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한글 
◈ 투환금은(偸煥金銀) ◈
카탈로그   본문  
미상
윤백남
1
투환금은(偸煥金銀)
 
 
2
연산갑자사화(燕山甲子士禍)에 간신의 이름을 받고 죽은 한치형(韓致亨)의 문인으로 있던 조성산(趙誠山)은 처자의 권에 못 이겨 길을 떠났다.
 
3
오백여리 먼 길을 노자 겨우 열아문 냥을 지니고 길을 떠난 조성산은 과객질을 하며 가기로 방침을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그러나 그보다도 더 그의 가슴을 무지근하게 한 것은 처자가 굶주리는 참경을 차마 볼 수 없어 행여나 하고 길을 떠나기는 하였지마는 관서 백한감사(關西伯韓監司)의 심지를 잘 아는지라 과연 얼마의 전곡을 얻어 올 수 있을가, 그것에 대한 자신이 도무지 없는 일이었다.
 
5
『세상에 그런 인사가 어디 있겠소 아무리 인색하고 무정하다 할지라도 배은망덕도 분수가 있지, 설마하니 오백여리를 걸어간 노인을 그냥 돌려 보낼 리야 있소, 벼락을 맞을 일이지.』
 
6
하고 이웃 사람들도 처자와 함께 권하는 것이었다.
 
7
누구나 지나간 일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한치형은 단독자 하나 뿐으로 슬하에 자식이 귀하더니 급기 사화를 당하여 죽을 때에는 그 외아들조차 아직 강보에 싸여 있는 고단한 신세이었다.
 
8
게다가 더욱 비참한 것은 간신으로 몰리어 죽는 신세이라 재산은 몰수를 당하고 삼족이 다 함께 죽을 운명에 있었으니 방가위 멸문의 재앙을 당하는 터이라, 그 집의 은덕을 직접 간접으로 입은 문인들도 사방으로 헤어지고 일가 친척도 화에 걸릴가 두려워하여 누구 하나 돌보려는 사람이 없었다.
 
9
그러한 정경을 본 조성산은 세상 인심이 야박한 것을 한탄하고 격분하였다. 그래서 밤중에 남 몰래 강보에 싸인 한씨의 고아를 업어다가 자기집에 감추고 유모까지 얻어서 길렀다.
 
10
다소라도 은의를 입은 한씨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혈통을 이어 주려는 것이었다.
 
11
만일에 한씨의 고아를 숨겨 기르는 사실이 탈로되면 조성산은 한씨와 동죄로 몰릴 것은 정한 이치이었다.
 
12
그러므로 이 비밀을 아는 막역 친구들은 자기네끼리 모이면
 
13
『참 갸륵한 일이지 후분(後分)에 복을 받으리.』
 
14
하고 칭송을 마지 않았다.
 
15
당시 조성산은 남부럽지 않게 사는 터이라, 자기 자식과 다름이 없다느니 보다 한층 더 한 고아를 애지중지하고 갖은 호강을 다 시켜가며 길러왔다.
 
16
글도 특히 독선생을 앉히고 돌아간 그의 아버지 한치형의 거륵한 인격을 이야기해 들리어 은근히 그의 성격에 좋은 영향이 끼치도록 하고 겸하여 적개심을 고취하여 발분케도 하였다.
 
17
이래저래 장가들 나이가 되매 조성산은 우선 관례를 시키고 그 사정을 아는 어느 상당한 집과 통혼하여 장가까지 드렸다. 그리고 집을 사고 세간 배치까지하며 한 집안을 이루게 해주었다.
 
18
어렸을 때는 그런 줄 몰랐다가 차차 장성함을 따라 성정이 괴악하고 심지가 착하지 못한 것이 들어나매 이웃 사람들은,
 
19
『조씨가 그러다가 기른 개에게 정강이 물리는 꼴을 당할 것을.』
 
20
하고 애처러이 생각도 하고 또 직접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도 조성산은,
 
21
『내가 무슨 덕을 보려구 했겠소. 내가 할도리만 했으면 고만이지.』
 
22
하고 들은체 하지 않았다.
 
