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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년 문단의 총결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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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1
윤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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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7년 문단의 총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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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발전과정의 검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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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은 전 무산계급 ----- 과 함께 반드시 과정하게 된 발전과정으로 의식적으로 과정하여 현단계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조선의 특수사정이란 객관적 정세는 전체성적 부분운 동인 문예운동에까지 다대한 경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명확한 사실이다. 이러함에 불구하고 우리의 운동자체가 상당한 진전을 보여준 이유로는 의식적 ----- 자 등의-------- 에 의함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무의식적 행동인 자연발생기의 운동은 활동자체의 오류와 결함이 존재하였음으로 이것이 구명된 때에 목적의식적 행동인 제2기의 운동을 촉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제1기인 자연발생기의 운동으로부터 제2기인 목적의식기로의 질적 전환을 감행하게 되었다. 여기에 제2기적 임무를 다하기 위하여 문예운동으로서의 방향전환을 하게 되어 의식적으로 ----- 진출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제2기의 운동이 목적의식적 행동이니만치 또한 투쟁 목표가 --------- 인 만큼 모든 행동에 있어서 미미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문예운동이 방향전화를 하였으니 ------ 출을 하였느니 하지마는 실질에 있어서 이러하다 할 만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소리칠 만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였다. 더구나 작품 행동에 있어서는 현단계에 요구하는 작품이 한 개도 발표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제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물론 조선이란 특수사정이 작품 행동으로부터 일체의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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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 지적한 발전과정이 과거 일 년간 문예 운동진영 내에 얼마마한 영향을 끼쳐주었는가? 또한 동지 간에는 여하한 방법으로 여하히 의식적 행동을 감행하여 왔는가? 이것을 구체적으로 토의하여 보는 것도 문예운동 진전상 무의미한 일이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하면 1927년의 문예운동을 회고하여 1928년의 운동을 가일층 의의 있게 조직적으로 더 효과 있게 움직여 나가자는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 과거 일 년간의 평론계, 소설단, 시단, 기타 행동 등을 부분적으로 지적 구명하여 신년운동에 한 도움이 되기를 힘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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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으로 말하면 조선무산계급 문예운동에 있어서 가장 의의 있고 역사적 필연의 임무를 어느 정도까지 감행하였고 가장 중요한 계단을 과정한 일년임에 틀림없었다 자연생장기에서 . 목적의식기로의 비약을 하여 질적으로 전환을 하게 된 것도 과거 일 년의 일이요, 문예로서의 방향전환을 하여 ----- 진출을 보게 된 것도 또한 과거 일년에 일어난 의식적 행동이었다. 다시 말하면 과거 일 년간에 전체성적인 조선의 -------- 이 조합주의적 경제 투쟁에서 전 무산계급 ----- 으로 방향전환을 하게 되어 국부적 --- 이 전선적 --- 으로의 비약적 진전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 전체성을 통한 부분 운동으로의 임무를 다하고자 하는 문예운동도 반드시 의식적 노력에 의하여 방향전환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될 단계를 과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반 문예운동자로서는 기계적 공식적으로 문예운동을 전진시키지 않기 위하여 문예영역 내의 주체적 지도 이론 확립에 노력하여 왔다. 그래서 같은 진영 내에서도 동지 간에 격렬한 이론투쟁이 시작되었고 상호비판에 의하여 비본질적 오류를 바로잡기에 노력하였다. 또한 <아나>와의 이론투쟁, 자유주의자 배격, 현 단계에 대한 인식착오, 인식부족한 동지의 극복 등등을 감행하여 왔다. 이와 같이 이론확립, 이론투쟁, 상호비판, 오류적발 등을 하지 아니치 못하게 되었음으로 1927년이란 과거 일년을 과정하는 동안에 평론계만이 문예운동 진영 내에서 활약을 거듭하여 다대한 수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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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먼저 1927년인 신년 벽두부터 같은 진영 내에서 동지 간에 격렬한 이론투쟁을 검토하겠다. 그것은 김기진씨와 박영희씨와의 평적태도에 대한 미증유의 논쟁이었다. 두 분에 대한 논쟁의 발단은 1926년 12월호에 발행된 『조선지광』(12월호인 제62호에) 기재된 김기진씨의 「문예월평」이란 창작비평문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문제의 초점은 평적태도에 대한 근본적 오류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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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김기진씨의 비평적 태도를 수삼 지적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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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에 실린 염상섭씨의 「미해결」은 미완성인 채로 발표된 것이니 끝까지 읽기 전에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일이나 이미 읽은 부분만을 가지고서도 작자의 목적과 주제는 대강 짐작하겠다. 