비평문학의 취약성을 나 자신에게 향하여 스스로 고발하려는 충동이 더 모진 것 같다. 그러면 비평적 「모랄」(애정)과 결부되어야 할 비평의 「창조성」(방법)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10
옛적부터 「무에서 유」를 찾는 것은 가리켜「창조」라고 불러왔으나 비평의 방법을 그토록 과학일방적인 것으로만 단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이씨가 소설의 「창조성」을 두 가지로 나누어 시대의 「반영」과 「형식」의 변화라는 양면에서 생각한 것처럼 「무에서 유」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며 「반영」에 열중하는 작가의 목적과 형식상의 「바레이순」을 꾀하는 작가의 방법이 결코 기적적인 인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창조성」의 의미를 “실재한 현실 그 자신의 모사가 아니라 가능성의 세계의 형상인 것이다”라는 씨의 정의에로 옮겨놓고 본다 하더라도 현실에 토대하면서 현실 이상의 것을 창조하려는 노력을 가르쳤음이 분명한즉 「무에서 유」가 아니라 「유에서 무」를 더듬는 길이 아닐까도 생각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되는 「창조성」에의 해석은 소설에서 보다 더 한층 비평에 있어 가능할 줄 믿는다. 시대의 「반영」을 위한 「형식」또는 「방법」을 모색한 데 작가로서의 타당성이 있었으면서도 한편 그것을 비평분야에도 강권한 점에 있어서 있는 엄청난 오류를 저지르고 말았다. 반대로 시대의 「반영」을 목적으로 하는 소설과도 비슷하게 작품의 「반영」만을 목적으로 하는 비평이 넘나들게 된다면 누구든지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다.
 
11
다시 말하면 「반영」을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반영」을 목적으로 한 비평의 「방법」을 생각할 순 없다는 것이며 이래서 점점 소설의 「방법」(형식)과 비평의 「방법」과를 척결하여야 될 필요성에 사로잡히어 적어도 비평의 방법이란 「반영」을 위해서만 목적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야 할 것이다.
 
12
비평가는 비평대상을 대개 작품에 한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작가론을 비롯한 문학사 전반의 문제와 같이 광범한 대상도 허다한 것이니 어찌 비평가의 목적이 이러한 대상을 「반영」하는 데만 그친다 할 것인가. 여기서 나는 작가의 「반영」을 마다하고 잠시 비평가에게 대하여 「선택」이란 다른 목적을 새로이 종용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사뭇 비평가란 비평대상의 「반영」만을 목적하지 않고 비평대상의 「선택」을 목적하면서 존재하는 지도 모르는 까닭에서 이다.
 
13
그러나 「선택」의 어의란 여간 복잡한 것이 아니다. 소설에 있어서의 「반영」의 피동성에 대항하는 비평의 「선택」이야말로 가장 의식적인 능동형에 의하여 밑받침 되었다고 주장한다면 대개의 식별은 명확하지 않을까 싶다. 만일 비평가에게 독자적인 권위가 부여된다면 이러한 「선택」의 자유 아니고선 따로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선택」에는 다시 자유와 더불어 엄중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택」의 자유라고도 할 비평의 목적이 「선택」의 책임이라고도 할 비평의 방법과 동시에 결부되게 될 대 비로소 우리는 자유와 책임을 겸한 「선택」이며 목적과 방법을 겸한 비평의 권위를 옹호하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비평의 권위는 비평의 본질과도 일치된다.
 
14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겸하는 비평가의 「선택」을 보살피기 위해서 나는 비평의 기능을 일종의 가치판단이라고까지 규정한 재래식 논리를 새삼 빌리기로 하겠다. 아다시피 일반적인 가치판단은 상대적으로 효용의 면에서만 생각되는 것이 보통이나 비평에 있어선 작용의 면과를 합쳐서 생각하는 데에 그의 특징이 있다.
 
