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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은 개혁될 것이 아니라 순화될 성질의 것이라고 전제할 때 서정과 대립되는 주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일반적인 문제로 대두되어 왔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방법은 따로 있지 않고 앞에 둔 전체 중에서 이미 해결된 것으로써 나는 간주하고 싶다. 왜냐면 서정의 순화엔 서정의 개혁을 일삼는 때보다도 더 가혹한 주지적 반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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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서정의 순화는 가장 주지적인 방법의 결과여야만 한다는 것인즉, 이는 전통을 다루어 보는 우리들의 기본자세와 무엇이 다를까. 그런대도 우리에겐 극복하지 못한 몇가지 과제들이 남아 있으니 우선 간략하나마 그의 두 가지 면만 뜯어 말해 보기로 하자. 처음으로 생각할 것은 시를 방법화하는 언어작용에 대한 각자의 태도다. 언어란 원래 기능상에 있어 구상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으로 나뉜 뒤 이것들은 서로 상극 대립하는 것처럼 인상되어 왔다. 그러나 시작 자체가 단어문을 포함하여서까지 또렷한 구문 성립을 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들은 움직이는 언어와 앉은뱅이 언어와를 충분히 가리어 말할 수 있지 않는가. 품사적 형태를 떠난 수사적 활용을 구명해 보는 것이 시인들의 당면지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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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언어의 전야에 걸쳐 상상과 비유 그리고 역설과 의미니 하는 온갖 기술적 효과의 기능성 마저도 얼마든지 시인해 두자. 마침내 언어의 양이 언어의 질로서 제고되며 지양될 때에 그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의 전부는 비로소 그들의 한계를 탐락하고야 말 것이다. 더군다나 언어의 세계주의를 제창하는 파운드류의 시론이야말로 우리에게 있어 매몰된 고전어와 아울러 부지중의 각종 현대어에 대한 새로운 음미와 검토를 일층 고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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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어디까지나 언어의 마력을 시 자체에로 의처시킬 뿐이지 어떠한 시파의 특징적 시위를 조장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도 서정의 순화는 이러한 언어작용의 광범한 고려와 연금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므로 여기엔 시인들의 비상한 노력이 경주되어야만 할 것이다. 둘째로 생각할 것은 시인의 존재방식, 즉 시에 나타난 의미로서의 본질을 살피는 데에 있다. 간혹 서정이 변혁되어 서정 아닌 것으로 전화한다든지 서정의 본질은 무한한 것이라든지 부분적인 과민증이 떠도는데 이것들은 여간 위태롭지 않은 일이며 대개가 주지의 외면만을 핥고 있을 적에 연발되는 오류라고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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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C.C. 루이쓰가 서정의 본질을 「사랑과 죽음」으로 매겨버린 것은 비교적 장구한 시사에서 확인된 그의 견고한 결론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릴케나 바레리의 형이상학적 모색이 또한 이 두 가지를 영접하려는 실존의 보다 주지적 방법이었으므로 하여 서정이 철학하는 행위로써 밑바침 된다는 것도 실상 거짓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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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서정은 철학함으로써 그의 순화를 돕고 모든 사고성의 근원을 다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만 세기를 거듭할수록 서정은 거의 농도를 더할 뿐이며 주지의 한계가 그만큼 드러났을 때 ― 주지란 끝끝내 합리적인 경험인데 ― 사뭇 인간은 서정의 원군을 손짓하지 않을 수 없다. 서정은 돌아갈 피안처럼 언제나 눈물에 흐려졌다. 「로고스」가 홀로 「파토스」를 견제하지 못하였음은 비단 희랍만의 비애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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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은 시인의 존재함(Sein)을 증거하기 위한 오직 저류로서 동시에 칠칠한 침윤의 반향인 까닭으로 그의 명확한 실재를 방불케 하고 있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죄다 거짓이다”는 스페인의 역설가도 있었던 것이다. 이제 사랑과 죽음으로 얽혀진 서정의 과거를 더듬어 보고 다시 불러 보는 것이 바로 오늘을 벗어나려는 우리들의 막다른 처신이라 할진대 「해볼」 「헤렌」의 범우주적인 원류를 형상하듯 순화된 서정은 꼭 우리들 앞에 예기치 못한 새로운 고향(Heimat)의 위치를 거듭 밝혀 줄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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