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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 정홍순(鄭弘淳)의 규칙적(規則的)으로 찬찬하고 경위는 호리를 다투면서 나라를 위하던 사람이니 이러기도 가위 오백 년 단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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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모두 갓을 쓰므로 비만 오면 당장 결딴이 나서 쓸 수 없으매 출입 하는 사람이 갓모는 반드시 준비하고 다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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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말이 그렇지 젊은이로 개인 날 갓모를 가지고 다니기도 저마다 못 하는데 홍순은 젊은 때에도 갓모 두 개씩 가지고 다녔다. 이는 하나는 자기가 쓰고 또 하나는 혹 다른 사람이 갓모가 없어서 낭패를 당할 적에 주려는 뜻이니 이같이 주밀하게 남을 위하는 마음이야 드문 행동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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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과거를 못했을 그 어느날 영묘조(英廟朝)께서 동구릉(東九陵)으로 거둥을 하시니깐 장안 남녀노소 다 나가 구경하는데 순홍은 동대문 밖까지나 가서 환궁하시는 것까지 다 보고 막 돌쳐서 자기 집으로 향하는데 비가 별안간 쏟아졌다. 옆에 어떤 젊은 친구가 갓모가 없어서 어쩔 줄을 몰라하므로 순홍은 얼른 예비하였던 갓모를 주고 같이 회동(會洞) 병문에 이르러 갓모를 도로 달라하니깐 그 사람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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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아직 개지 않았으니 내일 댁으로 갖다 드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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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순홍은 자기 집이 회동 제 몇째 집이라고 자세히 가르치고도 미심하여 그 사람의 주소가 남대문 밖 어느 동네임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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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튿날 암만 기다려야 아니 가져오므로 그는 하인을 보내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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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20년이 지나서 그가 호조판서로 있을 적에 어느 좌랑(佐郞)이 신임(新任) 인사로 와 뵈는데 즉 20년 전 그 사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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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아무 때 이러이러하던 사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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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으니 과연 그렇다 한다. 순홍은 나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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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갓모 하나에도 무신함을 알지니 어찌 벼슬을 다니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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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그 사람이 늙게 호조좌랑(戶曹佐郞)도 못 다니고 곯아 떨어졌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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