15
이를테면 작용과 효용의 양면을 하나로 보지 않고선 가치의 본질적인 이해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곧 생산자의 입장과 향수자의 입장에 동시적으로 선다는 의미와도 같다. 한 마디로 비평가란 작가와 독자, 특수와 보편간의 매개에 불과하며 그만큼 이들간의 조화를 위하여 노력함으로써 비평적 가치판단은 저절로 완숙해진다고 보아지며 이러한 매개로서의 자각과 조화의식이 바로 비평의 기능을 조장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16
무릇 비평의 기능이란 비평가 자신의 「선택」을 떠나선 발휘될 수가 없다. 그러나 비평의 기능이 인상비평에서와 같이 지나치게 자유로 방조 한다든지 아니면 객관비평에서와 같이 지나친 책임감에 속박될 때 기능자체의 마비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7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겸하여야 될 비평가의 「선택」을 달리 비평가적 체험이라고 불러 본다면 참된 체험에서 우러나지 못한 기능과 가치판단을 어떻게 용인할 것인가가 우려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작가인들 그러한 체험에 투정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적어도 작가는 반영이라는 작가적 체험을 통해서 이러한 양면에의 작용을 무의식적이나마 이미 여과한 것에 틀림 없겠으나 그것을 다시 의식화하며 판단하는 곳에 비평가적 체험이 성립되며 우리는 체험의 이중성 같은 것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다시 말하면 작가의 반영을 이중적으로 체험한 곳에 비평가의 「선택」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매우 까다로와졌으나 새삼스럽게 가치판단에 대하여 운운할 아무런 약속도 느끼지 않는다. 「선택」의 자유가 「작용」의 면에 더욱 치우칠 때 그 비평가는 과학자가 되는 것이며 선택의 책임이 「효용」의 면에 더욱 치우칠 때 그는 「모랄리스트」가 된다고 보면 크게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18
다시 말하면 작가의 바라보는 눈이 어디까지나 잠재적으로 작용함에 비하여 비평가의 바라보는 눈은 보다 현재적으로 작용한다는 소설과 비평과의 서로 다른 측면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라도 말해 본 것인데 여기엔 또한 적지 않는 의문이 동반될 지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의문을 벗어나서 작가의 반영이 수법 또는 형식이라는 방법에 의해서만 부축되는 반면에 비평가의 「선택」은 과학에까지 연장되는 방법론에 의하여 부축되면서도 오히려 그것과 동시동존함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19
소설에 있어서 자칫하면 과장되기 마련이었던 효용(모랄)의 면이 작용(방법)의 면과 서로 분리되어 논하여진 것 같이 달리 비평에 있어서의 이와같은 두 가지 면은 오직 「선택」이라는 비평가 자신의 매개적이며 조화적인 체험에 의하여 하나로 논하여져야 하는데 비평이 가지는 현대적인 저항이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씨의 소설관이 다분히 자연주의적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원인도 대개 추측하기가 어렵지 않다.
 
20
나는 다시 비평가의 「선택」이 자유와 책임, 방법과 「모랄」 그리고 작용과 효용이라는 양극단에 동시적으로 움직임으로써 하나의 질서감을 누려볼 수도 있다는 것을 사족할까 한다.
 
21
「선택」의 조건이라고 알려진 비평가의 체험이 전혀 무질서하게 남발될 때 누구나 「선택」의 잠재적인 위험을 모면할 수 없었던 것을 기억하리라. 가치에의 본질적인 이해가 부풀어져 이러한 두 가지 면이 두 가지 극단을 한결같이 매개하며 조화하려는 의식으로 번져서 역사적 전통과 합일될 때 동시성을 획득하게 된다. 비로소 「동시성」이란 말도 쓰긴 하였지만 역사와 전통에 대한 이렇다 할 체험조차 누려보지 못한 우리로선 지나친 소망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에겐 영영 아무런 질서감도 바랄 수 없다는 것인가. 사실상 뒤범벅된 「모랄리티」의 줏대를 함부로 고정시킬 수 없는 우리 문학의 비애가 여기에 노정된다.
 