사건의 연결과 묘사의 기교는 항상 보는 바와 같이 감히 타인의 추종을 허하지 않는 바가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무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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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형의 「철야」「지옥순례」두 편에 대해서도 나는 내가 마땅히 말하여만 할 말을 다해야겠다. 먼저 「철야」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하면 이 소설의 구상은 가장 논리적으로 된 것 같다. ----- 작가는 <인생이란 무엇이냐 생활이란 무엇이냐 ? ? 빈부의 차별이란 ----- 한 것이냐? 아니다. 우리는 빈한하다. 우리는 무산계급자다. 무산계급은 자계급의 ---- 과 ----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너무도 쉽사리 간단 간단하게 처리하였다. 그 결가 이 일편이 소설은 아니요 계급의식, 계급투쟁에 대한 추상적 설명에 시종하고 말았다. 일언일구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서만 사용되었다. 소설이란 한 개의 건축이다. 기둥도 없이 석가래도 없이 붉은 지붕만 입히어 놓은 건축이 있는가? ---- 작자는 최후의 <계급 운운>의 말을 쓰기 위하여 명진이를 씻고 이 글을 썼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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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지옥순례」역시 소설이 요구하는 요건을 구비하지 못한 실패한 작품이다. 작품 「지옥순례」가 작품으로 성립되기 위하여서는 칠성이 아버지 진달이의 그 단말마적 기갈에 대한 실감의 고조가 무(無)하고는 ---- 묘사의 공과는 실감을 줌에 있다. 그런데도 여기에는 묘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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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 열거한 김씨의 원문이 무엇을 의미하였던 것인가? 이것을 한번 검토하여 보자. 염씨의 기교만을 운운한 것이라든가 박씨의 작품을 <계급운운>하기 위하여 쓴 것이라고 좀 불쾌한 듯이 논평한 것이라든가 또한 기교만을 편중하여 실감의 고조를 역설한 점으로 보아 그때에 김씨의 태도를 순계급적 입장에서 작품을 평한 비평가라고 인증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때에 동지 간에는 이와 같은 기대도 없지 않았었다. 김기진씨나 박영희씨 혹은 새로운 평론가 등이 엄정한 맑스주의 입장에서 일선 작품에 대하여 계급적 비평을 내리기를 고대하기마지 않았었다. 이와 같은 기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기진씨는 의연히 염상섭씨와 같은 묘사에만 전력하는 기교만능주의자의 작품을 호의로써 비과학자의 태도로 비평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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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박영희씨와의 논전이 비롯된 것이다. 일년 전에는 부르작가 염상섭씨와 박영희씨 간에 격렬한 논쟁이 있었던 것이 이 때에는 같은 진영 내에서 동지 간의 이론투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래 일 년간 이만한 진경을 보여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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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지광』신년호(1927년)에 기재된 박영희씨의 논문 「투쟁기에 있는 문예비평가의 태도」는 문예운동을 위하여 무엇을 말해 주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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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상에 있어서 내재적 비평과 외재적 비평을 구명하여 투쟁기에 당면하여서는 외재적 비평에 치중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단언을 내렸다. 다시 말하면 작품의 구성요소만을 분해하여 묘사가 있다 라든가 기교가 없다 라든가 하는 단순히 문학사적 비평을 떠나서 사회적 의의를 결정하는 문화사적 비평에 주목점을 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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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하여 박영희씨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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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단언한다 . 프롤레타리아의 작품은 김군의 말과 같이 독립된 건축물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레닌의 말과 같이 큰 구조의 한 치륜인 것을 또 사시 말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전 문화가 한 건축물이라면 프롤레타리아의 예술은 그 구성물중에 하나이니 석가래도 될 수 있으며 기둥도 될 수 있으며 기와장도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군의 말과 같이 소설을 소설로서 완전한 건축물을 만들 시기는 아직 프로예술에서는 시기가 상조한 공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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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김기진씨와 박영희씨의 논조가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러나 박영희씨 자신도 한 가지를 망각하고 넘긴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곧 기둥이나 석가래를 어떻게 제작하겠는가? 다시 말하면 외재적 비평을 위한 내재적 비평에 대하여 아무런 논의가 없었다. 