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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에 사는 한국 이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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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12
박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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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사는 한국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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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의 생활과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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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30, 40년 전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이 치열의 고도에 달하였을 때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제물포와 부산항을 떠나 태평양 저편을 향해 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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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들의 대부분은 빈곤한 농민들이었으나 그 중에는 일상의 생계에는 풍유한 소작인도 있었고 또한 일제의 발호에 항거한 끝에 하는 수 없이 그리운 조국 강산을 등지고 망명의 길을 낯선 나라로 택한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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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들은 이들을 미국으로 간 이민이라고 부른다. 미국뿐만 아니라 멕시코, 브라질로 간 사람들도 있으나 여하튼 그들은 대지(大志)를 품고 거센 파도를 거쳐 새로운 세계로 향해 갔었다. 마치 메이플라워호에 몸을 맡긴 영국의 청교도와도 같이 박해와 굶주림에 시달리며 더한 고초가 기다릴지도 모르고 혹시나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땅을 찾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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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의 중심에 자리 잡은 하와이섬에 많은 사람은 내렸다. 그들은 미개발의 땅을 갈고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이 섬을 개척한 끝에 지금에 와서는 그곳으로 하여금 지상낙원이라는 이름을 듣게 하였는데…… 그리고 수천 명에 달하는 한국 사람들이 지금도 제일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필자가 찾아간 곳은 하와이가 아니라 미국 본토 오리건주의 한국 이민의 일 촌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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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며칠간이 되지 않는 짧은 기간에 더욱 일촌락의 세 세대만 보고 미국에 있어서의 한국 이민에 관해 글을 쓴다면 지극히 편견적일지 몰라도 나는 그들의 생활과 의견을 솔직히 보도함으로써 아마 그것이 전체를 축소한 하나의 진실한 모습이 아닐까 하고 감히 붓을 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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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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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건주 최대의 도시 포틀랜드는 태평양에서 콜롬비아강을 따라 150마일을 올라가야 한다. 태평양 연안에서는 굴지의 도시로 알려진 포틀랜드는 농업과 상업의 도시로서 춘하추동 일기가 청명하고 교통도 무척 발달된 인구 50만의 조용한 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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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곳에 이르자마자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바로 그때 문을 열고 25, 26세쯤 되어 보이는 동양 여성이 들어온다. 그리하여 유심히 나의 눈은 그 여성에게로 쏠리고 그도 역시 나를 쳐다보는 것이다. 직감적으로 나는 그가 한국 사람이 아니라면 일본인으로 알고 곧 말을 걸었다. 잠시 후 우리들은 참으로 공통적인 화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한국과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관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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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 이민의 제2세이다. 그림과 얘기로밖엔 한국을 알지 못하면서도 한국을 제2의 자기 고향으로 그리워하는 메이 박이라는 여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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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커피를 나누고 나서 우리들은 그 식당을 나와 메이 박의 자동차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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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함께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한다. 그리하여 나는 그것은 참으로 좋은 제안이며 오래도록 내가 보고 싶고 알고 싶던 일의 하나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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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형의 시보레는 45마일의 속도로 포틀랜드의 거리를 빠져나왔다. 자동차의 핸들을 잡은 그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 찼고 휘파람을 불며 가끔 나를 쳐다본다. 그래서 나도 웃음을 띨 수밖에 없었다. 지난 4월 5일의 포틀랜드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곱게 개고 수목과 정원의 잔디는 눈부실 듯이 푸르다. 포틀랜드에서 20마일 떨어져 있는 그레셤까지의 연도에는 연이어 집이 있고 어느 한 극장에서는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파라마운트사 영화 「도고리의 다리」라는 것을 상연하고 있는데 그는 차를 멈추더니 어제 저 영화를 온 가족들이 다 함께 구경했고 집에 와서는 한국 레코드를 틀었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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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오리엔탈 부락이라는 곳을 지나고 한 5분 만에 그의 집 현관 앞에 이르렀다. 이 마을을 오리엔탈 부락이라고 한 것은 그곳 부락의 개발은 전부 동양인들의 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고 현재도 중국인 일본인들의 몇 세대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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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만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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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시간은 오후 두 시였다. 멀리 마운틴 후드라는 유명한 산이 보인다. 그 산 봉우리에는 흰 눈이 내려 쌓이고 백열과 같은 태양을 반사하는 그 모습은 참으로 절경이라고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이 산은 미국에서 가장 알려져 있는 것의 하나이며 우리 한국 이민의 세 세대는 그러한 좋은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즐거운 곳에 영주의 집과 농장을 거느리고 있다. 메이 박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작고한 박용현 씨의 둘째딸이다. 그는 박용현 씨의 미망인 즉 ─ 그의 어머니 ─ 멜슨 박 여사를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 부인은 나의 손을 힘 있게 쥐더니 즉시로 눈물이 글썽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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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잘 오셨습니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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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면서도 정확한 우리말로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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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현 씨의 부처는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에 한국을 떠났다는 것이다. 일본 놈에게 쫓겨 망명의 길을 미국으로 택하고 처음 이른 고장은 이 오리건주의 서북쪽 몬태나주이며 그곳에서 19년간 갖은 노동과 고초를 겪고 겨우 얼마 안 되는 자금을 만들어가지고 오리건으로 이주한 것은 13년째가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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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는 그가 생존하는 동안 한시도 한국을 잊은 적이 없으며 열렬한 동지회 회원이었던 그는 조국 광복을 이룩하기 위해 가난한 생계에서도 푼푼이 돈을 모아 혁명운동에 거출했다는 것이다. 