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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지왕(炤知王)과 벽화(碧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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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김동인
1
소지왕(炤知王)과 벽화(碧花)
 
 
2
신라 소지왕(炤知王)이 즉위 22년 9월에 내이군(捺已郡)이라는 곳으로 행차 합신 일이 계시었다.
 
3
그 고을에 파로(波路)라는 사람이 있어 수놓은 비단옷을 몸에 감고 왕께 나아와 절하며
 
4
"이 고을에 행차하옵신 마립간(麻立干 - 왕이란 말)께 무엇을 바치올까 생각 다 못하와 소신의 정성껏 이것을 바치오니 물리치지 마옵소서."
 
5
하며 빛나는 색비단으로 동인 수레 하나를 왕의 앞에 가져다 놓는다.
 
6
왕께서는 그것을 반겨 받으시었다. 조금 뒤에 왕은 그것이 잡수실 음식인가 하시고 열어본 즉 뜻밖에 어여쁜 소녀가 그 속에 들어 있었다. 그 소녀는 파로의 딸 벽화(碧花)로서 때에 나이 열여섯이었다. 왕은 깜짝 놀라시며 또 이상히 여기시어 받지아니 하셨다.
 
7
그러나 환궁하신 뒤 그 꽃같은 벽화를 잊으실 수가 없었다.
 
8
나뭇잎에 서리 물들고 기러기 울어대는 가을철이라 더욱 그 어여쁜 소녀가 그리우셨다. 마침내 왕은 내이군으로 미행을 하시고야 마시었다.
 
9
이렇게 벽화의 집으로 미행하시는 일도 벌써 몇 번이 지난 뒤 ―.
 
10
어느 날 왕은 또 그 벽화를 찾아 가시는 길에 고타군(古陀郡)이라는 고을을 거치시다가 저물어 한 늙은 할미의 집에 유숙하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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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그물거리는 등잔불 앞에서 미복하신 왕과 주인 할미와는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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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지금 모든 백성들이 우리 마립간을 어떻게들 말하는지 혹 할미는 들으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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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모두들 성군이라 하옵지오. 하지만 소신 혼자만은 그 말을 의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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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놀라시며 할미의 대답을 자세히 들으려고 무릎을 밀며 귀를 기울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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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게 아니라, 우리 마립간께서 저 내이군에 있는 벽화라는 소녀를 고이시어 자주 미복으로 다니신대요. 대개 용이 고기의 옷을 입으면 고기잡이에게 잡히기가 쉽지 않아요? 이제 마립간께서 높으신 자리에 앉으시어 스스로 그 몸을 삼가시지 못하니 그를 성인이라 하면 세상에 어느 뉘가 성인이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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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을 들으신 왕은 못내 부끄러우시었으나 무슨 말씀은 다시 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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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 가만히 벽화를 불러 올리시어 후궁에도 별실에 따로 두시고 종내 버리지 못하셨다.
 
18
그러나 인간사 뜻대로 안 되는 것이라, 소지왕은 벽화의 몸에 한 아드님을 가지신 뿐만, 난 지 간신히 석 달 뒤 동짓달에 승하하셨다.
【원문】소지왕(炤知王)과 벽화(碧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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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인(金東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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