한 개의 작품을 사회적으로 의의 있게 창작하기 위하여 - 문화사적으로 더한층 효과 있게 표현하기 위하여 - 새로운 형식과 새로운 기교를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동광』(2월호)에 기재된 권구현씨의 논문 「계급문학과 그 비판적 요소」중에 다소 논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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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한 개의 작품[작술(作述)]을 - 김군은 건축에 비하였고, 박군은 치륜에 비하였음에 반하여 - 장검(長劍)에 비유하겠다. 내가 말하는 이 장검은 결코 당시에 애검가가 가지는 그와 같은 장검은 아니다. 급격히 몰아들어오는 ----- 을 물리치기 위하여 만든 장검이다. 그럼으로 이것은 피갑도 없고 자루도 험하고 칼등도 함부로 굽었다. 광택도 물론 없다. 그러면 애검가가 이 장검을 볼 때에 뭐라고 평할 것인가. 장검이 요구하는 요건을 구비하지 못한 불완전한 장검이라고 말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게 무슨 장검이냐고 발길로 차 내버리지 않았으면 만행(萬幸)이겠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미구에 지쳐 들어올 ---- 을 방비하기 위하여 ---- 하기 위하여 응급하게 제작하는 이 장검에서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아로 새기는 세공을 요할 것인가. 정제한 전형(典型)과 광택 있는 맵시를 구할 것인가. 피갑을 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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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아무 것도 요하며 요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오로지 바라는 것은 먼저 양호한 강철을 취택한 다음에 낙락장송이라도 일도에 참단(斬斷)할 날카로운 백도(칼날)뿐이다. 우리가 취택하는 제재는 강철이다. 표현은 백도이다. 목적은 다같이 ----- 을 물리침에 있다. 애검가는 춤을 춰도 좋다. 예술비평가는 어떠한 악평을 내리든지 자유에 맡긴다. 장검은 그의 임무만 마치었으면 그만이다. 작품은 프롤레타리아의 문화적 사명만을 다함에서 족하다. 여기에서 참된 프롤레타리아 예술비평가가 있다 하면 먼저 그 강철의 양부를 심사하고 다음으로 검도를 만져 봄에 그칠 것이다. 그러고 여분의 요건은 평화기에 가서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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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재래의 부르비평가들이 취한 태도를 비난, 부정하는 한 옆에 새로운 비평가를 요구한 것이다. 강철, 백도 등을 운운한 것은 새로운 형식, 새로운 묘사를 말한 것이요, 새로운 묘사와 형식을 요구하는 것은 맑스주의적 기준에 의한 작품을 더 한층 효과 있게 표현하기 위하여 취하는 태도이다. 그래서 김기진씨는 『조선문단』(2월호)에 기재된 「무산예술작품과 무산예술비평」이란 논문 중에서 아래와 같은 의사를 표명하는 동시에 김씨의 근본적 태도를 성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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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하여 나는 나의 결론을 말하면 우리 문예비평가는 소위 내재적 비평을 취입한 외재적 비평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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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군 일개인 뿐 만아니라 우리 동지의 대부분이 나의 비평가적 태도에서 소위 <프로 문예비평가가 되기 전에 계급의식 운운에 호감>”을 가져야만 할 만큼 불선명한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공인하는 사실이라면 마땅히 나는 동지들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사죄하고 앞날을 맹서하겠다. 이것은 진정한 과학자의 태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와 같이하여 일시에 격렬하였던 같은 진영 내의 이론투쟁은 문예운동 진도 상 중대한 의의를 남기고 일단락을 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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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아일보』지상에 기재된 권구현씨의 신년호 창작평은 어느 정도까지 과학자적 태도의 비평이었고 다소 새로운 진경을 보여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여간 묘사를 위한 묘사, 기교를 위한 기교를 평하던 비평적 태도에 비하여 일대비약이었다. 어떻게 표현했는가를 검토하기 전에 작자가 무엇을 쓰려고 했는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였는가를 계급적 입장에서 비평하였다. 다시 말하면 작가의 근본의도가 사회적 의의, 문화사적 가치 등에 얼마만한 영향을 끼쳐 주었는가를 상고(詳考)하기에 치중하였다. 이 점으로 보아 내재적 비평 기준에서 외재적 비평 기준으로의 신경지를 개척할 평론가이었다. 그러나 권씨 태도에 있어서 진정한 맑스주의적 기준에 의한 비평인가를 의심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한설야씨의 검토문이 『조선일보』지상에 발표되었으니,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였고 무엇을 결정하였는가? 권구현씨의 평적 태도에 대하여 중간파적 비평이라고 단안을 내렸다. 사실 한설야씨가 구명한 바에 의하면 진정한 맑스주의적 비평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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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문단』3월호에 기재된 김화산씨의 논문 「계급예술론의 신전개」는 문예운동 진영 내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던 것은 사실이다. 그 평론에 의하여 일반 문예운동자로서는 그대로 묵과할 수 없었던 까닭에 이론투쟁이 거의 조직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계급예술론의 신전개」를 중심으로 한 반격문이 『중외일보』, 『조선일보』지상에 일시에 발표되었으니 하나는 동지 조중곤군의 「선전과 예술」이요, 또 하나는 필자의 「계급 예술론의 신전개를 읽고」였다. 그 뒤미처 동지 한설야군의 박문(駁文)이 『동아일보』지상에 기재되었으니 이와 같은 논쟁이 무엇을 의미한 것이며, 어떠한 효과를 나타내었는가. 