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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주의적 창작 메쏘데의 서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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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12
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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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주의적 창작 메쏘데의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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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주의 문학, 낭만주의 문학 등의 공상적, 주관적 문학이 대립하며, 19세기 말경에 대두한 것이 소위 자연주의 문학 ─ 리얼리즘 문학이다. 그들은 모든 사물을 이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가장 과학적으로 묘사하려는 의도로 어떤 동물을 쓰려면, 그 동물의 박제를 책상 위에 비치하고, 수일간 연구한 후에 썼으며, 어떤 병자를 쓰려면 그러한 병자가 수용되어 있는 병원에 직접 들어가서 견학을 한 후에 썼으며, 광부생활을 쓰려면 직접 광산에 가서, 매음부 생활을 쓰려면 직접 매음굴에 들어가서 주밀(周密)한 견학을 하였다. 그러한 의도로 지은 그러한 문학은 종래의 거대한 세계와 복잡한 사물을 적은 두뇌 속의 순전한 주관적 공상으로 날조 창작한 문학에 대하면, 야만에서 문명적으로 발달한 인류의 과학적 문학 보담 고도로 비약한 문학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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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즉 그들이 그렇게 엄정한 과학적, 객관적 태도로 모든 사물을 묘사하려 하였음에 불구하고 그들의 묘사한 사물은 역시 진정한 의미로의 과학적 유물론으로 묘사되지 못하였으며, ‘그것 그대로’묘사한다는 세계 사물이 ‘그것 그대로’ 묘사되지 못한 이유는 어디 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고도 명백하다. 그들은 모든 사물을 그 본질을 보지 못하고, 다만 표면에 나타난 피상적 현상을 직각(直覺)만으로 육안만으로 보았다. 그래서 부단히 변전 유동하며 복잡한 관련 속에 있는 사물을 영구히 부동 불변하는 개개(個個)히 절대 독립해 있는 사물로 보았다. 마치 하천의 물을 볼 때에 부절(不絶)히 흘러가는 물을, 또 땅바닥 위에 흘러가는 물을 보지 못하고, 다만 크고 길다란 뭉치가 공간에 한결같이 누워있는 물로 보는 것 같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들이 본 광부와 매음부는 그들에게는 영원히 두터운 베일 속에 숨어 있었다. 그것이 구(舊)리얼리즘의 결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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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새 리얼리즘 ─ 소시알리스틱 리얼리즘은 모든 사물에 대하여 영구부동 불변하며, 절대 독립해 있는 그것이 아니고, 부단히 유동 발전하는 복잡한 관련 속에 있는 그것을 그린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광부나 매음부는 어째서 그러한 광부와 매음부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또 그들의 생활은 어떻게 필연적으로 발전되는가. 또 그들은 사회적 환경과 어떠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가를 그린다. 그래서 그것의 피면(皮面)만 그리지 않고 본질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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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새 리얼리즘 창작방법의 ABC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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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가 또 한가지 더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새 리얼리즘은 모든 개개의 사물을 유물변증법적 시안으로 그릴 뿐 아니라, 그것을 그리려고 파악하는 그것도 유물변증법적 시안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묘사하는 것 뿐 아니라 테마하는 것도 (제재를 선택하는 것도) ─ 소설, 희곡하는 것도 더 광범하게 말하면 문학하는 것, 즉 문학적 행위의 출발, 그것도 유물변증법적 시안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이것은 사실 실천을 하면서 의식 못하는 수도 있는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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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어떤 창작가가 침묵을 가지고 가만있지 않고, 또 허다한 다른 류의 일을 하지 않고, 소설, 희곡 등을 쓰는 것부터 여러 가지 변증법적(유물론이야 말할 것도 없고) 관련을 가지고 있는 의식적 행동이 아닌가. 