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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선사시대라고 하는 것은 이집트 역사시대의 시초를 서력(西曆) 기원전(이하 부터는 B.C라고 기호 함) 4천년으로 정하고 그 이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물론 유사 이전이라는 시대에 무엇이나 창시(創始)또는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하나 편의상 지질학에서 말하는 제 서기의 시초로써 경역을 정하고 이로부터 B.C 4천년 간을 전후 2기로 나누어 전기를 소위 빙하기라 칭하고 후기를 빙하기 이후의 B.C 4천년까지로 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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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시대에는 북미·구주·아세아의 북부에는 대부분이 두터운 얼음에 덮이어서 극지의 호한(沍寒)을 나타내었습니다. 물론 한 입으로 빙하시대라고 말할지라도 그것은 긴 연대를 가지었음으로 그 사이에 한결같이 빙한이 발호(䟦扈)하였을 리는 없습니다. 한서(寒暑)가 서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혹한의 시기를 가리켜서 상술을 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라 할지라도 구주 중원에서 극지성의 동물과 열대성의 동물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비록 오늘날에는 절종(絶種)이 된 동물이나 「맘모스」 같은 것이 번성하였다 하면 그때의 기후를 짐작 할 수 있을 줄 압니다. 그러하나 어쨌든 지금으로 부터는 참으로 유원(悠遠)한 태고시대였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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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구주에서 서식하던 인류는 고고학자의 이른바 석기시대의 문명을 가졌습니다. 즉 그들은 발화(發火)의 술(術)을 알았고 또한 그것을 이용할 줄 알았으며 석·목·골(骨)·각(角) 등으로 조잡하나마 기구를 만들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농경이라든가 목축에 대한 지식 같은 것은 아직 갖지 못하고 천연의 과실과 수렵 등을 유일한 생활 자료로 삼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문화가 전 빙하시대를 통하여 한 모양대로 계속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겨우 기구 같은 것을 만들기 시작한 원시 상태로부터 구석기 문명권 내에서 가장 진보된 문명을 가지기까지에는 그 서완(徐緩)한 발달이 긴 시일을 두고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학자들은 유물상으로 보아서 그 과정을 편의상 수 개의 계단을 정하고 각 계단을 대표할 만한 도로의 토지명(土地名)으로 그 계단의 이름을 붙여 놓았습니다. 즉 세리안·아슐리안·무스테리안·오리냐시안·솔루트레안·막다레니안의 6개 계단인데 제1의 세리안급의 유물은 가공의 정도가 극히 경미하여 겨우 몇 개의 점(點)으로써 인류의 유기(遺器)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 석기인데 그 시대로 말하면 빙하기의 시초기 경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막다레니안급은 구석기시대 중에서 가장 진화한 계단의 시기를 이름한 것이니 즉 빙하기의 최종에 속한 것입니다. 대개 이와 같은 명칭은 그 시대의 유물에 나타난 가공의 정조교출(精組巧出)의 계단을 지칭한 것이나 동시에 각 계단에 나타난 문화 상태를 암시하는 한편으로 시대의 전후를 구분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것은 빙하기 내의 소시기(小時期)라고도 명칭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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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소시기 안에서 예술사 내지 회화사에 관련되는 것은 주로 오리냐시안 이후의 3시대이니 그 중에서도 가장 사생적(寫生的) 기교가 진보된 시대는 최종의 막다레니안급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는 순록(馴鹿)이 가장 번성한 대표적 동물이었던 점으로 보아서 이 원시 예술을 순록시대 혹은 순록엽자(馴鹿獵者)의 예술이라고도 명칭합니다. 그리고 문화상의 정도로 보아서 구석시대의 예술이라고도 지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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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원시적 예술의 유물은 구주 어느 지방에서 발견하였느냐 하면 주로 남부 불란서 및 서반아, 취중(就中)에도 피레니스 산맥의 양측 지방에서 고명한 유조물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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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유품을 시대적으로 검핵(檢覈)하여보면 소리유데리안시대로 부터 고지층에서는 거진 다 입체적 조각품만이 발견되었습니다. 물론 누각(鏤刻)한 도화(圖畵)도 절무(絶無)한 것은 아니요, 또 오리냐시안시대의 것도 있으나 극히 희묘할 뿐만 아니라 그 기교도 소아의 그것과 별로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솔루트레안 이후의 것은 점차 입체 조각이 감소하여 가지고 편평한 일종의 부조(浮彫)가 증가하였으며 훨씬 후시대에 이르러서는 부조조차 없어지고 회화 즉 누조화(鏤彫畵)와 벽화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생적 기교로 말할지라도 그 시대 그 문화에 비하여서는 경탄할만한 발달을 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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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사실에 비춰보면 첫째로 소위 순록시대의 사생적 회화도 이것이 결코 혜성(彗星) 모양으로 일시에 표현된 것이 아니요, 구석기문명이 제법 진보된 때였다고는 하지만 그 시일로 보면 극히 오래전부터 그 맹아(萌芽)가 발생하여 지완(遲緩)한 진보를 퇴적(堆積)한 결과 막다레니안 시대의 우월한 기교를 산출하게 된 것이 판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제2로는 처음에는 조각이 우수하고 회화는 극히 미미하던 것이 나중에는 도리어 회화가 조각을 압도하게 된 이 사실을 우리가 의미 깊이 고려해볼 가치가 그 속에 숨어 있습니다. 회화적 유물은 이것을 종류상으로 관찰하면 첫째 대작이라고 할 만한 것은 동굴의 벽화입니다. 그 제작한 방법은 대개가 윤곽만은 근조(筋彫)를 하고서 그 위에다 색채를 가한 것입니다. 