제일은 <아나>와의 투쟁, 그 다음에는 문예이론확립에 다소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행동을 의식적으로 감행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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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삼 개월이 경과한 후 『현대평론』지상에 김화산씨의 박문에 대한 박문 「뇌동성 문예론의 극복」이 발표되었으니 그 글의 내용은 우리를 비맑스주의자로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론 근거가 박약하였고 또한 문예운동의 본질을 모르는 맹목적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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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기에 대하여 <아나>와의 투쟁보다도 제1의적인 문예이론 확립에 또한 현계단 구명에 의식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래서 조중곤군은 또 다시 『중외일보』지상에 재반박문인 「비맑스주의적 문예론의 배격」을 발표하였고, 필자 역시 『조선일보』지 상에 「상호비판과 이론확립」이란 재반박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 뒤에 『중외일보』지상에는 순전히 조중곤군을 상대로 한 강허봉씨의 반박문이 기재되었고, 『조선일보』지상에는 전혀 필자 일 개인만을 상대로 한 김화산씨의 「속 뇌동성 문예론의 극복」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논쟁하기를 피하였다. 그 후에 임화씨의 검토문이 『조선일보』에 기재되었으니, 제목이 「착각적 문예이론」인 만큼 김씨의 착각적 문예이론, 본질적 오류를 맑스주의 입장에서 지적, 구명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반년 이상의 격렬한 논쟁은 서로 미진한 점이 많으면서 종막을 고한 듯싶다. 그러나 어느 때에 또 다시 재전개될른 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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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지상에 유엽씨와 김태수씨와의 논쟁이 수차 거듭하였다. 또한 유씨의 단말마적 행위, 형이상학적 정신주의자의 망론은 『조선지광』8월호에 기재된 박영희씨의 「문예시평과 문예잡감 중에서 여지없이 정체 폭로 치명상의 검토를 당하였으므로 나는 이곳에서 유씨와 김씨와의 논쟁한 내용을 검토하기를 피한다 . 유엽씨의 소위 이론이라는 것을 이 시대의 민중 - 더구나 조선의 대중 - 이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구하거나 기대하지 않는 것만큼 우리는 그러한 이론답지 못한 이론에 대해서는 의식적 지도 하에 적극적으로 배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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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지광』8월호에 기재된 김기진씨의 「시감2편」중 조명희씨의 「낙동강」을 아래와 같이 비평한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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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큼 감격으로 가득찬 소설이 - 문학이 있었던가. 이 만큼 인상적으로 우리들의 눈앞에 모든 것을 보여준 눈물겨운 소설이 있었던가. 이것은 어떤 개인의 생활기록이 아니라 이것은 현재 조선 - 1920년 이후 조선 대중의 거짓 없는 인생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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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 대하여 박영희씨는 『조선지광』9월호에 「감격!」이란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의사를 표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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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보라 예술가의 그 순진한 눈으로서는 다만 현실을 소극적 퇴폐로 옮겨 놓고 말 것을 ─. 회의, 낙망, 무기력과 한 가지, 예술가의 눈물은 어마나 큰 해독을 사회에 남기어 놓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해독을 지적하며 이 눈물의 궁전을 파괴하며 예술의 사회적 임무를 주장하는 작가 혹 평가들도 때때로 이 퇴폐된 유물에게 그 의지의 침략을 당하게 되는 것을 본다. 눈물 어린 ‘로맨틱’한 애조를 읊을 때 마다 이것을 파괴하지 않고, 파괴하기 전에 먼저 안가(安價)의 감격이 발동해서 이 애조를 찬미한다. 얼마나 주장 없는 예술가! 얼마나 의식 없는 예술가랴! 예술가여! 감격의 눈물로서만 사회를 보려하지 말자! 이것은 아무런 가치도 같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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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 지적한 부분을 본다면 김씨의 비평이 현단계에 있어서 다소 오류를 범하였던 것은 이론전개가 증명하는 명확한 사실이다. 이것보다도 더 한층 커다란 오류를 침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곧 작품 행동에 있어서 제2기 문제이다. 그래서 동지 조중곤의 검토문이 『조선지광』10월호에 「낙동강과 제2기 작품」이란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그 글의 내용은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으니, 하나는 조명희씨의 「낙동강」이 사실 제2기적 작품이 아닌 만큼 김씨의 비평이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지적하였고, 또 하나는 제2기 작품은 여차여차한 구체적 요소를 구비해야만 되겠다는 것을 구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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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운동에 있어서 작품행동이 한 개의 중요한 부분 행동이니만치 현 단계에 요구하는 작품 기준, 작품 규범 등의 이론 확립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중곤씨는 「낙동강과 제2기 작품」을 발표하여 현 단계의 임무를 다하려고 노력하였고 필자는 『조선일보』지상에 「무산문예가의 창작적 태도」를 발표하여 문예운동 상 제2기에 있어서 한 도움이 있기를 의식적으로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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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술이론에 대해서 다소 논의하여 오기는 미지의 동지 김용준씨를 들 수밖에 없다. 