23
어언 이렇게 지내기를 십수년 하매 별로 생재할 길이 없는 조성산의 살림은 나날이 줄어들어 가지마는 조는 한고아의 살림범백을 전부 맡아 해주었다.
 
24
한고아가 과거에 급제하여 종관(從官)이 되어 가는 때에도 제반 치행을 조씨가 도맡아 해주었다.
 
25
이러므로 조씨의 형세는 극도로 영락하여 이제는 다솔식구에 그날 그날을 지내기가 곤난하게 되었다.
 
26
이때는 이미 가세가 풍유해 진 한가이건마는 은덕을 입은 조씨의 궁핍한 형세를 모르는체 하고 돌아보지 않았다.
 
27
조씨 역시 조석을 제때에 먹지 못하는 형편에 있으면서도 한가의 심지를 아는지라 속으로 괘씸히 여길뿐으로 한톨의 쌀도 바라지 아니 하여 왔다.
 
28
그랬더니 이제 한고아가 평양감사로 영전되어 가서 있고 가세는 점점 극도로 궁핍하고 하니 자연히 생각나는 것이 한고아의 일인데다가 이웃사람들도,
 
29
『설마하니 오백여리 간 사람을 모르체야 하겠소.』
 
30
해서 조씨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었다.
 
31
이리하여 조씨는 노경에 먼 길을 떠나게된 것이었다.
 
 
32
길을 떠난지 십여일만에 조성산은 평양부중에 이르렀다. 도착한 것이 저녁 때라 조성산은 낭택을 거꾸로 하여 보행 객주집에서 하루를 자고 이튿날 감영에 이르렀더니 문금(門禁)이 엄엄하여
 
33
『무어 어째 감히 삿도께 뵙겠다구, 이 사람아, 기의 행색을 좀 보아야지.』
 
34
하며 관속들은 조씨의 초라하고 남루한 의표를 보고 발 한걸음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35
조씨는 그들 관속과 다투기에는 너무나 착하였다.
 
36
그는 감영 부근을 방황하는 수 밖에 없었다. 분함과 슬픔이 가슴에 치밀어 부지불각에 눈물이 옷을 적시는지라, 그의 걸음걸인들 어찌 평탄할 리 있으랴 행보가 차상하고 얼굴이 비감에 싸인지라 때마침 지나가던 감영 서리 하나이,
 
37
『웬 노인이온대 그다지 비감해 허슈.』
 
38
하고 물어준다. 조씨는 대략 이야기를 하매
 
39
『그럼 이 장담을 뒤로 돌아가면 일각 뒷문이 있으니 그리로 들어가서 앞 뜰로 돌아가면 거기가 바로 삿도가 거처하시는 데입니다.』
 
40
하고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41
조씨는 그리로 들어가는 것이 떳떳한 행동이 아닌 것은 알지마는 지금 형편에 예의를 돌볼 수 없어서 그 뒷문으로 몰래 들어가서 앞뜰로 돌아가니 과연 한감사가 장죽을 물고 댓돌 위를 거니던 중이라 조씨가 반가움을 이기지 못하여
 
42
『대감.』
 
43
하고 부르는 소리에 이편을 바라보고
 
44
『아 이게 누구요, 조시어가 아니요.』
 
45
조씨는 전일에 한치형의 덕으로 시어 초사를 얻어 하였던 것이다.
 
46
『그런데 별안간 아무 소식도 없이 어찌하여 날 찾으셨소.』
 
47
조씨는 냉낙한 감사의 말에 비감이 먼저 솟아 오르는 것을 간신이 억제하고 대총대총 자기의 형편을 이야기했더니 한감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48
『낫살이나 자신 시어가 어찌 그리 생각이 없소. 감영 영문에 그대같이 남누한 외표로 날 찾았다니 그게 무슨 지각 없는 일요. 그래서야 나의 존엄이 어디 있겠소 이 길로 나가서 수청방에서 기다리슈.』
 
49
하고 돈에 대한 대답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50
조씨는 얼굴에 불을 담아 부은 듯이 부끄러웠다. 더구나 막객(幕客) 수삼인이 역시 대상에서 내려다 보는 이 자리에서 모욕을 당하매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51
『여 봐라 ―』
 
52
『녜 ― 이.』
 
53
『저손을 데려다가 수청방에서 묵게 해라.』
 
54
『녜 ― 이.』
 
55
범강장다리 같은 관졸은 조씨의 등을 밀다시피하여 밖으로 몰아낸다.
 