또 가정해서 A란 제재를 취했다면 삼라만상의 사물 가운데 A를 제재로 취한 그것도 변증법 관련을 가지고 있는 의식적 행동이 아닌가. 이 사회의 인생 생활에는 별별 만천(萬千) 가지가 있다. 결코 계급의 ××[투쟁]생활 뿐 아니라 청춘남녀의 음탕한 연애생활도 있고, 초부가 산에 갔다 대호(大虎)에게 조난하는 일도 있고, 가로에 소변을 갈기다가 벌금내는 사건도 있고, 실연 끝에 광부(狂夫)되어 광견병으로 가는 이도 있고, 삼대독자를 잃고 청상과부가 대성통곡하는 일도 있다. 또 그러한 인생생활 외에 허다한 동물의 별별 생활도 있고, 자연계의 천만가지 현상도 있다. 늙은 소가 헐떡이며 밭을 갈고, 검은 개가 달을 보고 짓는다. 물 속에서 고기가 헤엄을 치며 논다. 버드나무가 바람에 불려 흔들거리고, 폭포수가 쿵쿵 떨어진다. 이러한 삼라만상의 사물 가운데서 새 리얼리즘은 어느 것을 취재해 쓰든지 유물변증법적 세계관을 쓸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사물을 묘사하기 전, 즉 어떠한 제재를 유물변증법으로 쓰기 전에 벌써 그러한 삼라만상의 사물 가운데서 유물변증법적으로 제재를 취한다. 새 리얼리스트는 취재의 시야를 얼마든지 자유롭게, 얼마든지 광범하게 돌릴 수 있다. 그것에 구속을 준다면 문학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러나 또 쟌느(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의 주인공)의 생활같은 것이나, 견우직녀(백철군의 수필로 쓴 것)나 소변누고 벌금낸 것 같은 것을 무비판적으로 끌어서 제재로 삼지 않는다(이 비판적 태도는 역시 변증법으로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달라질 것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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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새 리얼리스트는 많은 의식적 비난하기 좋아하는 문학가들과 사이비 리얼리스트 등의 “우주의 모든 현상, 인생의 모든 생활이다. 문학의 제재가 되는 이상 그대들은 청춘남녀의 음탕한 연애장면도 청등녹주(靑燈綠酒)의 카페 내면도 다같이 써야 하지 않나. 그것도 리얼리스틱으로 쓰면 그뿐 아니냐”고 하는 흔히 하여주는 충고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일언(一言)으로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리얼리스트는 제재를 선택함에도 유물변증법적으로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고(질문하는 그들 퇴폐한 문학가들은 리얼리즘을 구실로, 즉 어떠한 곳에서든지 체험적(體驗的)으로 제재를 찾아야 한다는 구실로, 그들이 하고 싶은 퇴폐적 생활을 자랑삼아 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소극적 사실이 아니면 아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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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학가가 흔히 문학의 다양성을 부르짖는다. 새 리얼리스트도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전자는 무비판적, 후자는 비판적인데서 같은 ‘다양성’의 용어도 확연한 구별을 가지고 있는 그것이 될 것이다. 형식에 있어서는 내용보다 훨씬 더 풍부한 다양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형용이 내용으로 규정되는 이상, 그 다양성도 역시 결국은 비판적인 엄밀한 의미로 제한받는 그것이 아니될 수 없다. 또 옛 문학가들이 내용에 대해서나 형식에 대해서나 ‘묵었다’ , ‘새롭다’ 는 평가는 참으로 막연하지 않는가. 묵은 것이 왜 나쁘며, 새로운 것이 왜 좋은가. 3년 전에 지은 연와가(煉瓦家)보다 금년에 지은 초가가 더 좋게 평가될 수 있을까. 모든 사물은 일정 불변적으로 절대 독립적으로 보는 그들은 그것을 결코 과학적 설명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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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새 리얼리스트가 왜 내용에 있어서나 형식에 있어서나 묵은 것보다 새로운 것을 높게 평가하는가(묵은 것이라면 과거의 사건 ─ 역사적 제재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모든 사물은 변전 유동하는 관련 속에 있는 그것으로 보는 때문이다. 즉 묵은 것은 발전치 않고 침체한 것인 때문에. 묵은 것도 새로운 것보다 높게 평가하는 경우도 있는 것은 모든 사물이 다른 모든 사물과 관련을 가지고 있는 이상 때로는 묵은 것이 새로운 것보다 좋을 수도 있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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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에도 계급성이 있다. 