처음 발표한 「화단개조」(『조선일보』)에 대해서는 많은 호감을 가졌었고 앞으로 미술이론 확립에 노력하여 주기를 기대하였었다. 그 후 『조선일보』지상에 동씨의 「무산계급회화론」이 기재되었는데, 전번에 비하여 다소 불만족한 점도 없지 않았으나 그대로 넘겼다. 그러나 셋째 번 발표된 「프롤레타리아 미술 비판」은 그대로 묵과할 수 없는 내용이기에 필자는 『조선지광』11월호에 김씨의 인식부족, 인식착오 등을 지적, 구명하였다. 뒤미처 『조선일보』지상에 「미술영역에 재한 주체이론 확립」이란 제목으로 임화씨의 김씨에 대한 반격문이 발표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미술에 있었어도 미술을 규범할 만한 미술이론 확립을 위하여 이론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될 필연의 과정을 과정하게 된 것이다. 무산계급 예술운동에 있어서 연극 부분이 중대한 역할을 감행할 수 있는 만큼 미술 부분도 중대한 역할을 감행할 수 있다. 감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감행하기를 의식적으로 노력할 것이다. 임화씨는 이 점을 파악하였고 본질적 이론을 표명하였다. 그래서 임화씨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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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미술가는 ---- 포스터를 제작할 것이다. 그리하여 석판가에게 보낼 것이다. 그래서 대량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가두에다, 극장에다, 공원에다, 전차에다 우리는 우리의 미술품 전람회를 열 것이다. 우리의 미술가는 --------- 가는 물론 일면 운동의 ------ 할 것이다. 여기에 프롤레타리아 미술의 ------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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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임씨는 현 단계의 프로미술을 구명하였다. 여기에 공명되는 동지는 이와 같은 이론을 파악한 미술 동지는 같은 진영 내로 집중하여 금년부터 새로운 미술 행동을 감행하자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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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중외일보』신년호(1927)년에 기재된 박영희씨의 평론 「신흥 문학 건축의 여명적 운동」은 과거 운동을 파악하기에 가장 요령을 얻을 만하고 또한 운동진전상 중대한 의의, 다대한 효과를 나타낼 논문이었다. 김기진씨의 논평 「문단침체의 사회적 의의와 신흥 문예의 구도에 대하여」(『조선지광』신년)는 전에 보지 못하여 가장 조리 있고 가치 있는 논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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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학사적 개관을 논하여 재래의 문단 침체의 원인을 역사적 필연의 귀결이라고 지적하였고 신흥문학의 융성을 과학적으로 표명하였다. 무산계급 문예운동이 조선 사회의 일대 현상으로 적극적으로 진출될 것을 역설하였다. 『동광』3월호에 기재된 권구현씨의 「전기적 프로예술」이란 논문이 무엇을 말하였으며 문예운동에 어떠한 효과를 나타냈는가? ----- 전기의 예술적 기능, 예술적 임무 등을 운운한 것이 현 단계 구명에 대하야 다소간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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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씨의 「문예비평의 형식파와 맑스주의」(『조선문단』3월호)는 러시아의 문예 진전상 중대한 문제가 되어온 <형식파>와 <맑스주의파>의 논쟁을 단편적으로 소개한 것이다. 그러나 박씨의 근본 의도는 소개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조선에서도 문제되었던 내재적 평과 외재적 평에 대한 근본적 의도를 구명하고자 한 것이다. 동씨의 「문예 의식 구성과 계급 문학의 진출」(『조광』6월호) 「문예운동의 목적의식론」(『조광』7월호)은 문예 가치와 의의가 중대한 평론이었다. 그러나 객관적 정세는 박씨로 하여금 할 말이 다 못하게 하였던 관계상 방향전환에 대한 이론이 구체적으로 되지 못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중외일보』지 상에 기재된 김태수씨의 「방향전환에 입한 문예운동」이란 평론도 제2기를 과정하는 문예 운동에 한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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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외일보』지상에 이북만씨와 송순일씨와의 논쟁 또한 이북만씨의 「일본문예 조감도」(『조선일보』) 『조선지광』2월호에 기재된 박영희씨의 「신경향파 문학과 무산파 문학」과 문원태씨의 「제2기 투쟁기는 재래하였다」와 동지 3월호에 박영씨의 「무산예술의 집단적 의의」, 한병도씨의 「계급 대립과 계급 문학」동지 4월호에 기재된 박영희씨의 「문예운동의 방향전환」과 김기진씨의 「문예시평」(『조선지광』2월호에서 5월호까지) 등이 문예이론확립에 중대한 임무를 감행하였다. 또한 이상에 지적한 논문 이외에 잡지 혹은 신문지상에 발표되었으나 지면관계, 시일문제로 더 쓰기를 피한다. 그러나 이 모든 시평이 과거 일 년간 문예운동 진영 내에 적지않은 영향과 부분 행동으로의 역할을 감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과거 일 년간에 평론계만이 전에 보지 못하던 활약을 정(呈)하게 되었고 문예운동에 있어서 반드시 과정하게만 된 단계를 과정하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이론투쟁을 하지 아니치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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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의 소설단으로 말하면 평단에 비하여 양으로나 빈약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양적으로 보아서 신년호 이후의 창작은 매월 한두 개에 불과하고, 질적으로 보아서는 과연 현단계에 요구하는 작품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매월 한두 개씩 발표되는 소설도 제2기적인 방향전환 이후의 작품 행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소 목적의식적 색채를 띤 경향이 보이기는 보였으나 그것이 진정한 방향전환기의 작품은 아니었다. 이론에 있어서는 제2기를 운운하게 되고, 방향전환을 논의하여 왔으나 작품에 있어서 그 이론을 실천하지 못하였다. 나는 지금부터 과거 일년 간에 발표된 소설을 한번 검토하여 보겠다.
 