56
조씨는 하는 수 없이 수청방으로 내몰리었다. 그러나 차라리 죽는 게 옳지 수청방에 앉아서 처분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57
그래서 그 길로 바로 영문 밖으로 나가려 한즉 서리 하나이를 뒤를 쫓아나오며
 
58
『여보쇼.』
 
59
『……?…….』
 
60
『삿도께서 노자를 주시며 곧 서울로 가시라고 하십디다.』
 
61
하며 돈 열아문냥을 내주는 것이었다.
 
62
조씨는 그 돈을 받지 않았다.
 
63
『노잣냥 얻으러 오백여리를 왔겠소 감사께 오죽 가난해야 그러시겠냐고 도로 갔다 드리우.』
 
64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다소 어색한 기분이 풀리었다.
 
65
그러나 노자가 없는 것도 사실이요, 다리가 아파서 꼼짝을 못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66
『에라 구걸하긴 매한가지다.』
 
67
하고 하룻밤을 묵은 객주로 도로 와서 하루를 쉬기로 하였다.
 
68
봄의 평양도 좋으려니와 가을의 평양은 더욱 볼 만한 것이었다.
 
69
그러나 지금의 조씨의 형편은 그것을 구경할 형편도 되지 못하려니와 그리 할 생의도 없다. 그래서 아랫목에 누워 있노라니 웃목에서 무엇을 적고 앉아 있던 위인이
 
70
『처음 오신 노인같은데 금수강산의 구경이나 하려 나가시지 어째 그리 누워 계십니까.』
 
71
하고 말을 건넌다.
 
72
『구경이 좋겠죠마는 그런 생각을 낼 처지가 되지 못허우.』
 
73
『그게 무슨 말씀요, 구경하는 사람이 따로 있단 말씀요 허면 허는 게죠.』
 
74
이것이 시작이 돼서 말이 왔다 갔다하는 동안에 조성산은 평양감사를 찾아 온 까닭과 이전에 지내온 바를 하소연 삼아 이야기하였다.
 
75
『저런 죽일………아니 그게 사람의 자식이란 말씀요.』
 
76
『쉬 ― 그런 소리 함부로 마오 무슨 화를 당할는지 아우.』
 
77
『금일 동, 내일 서(今日東來日西)하는 낸데, 무슨 화가 온단말슴요.』
 
78
하고 주인을 불러 술을 차려다가 대접을 하고 저녁대접도 자기가 돈을 내겠다고하여 당면의 기갈을 면하게 하여 주었다.
 
79
이튿날 저녁이 되었다. 조씨는 그날 밤부터 신열이 대작하여 꼼짝을 하지 못하였다.
 
 
80
이튿날 아침에도 일어날 기력이 없어하는 것을 보고 어제 과객이 약을 지어다 먹인다 미음을 쑤어 먹인다 하여 저녁때는 생기가 돌았다.
 
81
『활인 부처란 곡곡이 있는 게지.』
 
82
조씨는 속으로 이렇게 감사하기를 마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밤에 신음을 하면서도 곰곰히 생각하였거니와 무면도강동도 분수가 있지 무슨 낯을 들고 집으로 갈 것인가.
 
83
굶주리는 처자식은 손을 꼽아 애비의 돌아 오기를 고대할 것이 아니냐 말께 전곡을 싣고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84
조성산은 세상을 비관하였다. 죽자, 죽어서 이고해를 벗어나자 고생에 시달린 몸이 부질없이 살아 있어서 무엇하리, 뒤에 남은 처자식이 불쌍은 하지마는 하다못해 남의집 살이를 하더라도 제 입야 먹지 못하겠느냐.
 