숫자에도 계급성이 있다. 뉴스에도 계급성이 있다. 수소와 질소가 합하여 물이 되고, 혈액이 동맥으로부터 폐에 들어가서 정맥으로 나오는 자연원칙을 탐색하는 자연과학에 어찌 계급성이 있을까. 1, 2, 3, 4의 숫자 나열에 어찌 계급성이 있을까. 자연과학 그것만, 숫자 그것만, 뉴스 그것만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이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변증법적으로 볼 때, 자연과학 숫자 및 뉴스를 인간생활과의 변증법적 관계를 승인 할 때에 그것들의 계급성을 시인할 수 있는 것이다(다만 그렇다고 사물에 대한 진리는 대립한 양계급에 상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계급에 대한 상대성은 이롭고 해롭고 선하고 악한 가치에 대한 그것뿐이다. 그리고 진리 자체 그것이 시간적으로 발전하는 그것뿐이다). 그러므로 유물 변증법자는 모든 대상 현실 감성을 다만 객관의 또는 직관의 형식으로서 파악하지 않고, 감성적, 인간적 활동 실천으로써 파악하며, 주관적으로 파악한다. 그렇지 못한 것이 소박적 구(舊) 유물론의 주요 결함이라고 포이에르 바하에 대한 맑스의 테제는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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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또 모든 문학가가 천편일률적으로 적극성 가진 제재(적극성 그것도 결코 영구 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공간 시간을 따라 변하지마는) 몇 가지에만 집착하는 것, 또한 작가가 적극성 가진 제재 몇 가지만을 되풀이할 줄 모르는 그것도 역시 새 리얼리스트의 태도가 아니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무한히 복잡하고 또 끊임없이 운동하는 이 사회현상을 추상적으로 또 이상주의적 ─ 관념적으로 머리 가운데서 창조하는 것이다. 조선의 프로작가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또 언제든지 ‘맹×’‘×의’밖에 쓸 줄 모르는 것, 또 그것도 ‘×리’의 그것밖에 쓸 줄 모르는 것, 또 중요한 주인공을 우상화시켜 천편일률적으로 동일한 타입인 것은 모두 그러한 오류의 표현이다. 또 폭로문학의 정체는 어떠한 것인가. 폭로하는 그것이 반동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의 정체는 폭로 만능주의를 부인하는 공격, 따라서 결국은 타협적 공격임에 불과한데 있다. 조선에는 창작에 있어서는 아직 이러한 것을 많이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이전 백철의 《신조(新潮)》같은 월간 잡지 몇 페이지 읽고 다량적으로 써낸 폭로논문은 그러한 부류에 속한 것이다(군의 최근의 것은 폭로문학이라기보다 모두 야유문학이다. 그의 최근 경향에 대하여는 다시 문제삼을 필요가 없을 줄 안다). 그러한 부류와 같은 일체의 ‘사이비’의 본질 정체는 변증법적 혜안이 아니면, 착각에 어지러워 정당하게 인식하기가 곤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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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떠한 사물을 전체가 아닌 일부분만 고집해 가지고 본체에 영원히 눈을 감거나, 혹은 본체와는 정반대인 다른 사물로 오인하는 이를 경애하는 우리 비평가들에게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과실은 길다란 소설, 희곡보다 짧은 시에 대하여 범하는 이가 더 많은 것은 오히려 이상하다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한 예가 한 둘이 아니니 매거할 수 없지마는 미전(邇前) 박승극의 시평을 가장 가까운 예로 들 수 있다. 군은 「책을 살면서」란 시에 대한 평을 하면서 그 시의 3절중 1, 2절을 열거해 놓고 비판적 요소가 부족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판적 요소가 집중해 있는 제2절을 제껴둔 것은 결코 악의로서 눈을 돌린 것이 아니겠지마는 전체를 보지 못한 과오라 아니할 수 없다. 전체 아닌 일부분만 보다가 정반대의 사물로 오인하는 간단한 비유로 들려 한다. 가령 A의 이론이 옳다고 하지 않는다 하는 말에 하부의 부정적 연구를 추출하면 긍적적 말이 되지 않나. 이러한 호리지차(毫里之差)가 천리지류(千里之謬)를 내는 실례가 얼마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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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애하는 우리 비평가들의 논문을 읽다가 전체를 못 보는 오류의 실례를 보면 곧 다음과 같은 옛 이야기를 생각 아니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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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장님이 코끼리 한 마리를 두고 이리 저리 만져 보는데 한 장님은 허리통을 만져보고 “응 이 짐승은 바람벽 같구나”하니, 다른 한 장님을 다리를 만져보고 “응 이 짐승은 기둥같구나.”