45
『동광』신년호에 기재된 이기영씨의 「실진」, 최서해씨의 「餞迓辭[전아사]」, 주요섭씨의 「개밥」등도 전부가 제1기에 속한 작품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주요섭씨의 「개밥」은 자연주의 작가의 창작적 태도로 제작된 소설이었다. 우리는 그때에 벌써 그런 류의 소설을 요구하지 않았고, 그런 류의 작가를 배격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를 파악한 무산작가를 환영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을 그렸다고 그것이 진정한 프로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46
『조선문단』신년호에는 최서해씨의 「홍염」, 김영팔의 「여성」등이 기재되었다. 그러나 김영팔씨의 「여성」으로 말하면 발표하지 않았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할 만큼 우리의 기대를 등지고 만 희곡이었다. 1928년부터는 이와 같은 희곡을 발표하지 않을 터이지 ----- 좀더 계급적이고 또한 현 단계에 요구하는 무산계급 생활의식의 발로인 진정한 의미의 프로 희곡을 발표하리하고 믿는다.
 
47
최서해씨의 「홍염」으로 말하면 자연발생기에 있어서 가장 우리가 취할만한 작품이다. 「홍염」이란 작품 속에서 움직이는 인물 중에 호인은 누구를 상징한 것이었던가? 여기에서 우리는 방향전환기로의 질적 변환을 보여주려는 것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현대평론』5월호에 기재하였다가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삭제되고만 「이중」으로 말하면 제2기적인 방향전환기가 요구하는 작품으로서의 일부분의 것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객관적 정세는 어느 정도까지 제2기 작품이라고 수정할 만한 문예품을 말살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작가로서의 고민이 있고 작품 행동을 감행코자 하는데 난관이 되는 것이다.
 