85
조성산은 한많은 몸을 간신이 가누어 대동문 밖으로 나가 강 언덕에 쭈그리고 앉았다.
 
86
날이 캄캄하게 되면 몸을 강에 던져 죽으리라.
 
87
무심한 선인들은 제 때를 만난듯이 석양이 비낀 강상에 노를 저으며 애수가 흐르는 뱃노래를 불러 상심된 조노인의 눈물을 자아내고, 깃을 찾아 날아가는 새 무리도 오늘은 유달리 뜻있게 지저귄다.
 
88
부지중 조씨의 눈에서는 하염 없는 눈물이 흘러나려 옷깃을 적시는 것이었다.
 
89
오십사세 한 평생에 마지막 이 땅에서 객사할 줄 어찌 알았으리!
 
90
그동안 한고에게 내준 돈만하여도 족히 평생을 살 것인데 나 좋아 주었으니 다시 뉘를 원망할 수는 없지마는,
 
91
『내 눈이 멀었던가 내 눈이 삐었어.』
 
92
하고 뉘우쳐지기가 한량 없다.
 
93
이윽고 해는 서산에 떨어지고 붉은 노을이 서천을 물드렸을 때 조씨는 마침내 강물에 투신코자 강편을 향하여 한 걸음 내어드디었을 때 웬 거대한 젊은 사람 하나이 백마를 달려 가까이와서 말께 내리며
 
94
『노인이 평양 감사를 찾아 온 서울 어른이시오니까?』
 
95
하고 묻는다.
 
96
『그렇소마는 어째 찾으시우.』
 
97
『우리 장군께서 잠간 뫼서 오라구 해서 왔소이다.』
 
98
(장군이라니 이 평양에 장군이 있는가?)
 
99
『장군이라니 중군영에서 오셨소』
 
100
『아따 그건 가보시면 아실 것이니 어서 말에 오르시오.』
 
101
하여 어리둥절하는 조씨를 휘몰아 말에 태워가지고 말을 모는데 집채같은 군마가 어찌나 속히 달리는지 귀에 바람 소리가 잉잉하고 울릴 지경이었다.
 
102
조씨의 생각에는 부중 어느 곳인가 하였더니 말은 북문을 나서서 한 이십리가량을 숨 쉴새도 없이 달려간다.
 
103
『여보 장군이 어디 계시길래 이처럼 멀리 가우?.』
 
104
『인제 얼마 아니 가면 됩니다.』
 
105
하고는 더욱 말 볼기에 채찍질을 자주 하더니 어느 산길로 잡아 들어 양장같은 굽은 길을 산속으로 들어간다.
 
106
조씨는 어안이 벙벙하여 내심에 생각하기를 기위 죽으려고 한 몸이니 어디를 간들 무서울게 있으랴 하였다.
 
107
이윽고 한 등성이를 넘어서니 거기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하고 허다한 사람이 나와서 조씨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108
그리고 말께 내리는 조씨를 부축하다시피 하고 정청으로 올라가 방으로 들어가니 실내의 조도라든지 깔려 있는 비단 보료 등속이 이 집 주인의 부유함을 말하는 듯하였다.
 
109
앉아 있은지 조금 후에 장군이 나왔다. 그의 늠늠한 풍도가 가위 장군이었다. 그는 공손히 인사를 하고
 
110
『전일에 지면이 없는 터에 먼데를 오시라고 해서 죄송하지마는 기실은 부하의 보고를 들으니 당신께서 한감사를 찾아 왔다가 봉욕을 한다는 것을 알고 남의 일이라도 어찌나 의분이 일어나는지 며칠동안 잘 노시고 가시게 할 양으로 뫼서 왔읍니다. 나는 녹림에 몸을 숨기고 사는 위인이올시다마는 의리 인정만은 다소 짐작하는 터이니 아무 기탄 마시고 노시다가 가십시오.』
 
111
하고 동자를 부르더니 백반을 드리라는 영을 내렸다.
 