하니, 또 다른 한 장님은 코를 만져보고 “응 이 짐승은 구렁이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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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사물의 전체를 부분만 보고 범하는 과오를 말한 것이지마는 또 그와 정반대의 과오, 즉 부분적으로 취급된 사물에 대하여 전체적 묘사를 강요하는 과오도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면 어떤 층에 속해 있는 어떤 개인을 그릴 때에 그 층이 하고 있는, 또 할 수 있는 모든 생활을 빠짐없이 묘사해야 된다는 이론이다. 이 역(亦) 과불급(過不及)이 중용이 아니란 것과 마찬가지로, 비변증법적 과오인 점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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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또 변증법적 시안으로 비판하지 않으며 안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즉 선인의 유산에 대한 태도이다. 도대체 괴테나 세익스피어의 위대한 점이 어디 있나. 수백년 후의 우리가 오히려 배울만한 그들의 장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이 속하고 있는 그 계급 그 시대의 사상을 풍부하게 소유한 것, 그것을 명확하게 연숙(鍊熟)하게 표현한 것 그것뿐이다. 우리가 여기에 대하여 주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그들이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명확하게는 표현하였지만 그들의 살던 사회를 정당하게 정확하게 인식 또 표현하지 못한 것이다. 정당한 인식은 나어린 변증법 입문자가 그들보다 오히려 우월할 것이다. 그래서 뚜르게네프가 그 시대의 진리를 표현했다는 백철의 말은 선인을 영웅화, 우상화하는 말이 아니면 아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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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들께 배우려는 점은 정당한 사회인식이 아니고, 난숙한 표현기술 그것이다(여기에서 형식주의자는 고성대호(高聲大呼)로 부르짖을 줄 모른다. “보라! 예술가의 생명은 기술에 있지 않은가. 따라서 예술의 생명은 내용에 있지 않고, 오로지 형식에 있지 않은가”하고. 그렇지만 그것으로 형식주의의 승리를 부르짖어서는 안된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 ─ 과거의 위대한 예술가들의 가진 연숙(鍊熟)한 기술은 그들의 가진 풍부한 사상의 구상화에 불과하고, 위대한 작품들의 현란(絢爛)한 형식은 그 작품 내용에 규정된 표현방식에 불과하니까). 그러면 우리가 그들로부터 계승할 유산이 무엇인가는 잘 알 수 있다. 또 그러한 유산을 부잣집 장자가 동산이나 부동산을 상속받은 것처럼, 화족(華族)의 장자가 백작이나 남작을 습층(襲層)받는 것처럼 계승할 수 있는 줄로 아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만일 참으로 그렇다면 한없이 많은 후배들이 얼마나 행복할까. 묵은 이데올로기의 묵은 표현 기술을 섭취하려면 비상히 엄격한 유물 변증법적 시안이 아니면 안된다. 그것을 새 종자가 묵은 종자의 썩은 물체로부터 화학적 비료 영양을 섭취하는 것 같이 선인의 유산을 계승한다고 하여 피아노 곡조의 노래를 가야금으로 타는 것 같은 내용과 형식이 모순된 작품을 얼마나 많이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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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법에 있어서 유물 변증법적 방법이란 슬로건으로부터 소시알리스틱 리얼리즘으로 비약되었다는 것은 아마 너무 광범한 비구상적인 슬로건을 예술적 창작에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고, 결코 유물변증법이 창작방법에 있어서 제외되어 좋다는 것을 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나라에서든지 무비판적으로 적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유물변증법은 언제든지 창작의 철학적 기초가 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에 대두하는 예술적 천재주의, 예술가치 이원론 경향은 그 시안의 결여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아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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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제2호, 1933. 12)
【원문】사실주의적 창작 메쏘데의 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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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