48
『문예시대』신년호에 기재된 송영씨의 「석공조합대표」, 조중곤씨의 「아이쓰크림」, 최서해씨의 「낙백불우」, 필자의 「새살림」, 박길수씨의 「그날 밤」, 김영필의 「부음」등은 거의 같은 경향을 보여준 작품이다. 그 중에 송영씨의 「석공조합대표」로 말하면 주인공의 움직임이 목적의식적 행위였고 제1기에서 제2기로의 질적 전환을 최서해씨와 함께 보여주었다.
 
49
『조선지광』신년호에는 최서해씨의 「가난한 아내」, 김영팔씨의 「검은 손」, 이기영씨의 「농부의 집」, 조명희씨의 「새 거지」등이 발표되었다.
 
50
최서해씨의 「가난한 아내」로 말하면 어느 편으로 보든지 실패한 작품이었다. 실패한 작이라느니 보다도 우리에게 불쾌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의식적 ----- 자로서 그런 무책임한 작품을 발표하지 아니치 못하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금년부터는 여하한 이유, 여하한 조건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런 무책임한 작품은 발표하지 않기를 동지들에게 제언한다.
 
51
이기영씨의 「농부의 집」으로 말하면 조선의 농촌, 조선의 농민을 여실히 그린 점으로 보아 가장 취할 곳이 많은 작품이었다. 그 후에 발표된 것을 열거하면 현대 평론의 「농촌사람들」(조명희) - 「어머니의 마음」(이기영) - 등 이었다. 조명희씨의 「농촌사람들」은 이씨의 「농부의 집」과 같은 경향을 보이는 의의 있는 작품이었다.
 
52
송영씨의 「군중정류」(『현대평론』3월호)로 말하면 주인공의 행동이 개인적이 아니고 집단적임에 취할 점이 있다. 또한 의식분자가 아닌 사람으로 하여금 의식적 행동을 감행하도록 한 것에 제2기적 작품과는 다소 간극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53
이양씨의 「새로 찾아낸 것」(『조광』3월호), 조명희씨의 「동지」, 김영팔씨의 「어떤 광경」(『조광』3월호) - 조명희씨의 「한 여름밤」(『조광』5월호), 한설야씨의 「그 전후」(『조광』5월호), 이기영씨의 「민며느리」(『조광』6월호), 이양씨의 「고진동」(『조광』6월호), 조명희씨의 「낙동강」(『조광』7월호), 김영팔씨의 「사직단」, 한설야씨의 「뒷 걸음질」(『조광』8월호), 이양씨의 「또 어디로 가오」(『조광』10월호) 등이 발표되었으나 별반 진전을 보여주지 못한 것은 유감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작품에 . 있어서 제2기로의 질적 전환을 못하였고 또한 도약을 못하였다. 그래서 완전한 제2기의 작품이 발표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지광』10월호에 기재된 이기영씨의 「해후」만은 목적의식기를 과정하게 되는 작품행동이라고 인증할 수 있다. 그렇다고 방향전환기의 작품행동이란 의미는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현단계가 정히 요구하는 작품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54
이상에 지적한 것을 종합하여 본다면 작품에 있어서는 완전한 제2기의 작품이 없었고 작가에 있어서는 최서해씨의 노력이 부족하였다. 과거 일 년간에 최씨의 작품이 신년 이후에 한개도 더 볼 수 없었는데 비하여 이기영씨와 조명희씨의 작품 행동은 문예운동진전 상 많은 도움이 되었다. 김영팔씨, 한설야씨, 이양씨의 작품 행동도 문예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아니 볼 수 없다. 이런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단계가 요구하는 작품을 얻어 볼 수 없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물론 조선이란 특수사정, 다시 말하면 객관적 정세는 우리가 요구하는 작품 행동을 감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면 신년부터는 감행할 수 있는가? 나는 이것을 보증할 수 없다.
 