112
조씨는 너무나 의외의 일이라 대답을 못하고 있는 중에 배반이 들어오는데 산해진수란 이를 두고 말한 듯 전에 보도 듣도 못하던 진귀한 음식이 교자상에 그득히 배치하여 있다.
 
113
『가양술이라 맛은 없어도 진국이올시다. 어서 한잔 드지오.』
 
114
장군은 그 교자상과 함께 들어온 소녀들을 시키어 미록 가득 부어 권한다.
 
115
조씨는 워낙 술을 즐겨하는 터일 뿐더러 이미 세상을 비관한 울울한 가슴을 풀기에는 술 밖에 없는 것을 아는지라, 권함을 따라 연거퍼 술을 마셨다.
 
116
아무리 속에 근심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술만은 무심하여 취해 오른다.
 
117
취하면 맘이 호탕해 지는 것이다. 나중에는 취흥이 도도하여 밤이 짙도록 술을 마시고 비단 이불에 싸이어 그밤을 지냈다.
 
118
하루 밤을 숙수하고 일어난 조씨에게는 새로운 오락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19
이리하여 하루는 앞내에 낚시를 느리고 뒷산에 사냥하고 하루는 시회를 여는 등 사오일 동안을 모든 근심을 잊고 놀았다.
 
120
간간이 집생각이 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마는 우선 눈앞에 있는 오락에 울울한 가슴을 풀지 않을 수 없었다.
 
121
그렇지마는 그것도 한정이 있는 일이라 사오일 지난 후에 조씨는 장군을 보고
 
122
『인제는 서울로 돌아 가서 굶어 죽은 처자식의 시체나 건져야겠소.』
 
123
하고 하직을 하였다.
 
124
『설마 산입에 거미줄야 치겠읍니까마는 노인의 정경이 그러실 듯하외다. 그럼 곧 길을 떠나시게 하시오.』
 
125
하고 백마에 안장제구를 갖추어 싣고 돈 삼백냥을 부담 삼아 실으며
 
126
『이건 약소하지마는 노자에 쓰시고 남으시거던 서울댁 살림에 보태 쓰십쇼.』
 
127
한다.
 
128
삼백냥이면 넉넉히 일년을 살 돈이라 조씨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129
『활인부처가 따로 있겠오 언제든지 이 은혜는 갚고야 죽어도 눈을 감겠오.』
 
130
하고 길을 떠났다.
 
 
131
『내 집이 어디로 떠났소?.』
 
132
하고 조성산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 도착하는 길로 내자동 자기집에 와서 본즉집은 밖으로 처박고 사람의 기척도 없다.
 
133
『어디로 떠나신 것을 들으시기 전에 길을 떠나셨읍니다그려 바로 이삼일 전에 떠나셨읍니다.』
 
134
『어디로 갔단 말요.』
 
135
『자하동으로 이사하셨는데 나 역시 가보지는 못해서 자세히 알려 드릴 수는 없읍니다마는 자하동에 가서 무르시면 모르는 사람이 없답니다.』
 
136
이게 웬 소린고 가난뱅이가 많이 사는 자하동으로 떠났다는 것은 그럴 듯도 하지만 떠나온지 일양일밖에 아니된 자기집을 물어만 보면 안다는 수작이 너무나 허무하다.
 
137
하여튼 아니 가볼 길이 없어서 조씨는 자하동으로 올라가서 물어본즉 과연
 
138
『저기 저댁이 조시어댁이외다.』
 
139
하고 가라키어 준다.
 
140
줄행낭이 사오 간이나 되고 높은 장원이 둘러선 소슬대문의 당당한 와가이다.
 
141
꿈인가 생시인가 조씨는 스스로 어이된 곡절을 헤아리지 못하고 중문에 이르러 안을 들여다 보니 완연히 자기 마누라가 대청에 앉아서 반빗아치들을 지휘하고 있다.
 