부인은 죽은 남편을 위해…… 그를 나에게 잘 인식시키기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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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장석윤 씨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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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나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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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구 말구요…… 내무부장관을 지낸 후 지금은 국회의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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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내가 대답했더니 단번에 눈물을 씻으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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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 장석윤 씨와 함께 몬태나에 살았으며 그는 용현 씨의 가까운 친구요 동지였다는 것이다. 장씨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미군 지원병으로 떠나고 그 후 전혀 소식을 몰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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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씨 부인의 안내로 응접실 겸 침실로 들어갔다. 집은 그리 크지 않은 목조이며 시가 6,000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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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고 그 옆에는 이 대통령으로부터 죽은 박씨에게 보낸 감사장.……‘대한민국의 건국을 위하여 귀하는 많은 노고와 자금을 거출한 데 대해서 참으로 감사하다’는 요지의 글을 적은 것을 나란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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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과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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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미국에서 최하 중류의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식생활에는 조금도 걱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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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은 스트로베리(딸기)를 전문으로 하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25에이커의 농장을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한 5에이커의 땅을 더 구입할 작정이라고 한다. 이곳의 토지매매 시세는 한 에이커당 500달러라고 하니 소유하고 있는 토지만 해도 1만 3000불에 가깝다. 부인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 세수도 하지 않고 트랙터를 몰고 농장에 나간다(집은 농장 가운데 있다). 해가 뜰 때까지 부지런히 밭을 갈고 그 후에 식사를 끝마치면 역시 밭에 나가 씨도 뿌리고 김도 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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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열두 달 하루도 ……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것만이 이 부인의 전부이며 또한 이렇게 일하는 것은 한국과 자식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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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에게는 딸 넷하고 지금 17세가 되는 아들이 하나 있다. 딸들은 모두 하이스쿨과 칼리지(대학)를 마쳤으며 아들은 지금 하이스쿨에 다니고 있다. 부인은 30여 년의 미국 생활을 보내도 한국 말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으나 2세들은 어머니, 아버지…… 이러한 몇 마디의 한국 말을 알 뿐 그 외는 전혀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메이 박과 그의 언니(이름을 잊었다)는 우리말을 거의 전부 알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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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자식들이 훌륭하게 되어 한국에 나가서 나라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자기의 제일 큰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들은 한국에 대해 그리 큰 애착심을 갖고 있는 것 같지는 않으며 역시 세계서 제일 좋아하고 사랑하는 고장은 미국이라고 나에게 솔직하게 말하였다. 메이 박은 나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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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한국 땅에 돌아가서 죽겠다고 하셨고 어머니는 언제나 우리들이 한국에 갈 수 있느냐고 하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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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 부인의 분에 넘치는 접대를 받고 해가 질 무렵 나는 그곳을 떠나야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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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한국에 돌아가면 장석윤 씨한테 자기 남편이 작고한 소식을 전해 달라고 나에게 부탁을 하고 죽기 전에 꼭 한국에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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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좀 더 편해지고 살기 좋아진다면 될 수 있는 한 나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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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필자가 마지막으로 말하자 부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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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만이 나의 꿈이며 애들도 전부 데리고 나갈 작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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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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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어두워지고 내가 탄 시보레는 포틀랜드에 들어왔다. 나는 메이 박과 그의 남동생을 데리고 어느 카페로 들어가 그들에게는 맥주를 사주고 나는 위스키를 마셨다. 모두 아메리카의 여자들처럼 담배를 피우는 메이는 역시 미국 여성임이 틀림없는 것이 5센트짜리를 뮤직박스에 집어넣고 「파파 러브스 맘보」라는 음악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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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코리아에 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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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돈 많은 좋은 남자와 결혼하기 전에는 힘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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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라도 한번 와보시지, 좋은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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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비만 해도 몇천 달러가 될 텐데 어떻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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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할 말이 없어서 그곳을 일어나야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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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195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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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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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리랑(잡지) [출처]
 
  1955년 [발표]
 
  수필(隨筆)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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