 
 

4

 
56
시단으로 말하면 소설단에 비해 보더라도 얼마나 빈약하였는지 모르겠다. 시에 있어서 수확이라고는 그다지 많지 못하였다. 과거 일년 간에 이상화씨의 시를 얻어 볼 수 없었고, 김려수씨의 시로 말하면 다소 다다의 기분을 띄우고 나왔던 것은 사실이다.
 
57
김창술씨, 김해강씨의 시가 간혹 신문 지상에 발표되었으나 눈에 띠고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 중에도 김해강씨의 시는 우리 요구에 어그러지는 것이 많았다. 다시 말하면 계급적이 아니요 ----- 이 아니다. 시 속에서 움직이는 감정이 불순하여 계급적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에 반하여 김창술씨의 시는 다소 우리의 요구에 응하는 점이 있었다.
 
58
『조선일보』에 기재된 「지형을 뜨는 무리」같은 것은 가장 취할 만한 형식이요, 가장 귀를 기우릴 만한 내용이었다. 우리는 김창술씨에게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59
적구씨의 시를 한참 동안 볼 수 없더니, 근래에 『조선일보』지상에 기재된 것을 두세 개 발견하였다. 그러나 어느 곳인지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신년호부터는 많은 노력, 많은 활동으로 정히 우리가 요구하는 무산계급 시인이 되어 현 단계가 요구하는 프롤레타리아 시를 제작하여 주기를 바란다. 작품 행동에 있어서 일부분의 임무를 다하고자 함에 의식적으로 노력할 것을 믿는다.
 
60
『예술운동』창간호에 기재된 임화씨의 「담 - 1927년」, 홍양명 씨의 「붉은 처녀지에 드리는 송가」등은 얼마나 힘 있고 열이 있고 표현 형식이 새로운 시였던가? 나는 같은 진영 내에 이러한 동지를 가진 것을 자랑한다. 또한 이러한 동지가 수없이 나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61
「×××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와 같은 시를 발표한 이상화씨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래 한번 영탄만 하고 말 것인가? 아니다. 영탄만으로 현실이 고쳐지지 않는다. 우리는 앞으로 이씨의 의식적 활동을 기다린다. 신년부터는 이상화씨, 김려수씨, 류적구씨, 임화씨, 홍양명씨, 김창술씨 등의 전에 없는 노력이 있기를 바란다. 아니 반드시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금년 일년 동안은 새로 나오는 시인과 함께 조선의 무산계급 시단을 움직여 나가기를 바란다.
 
 
62
기타 행동에 대해서는 조직적 형태를 띠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의 행동을 검토할 수 밖에 없다.
 
63
一, 신간회지지
 
64
一, 사회단체 중앙협의회에 참가
 
65
一, 방향전환
 
66
一, 교육 주간 반대
 
67
一, ----------------- 가맹(동경지부)
 
68
一, ----------------- (동경지부)
 
69
一,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 기관지 발행(동경지부)
 
70
一, 일본 프로 예술동맹과 유기적 관계
 
71
이와 같은 일체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산계급 예술운동이 작품 행동에만 국한치 않고 전체성적 운동에 ------ 하게 되었던 것이다. 현단계가 이와 같은 의식적 행동을 예술운동 영역에 요구하게 되었고 예술가로서의 이와 같은 행동을 감행하게 하였다. 여기에 금년 운동은 신전개를 보여주리라고 확언한다. 작품 행동이 감행되지 못하면 못할수록 기타 행동으로의 ----- 볼 것이다.
 
72
1928년!
 
73
우리는 금년 일년 동안을 어떻게 지낼까? 동지여 우리는 유의에 유의를 거듭하여 조선의 무산계급 예술운동을 ----------------------- 이곳에 우리의 임무가 있고 전체성적 부분운동인 문예운동을 운동답게 진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 1928년인 신년벽두를 당하여 1927년 과거 일년에 전개된 무산계급 문예운동을 회고하였다. 그러나 나의 근본 의도는 회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회고하는 가운데 좋은 것만은 취하고 낮은 것만을 버리어 신년 운동에 한 도움이 되려고 하였다. 하나 근본 의도를 그대로 수행했는지도 모르고 논의한다는 것도 구체적으로 되지 못하였다. 또한 마음에 아닌 오류를 범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점에 대해서는 여러 동지의 양해를 빈다.
 
74
1927. 11. 28
 
 
75
『조선지광』1928년 1월
【원문】1927년 문단의 총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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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기정(尹基鼎)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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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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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평론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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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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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 : 2023년 09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