142
조씨는 안으로 뛰어 들어 가며,
 
143
『여보 마누라.』
 
144
하고 소리를 쳤다. 아내는 맨발로 축대에 내려 서며
 
145
『선문도 없이 인제 올라 오시오. 어서 이리 올라 오시지, 왜 그렇게 마당에 서 계시오.』
 
146
『아니 이게 대관절 뉘 집요.』
 
147
아내는 호호하고 웃으면서,
 
148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슈. 당신 댁이지 누구 집에 내가 있을 것 같소.』
 
149
한다. 조씨는 안방으로 들어가면서도 갈피를 차릴 수가 없었다.
 
150
거기에는 이전에 있던 고리짝 부담짝은 형사를 감추고 화류 농장과 의거리가 으리으리하다.
 
151
『자꾸 그렇게 이상스러이 여기시지 말고 이 편지를 보시구려 생각이 나실테니.』
 
152
하고 부인은 장농 설합에서 한봉 편지를 내어준다.
 
153
조씨는 그 편지를 읽어본즉 그것은 자기가 병중에 있으므로 대필하여 보낸다하는 서두를 쓰고 돈 삼천냥을 보내니 우선 집을 사서 나가고 세간 즙물도 남부럽지 않게 장만하라는 뜻이 적혀 있다.
 
154
『그 편지하고 돈을 가지고 왔길래 그날로 나서서 이 집을 흥정해 들고 세간서껀 다 장만을 하지 않았겠수.』
 
155
한다.
 
156
조씨는 아랫목에 펄썩 주저 앉아서 감루를 흘리었다.
 
157
『이것은 필시 그 녹림장군의 짓일 것이다.』
 
158
올라 올 때 돈 삼백냥을 주며
 
159
『이것은 노자로 쓰십시오. 서울 가시면 뜻밖에 편하게 계시게 될는지 뉘 알겠읍니까.』
 
160
하던 말이 다시 생각난다. 반드시 그 장군의 짓일 것이다.
 
161
조씨는 서관 쪽을 향하여 합장하여 몇차례나 속으로 그 장군의 복록을 축수하였다.
 
162
『대관절 웬 곡절인지 자세한 말씀이나 해 들려 주시구려.』
 
163
이번에는 아내가 놀랄 차례가 되었다.
 
164
이제까지 남편이 보낸 돈인줄만 여기고 있던 부인이 이제 남편의 하는 양을 보매 어이 된 곡절을 아지 못하였다.
 
165
조씨는 비로소 자기의 소경사를 낱낱이 이야기하고 그 녹림객의 후의을 눈물로써 감사하여 마지 않았다.
 
166
아내도 기쁜 눈물을 흘리며
 
167
『나는 한감사의 덕인 줄만 여기고 사람이 잘 되면 마음까지 후하게 된다고 오는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여 칭송을 마지 않았더니 이제 말씀을 들으니 그런 못된 위인이 어디 있단 말씀요, 그럴수록 그 녹림장군이란 이는 생부지 초면에 이런 후덕을 베푸니 세상에 같은 사람에도 어쩌면 그다지 틀린단 말요. 올해는 날이 점점 추워가니 다시 서관에 가실 수야 있소마는 내년 봄이 되거들랑 다시 한번 그 산속에 찾아 들어가서 치사나 하구 돌아오슈.』
 
168
『그것 참 좋은 말요. 그래야만 사람의 도리가 되겠소.』
 
169
하고 무한이 기뻐하였다.
 
170
이로부터 조씨는 상당히 풍유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워낙 식구가 단출한데 논을 열아문 섬지기 장만하여 수백석의 추수를 하게 되니 살림이 부르면 부를수록 자연히 집안에 일이 생기어 어언일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갔다.
 