22
허나 주어진 「상황」이란 것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상 우리는 이 「상황」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가 없고 보니 우리 자신과 「상황」과의 조밀한 관련에서 맺어진 숙명같은 것에 의해서라도 줄곧 억눌리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질서에 대한 반항과 부조리성이 더욱 질서감에 앞서서 대두되는 것을 아무라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질서에 대한 반항과 부조리성이 오히려 질서에 대한 역설적인 실존이 되었음은 우리가 불란서를 비롯한 2차전쟁 중의 서구라파에서 내내 눈익힌 바와 같다.
 
23
비평가의 「선택」을 좌우하는 비평가적 체험의 심도란 질서에 대한 반항 내지는 부조리성에서 발화되면 될수록 더욱 완전한 질서에의 가능조건에로 접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거듭 강조하면서 비평적 「애정」과 비평적 「모랄」도 필경은 여기에 초점이 모아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애정은 첫째 그 문학에 대한 애정이어야 한다”는 이씨의 발언을 차근차근 되씹어 볼 여유가 있어 유해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 바다.
 
24
이상과 같이 비평가의 선택이 자유와 책임, 작용과 효용, 과학과 애정 그리고 방법과 「모랄」의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어떠한 집단이나 어떠한 세대에 있어서도 서로 대립할 수 없으리라는 나의 견해는 아무래도 이 씨의 논리를 선의로써 해석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25
대충이나마 이것으로써 나는 작가 이무영씨가 「소설과 모랄」에서 부연한 「반영」과 「형식」과의 문제를 비평에 있어서의 「선택」과 체험적인 「방법」과의 문제로써 유추한데 지나지 않지만 작가보다는 수백배로 방대한 자유와 가열한 책임의 저울 위에 비평가의 위치가 있다는 것을 내 일처럼 확인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26
하여 소설에 있어서의 「형식」이란 작가적 「모랄」의 표현인 「반영」의 수단에 불과했으나 비평에 있어서의 방법을 비평가적 「모랄」의 표현인 「선택」의 수단에만 그치지 않고 오히려 「선택」하는 비평가 자신의 체험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그러한 체험은 잠재적인 작가의 경우와 달라 아주 의식적으로 표현화 되며 비판된다고 보는 것이다. 어쨌든 비평가에게 「소설작법」에서와 같은 초보적인 과제를 들어 소위 「애정」으로써 대표된 「모랄리티」를 강조하기 보다는 비평가들이 지금 어떠한 혼선에서 어떻게 망설이고 있는 가를 포착하여 어디까지나 비평으로서의 광범한 토의에 부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한다.
 
27
「애정비평시론」의 마지막에 이르면 이런 가설이 눈에 띈다.
 
 
28
비평이 작가의 비소를 면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 문학의 이해를 위한 심오하고 광범한 「지식」을 갖는 길밖에 없다. 이 지식을 갖고 싶어하는 마음의 출발이 애정이기 때문에 작가는 비평에 애정을 갈구하는 것이다.
 
 
29
오늘의 작가들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를 이 이상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30
나머지는 방법문제다. 방법의 자중과 혁신만이 「모랄리티」의 보루가 되고 방패가 되는 것을 깨쳐야 한다. 구례와 관습에 젖어 있다가 자칫하면 「애정비평」의 호소에 뇌동되어 갈채하고 나선 기성들이며 또한 범서구적인 실험실 내에 몰두한 채 도무지 바깥 일에 대해선 시틋거리기만 하던 신진들에게 지금 공동으로 부과된 「비평적 모랄과 방법」의 문제, 그리고 이와 유사한 문제들이 비단 작가와의 대립적인 경우에만 머물지 않고 한창 냉전으로 인하여 권태 중인 비평가 자신들의 붓과 입으로써 더 진지하게 논의될 것을 나는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31
《1957. 9. 18. 부산일보》
【원문】비평적 모랄과 방법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평론〕
▪ 분류 : 근/현대 수필
▪ 최근 3개월 조회수 : 19
- 전체 순위 : 2502 위 (3 등급)
- 분류 순위 : 307 위 / 1821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고석규(高錫圭) [저자]
 
  # 부산일보 [출처]
 
  1957년 [발표]
 
  평론(評論) [분류]
 
  # 문학평론 [분류]
 
◈ 참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수필 카탈로그   본문   한글 
◈ 비평적 모랄과 방법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1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