171
어느 날 초저녁때이었다. 때는 초여름이라 조성산은 사랑마당에 교의를 내다 놓고 걸쳐 앉아서 바람을 들이고 있을 즈음에 별안간 웬 사람 하나이 사랑 일각대문을 뻐기고 들어오며
 
172
『사람 좀 살리쇼.』
 
173
『………?………』
 
174
『나는 녹림호객으로 지금 포졸에게 쫓기어 갈 곳이 없어서 댁으로 뛰어 들어 왔으니 어디든지 좀 숨겨 주시면 재생의 은의를 잊지 않겠소이다.』
 
175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황황한 태도로 밖을 기웃거린다. 녹림호객이란 말에 연전 생각이 나서 급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니 천만 뜻 밖에 자기에게 후의를 베푼 그 녹림객이라,
 
176
『아 이게 누구요.』
 
177
하며 손을 잡으매 그 역시 자못 놀란 낯을 하며
 
178
『자아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고 날 좀 어서 숨기어 주시오.』
 
179
한다. 조씨는 그의 손을 붙들고 곧 안으로 들어가서 여인들을 뒷채로 내몰고 안방 벽장 속에 은신케 하였다.
 
180
그러자 마자 홍사 오라를 허리에 찬 포졸 삼사인이 조씨 집으로 돌입하여
 
181
『우리는 방금 도적 괴수의 뒤를 쫓는데 그 괴수가 갈데 없이 댁으로 들어왔은즉 은휘치 말고 내나야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장적(藏賊)의 율을 면치 못하오리다.』
 
182
『아닌 밤에 남의 집에 무람히 돌입하는 것도 해괴하거니와 허다한 집에 하필 내 집에 들어왔단 말이 이 무슨 억택인가.』
 
183
『우리는 도적놈 잡는 것으로 생계를 삼는 놈이올시다. 한번 여기다 하면 틀려 본 적이 없소. 더구나 댁은 외딴 집으로 다른 데로 기구 샐 데가 없읍니다. 그러지 말고 어서 내놓시우.』
 
184
『듣자하니 점점 해괴 망칙한 일이지, 도적을 감추다니 내가 무엇 부족해서 장적의 율을 범한단 말인가.』
 
185
포졸들은 저이끼리,
 
186
『여보게 긴 말할 필요가 없네, 뒤져 보면 알 것이 아닌가.』
 
187
하더니
 
188
『그럼 댁을 뒤져볼 테이올시다.』
 
189
『뒤져보거나 말거나 자기네들 속 편할대로 해보게나그려.』
 
190
여럿은 광 허간 뒤곁 심지어 장독대와 마루밑까지 샅샅이 뒤져보고는
 
191
『안방 누다락을 좀 봅시다.』
 
192
한다.
 
193
『무어 어째 안방을 보자니 이런 변이 어디 있노 아무리 불학무식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안 부녀들이 있는 안방을 보자니, 그런 법이 어디 있소.』
 
194
하고 호령을 하는 것이었다.
 
195
『우리들은 도적을 잡으러 왔지 부녀를 잡으러 온 게 아니올시다. 만일에 안방을 안 뵈시려거든 쥔께서 대신 포도청으로 갑시다.』
 
196
하고 눈을 부라리며 조노인의 두팔을 붙잡는다.
 
197
『포도청이 아니라 이 목이 부러져도 안방에 못 들어가지.』
 
198
하고 호령을 그치지 않는다. 포졸들은
 
199
『누가 억지로 보자우 쥔이 대신 가잔 말요.』
 
200
『대신아니라 내가 도적의 누명을 쓰고 죽더라도 못할건 못하는 법이지.』
 
201
하고 더욱 강경한 태도를 지은다. 포졸들은 조노인의 몸을 꼭두잡아 시키다시피하며 두어걸음 대문께로 나아간다.
 
202
이때에 벽장을 박차는 소리가 나더니 그 녹림장군이 마루로 뛰어 나오며
 
203
『너희들은 어서들 다 가거라.』
 
204
하고 소리를 지르매 포졸들은
 
205
『녜 ― 이.』
 
206
하고 허리를 굽실하고는 물러나가 버리었다.
 
207
조씨는 어안이 벙벙해서 얼른 말이 나오지 않는다.
 
208
녹림객은 조씨의 손을 붙들고 사랑으로 나오며
 
209
『세상에 인제야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을 보았고. 은의를 아는 사람을 만났으니 이런 만족할 일이 없읍니다. 지금 들어온 포졸은 다 나의 부하로 노인의 심지를 시험해 보고자 한 것이외다.』
 
210
하고 초연히 말을 이어
 
211
『나는 본시 남의 얼자로 세상에 등용되지 못함을 한탄하여 녹림에 몸을 숨겼더니 이제 멀리 압록강을 넘어 다른 천지에서 일을 해 보기로 되었기서울온 김에 노인을 찾아 뵌 것이외다.』
 
212
하고 인히 작별을 하며
 
213
『일간 내가 가졌던 금은을 모두 보내드릴 것이니 받아 두십쇼.』
 
214
『아니 이제 작별하면 언제 다시 뵈올지 모르거던 어찌 박주 한잔 나눔이 없이 헤어질 수 있소.』
 
215
하고 극구 만류했지마는 그 녹림객은
 
216
『몸이 유다르니 용서하시오.』
 
217
하고 기어이 소매를 나누고 말았다.
 
 
218
이런지 이틀후에 십여마리의 말이 금은 전곡을 싣고 와서 조씨 집에다 풀고 갔다.
 
219
조씨는 그것이 녹림객의 보냄인 것을 알고 받아 두어 거익부호가 되었다.
 
220
그러자 소문에 평양 감사 한씨가 파관이 되어 상경하였다는 말이 들리매 조성산은
 
221
『저는 나한테 그리 했지만 나는 내 도리를 차려야겠다.』
 
222
하는 생각으로 하루는 한감사를 그의 사저로 찾아 갔다.
 
223
한감사는 조씨의 의표가 화려하고 신수가 티인 것을 보고 심중에 이 사람 부자가 되었구나하는 생각이 나서 전일의 냉랭한 태도와는 딴판으로 아유하는 웃음을 지어 웃으며
 
224
『그 동안 나를 얼마나 원망했겠소. 실상은 발분해 돈을 모으라고 일부러 그랬소이다.』
 
225
하고 청직이를 불러서
 
226
『이 애 광문을 열고 돈 오백냥을 꺼내서 이 나으리 댁으로 보내 드려라.』
 
227
『아니올시다. 지금은 다행히 남의 부조를 받지 않고서 살게 됐읍니다.』
 
228
『글쎄 그렇더라도 돈이란 많다고 귀찮은 것은 아닙네다.』
 
229
청직이는 광문을 열러 다녀 들어오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230
『대감 큰일 났읍니다.』
 
231
『응?』
 
232
『광속에 있는 돈 포대 속엔 돈은 한푼 없고 말끔 해골 쪼가리 뿐이올시다.』
 
233
『그게 무슨 소리냐?.』
 
234
하고 감사 자신이 밖으로 뛰어 나가서 광속을 검사해 보니 과연 돈은 한 잎도 없고 전부가 해골쪼가리 등속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235
백성의 고혈을 빨아 먹어 만든 졸부는 역시 하룻밤에 거지가 되고 말았다.
 
236
조씨는 속으로 녹림객의 짓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마는 그런 내색도 아니한 것은 물론이었다.
 
 
237
<끝>
【원문】투환금은(偸煥金銀)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여러분의 댓글이 지식지도를 만듭니다. 글쓰기
〔소설〕
▪ 분류 : 근/현대 소설
▪ 최근 3개월 조회수 : 13
- 전체 순위 : 3694 위 (3 등급)
- 분류 순위 : 508 위 / 882 작품
지식지도 보기
내서재 추천 : 0
▣ 함께 읽은 작품
(최근일주일간)
▣ 참조 지식지도
▣ 기본 정보
◈ 기본
  # 투환금은 [제목]
 
  윤백남(尹白南) [저자]
 
  소설(小說) [분류]
 
  야담(野談) [분류]
 
◈ 참조
 
 
  # 조성산
 
▣ 참조 정보 (쪽별)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지식놀이터 :: 원문/전문 > 문학 > 한국문학 > 근/현대 소설 카탈로그   본문   한글 
◈ 투환금은(偸煥金銀) ◈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9월 0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