그리고 소품으로서는 동물의 골편(骨片), 순록의 원각(圓角), 맘모스의 백아(白牙), 암석, 석탄석 등에다 누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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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재는 물론 동물을 주로한 중에도 수류(獸類)를 가장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수류는 거의 전부를 망라하였다 할지라도 과언이 아닐 만치 수류를 그 제재로 가장 많이 취급하였습니다. 이 가운데에서도 순록, 야견(野犬), 대록(大鹿), 마(馬) 등속이 제일 많습니다. 그리고 또 맘모스, 사향우(麝香牛) 같은 진기한 물건도 흔히 제재로 삼은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漁), 조(鳥), 충류(蟲類)도 묘사한 것이 있기는 있으나 이것은 수류에 비하여 극히 희소하였습니다. 식물에 있어서는 더욱이 희소하여 아주 절무(絶無)에 이르지는 아니하였으나 참고할 만한 재료도 충분히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간혹 있는 것도 한갓 모양식(模樣式)으로 되어 있을 뿐입니다. 기타에도 근봉(根棒)같은 것, 가옥(원시형) 같은 것 등의 의미가 불선명한 것이 혹 묘사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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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동물화에는 단순한 정지상태보다도 활동 활약하는 현상 즉 화살을 맞고 달아나는 순록이라든지 추격을 면하기 위하여 부러진 다리를 절면서 쫓기어가는 대록 같은 극적인 것을 주로 하였으나, 흔히 이와 같은 동물은 단일 개체만으로 주제를 삼고 그 배경으로써 이것을 표현하든가 또는 동물과 동물 사이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복잡한 관계를 그린다든가 한 것은 극히 적습니다. 간혹 ▣마를 인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든지 대록이 모록(牡鹿)을 쫓아가는 것 같은 장면을 묘사한 것 등 기타 이것과 유사한 것을 그리어 놓은 것이 다소 있기는 있으나 그 집단체를 지배하는 관계는 극히 단순한 데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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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통일적 관계마다 이것을 표시한 실례는 간혹 골편이나 석편 같은 데에 그려진 소 누각화에나 얻어 볼 수 있을 뿐이요 벽화와 같은 대면적을 가진 물건에는 도리어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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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벽화 같은 데에는 무수한 동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단일한 동물 표본도 모양으로 함부로 공지를 채우기 위하여 그려놓았을 뿐이요 그 사이에는 하등의 연락도 없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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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소위 화포(畵布)가 반석 같은 것인 이상에야 그 구도에 대하여는 따로 말할 제재가 심히 적습니다. 그러나 그 나타난 실례만을 가지고 볼지라도 표현된 관계가 극히 단순하니만치 구도도 또한 단순하고도 또 자연적이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무엇인지 모르나 혹 특수한 의미를 붙여서 된 것 같은 것도 있으나 관계가 좀 복잡하게 되면 원시인의 자연관찰로는 그것에 응할 만한 기초를 갖지 못한 까닭에 구도는 전적으로 주관적이요 또 상징적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 작자의 단순한 주관에 의하여 좌우된 것이니만큼 오늘날 우리로서는 그 의미를 촌도(忖度)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통일이라든가 관계 같은 것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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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회화의 구도라는 것은 그 내용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 형식미에 있어서도 중요한 관찰 방법을 요하는 것이나 순록시대(馴鹿時代) 회화의 구도는 그 대체가 구도적 의도를 잃은 순간적, 충동적, 사실적 구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술한 것과 같은 점으로라든지 기타 여러 가지 점으로 보아서 작자의 주관적 활동을 허용할 수 있는 일면이 있습니다. 화면에서 폭로(曝露)한 형식미에 대한 그네들의 감각은 ‘병렬주의’와 ‘공극(空隙)의 공포’로 전자는 자의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화면의 공지가 있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간극 없이 물상을 그리어 채운다는 것을 의미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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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것은 형식미로 보아서는 초등정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하겠지만 그네들이 화면 관계에 대하여 전혀 무경착(無頃着)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실입니다. 물론 균제의 미도 다소 알지 못한 것은 아니겠지만 사실 본위인 그네들의 회화에서는 표현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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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개체에 대한 그네들의 묘사의 능력을 검사하여 보면 동물화에는 가장 득의인 것 같으면서도 인물화에는 치졸(穉拙)을 면하지 못하여 마침내 동물화 같은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문화가 저급한 민족의 회화에는 일반적으로 인물화가 저열한 것은 우리네의 주의할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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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 원시인의 동물에 대한 관찰과 그 표현 기교는 실로 예상 이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제재에 대하여 서술한 바와 같이 제종(諸種)의 동물은 이것을 명료히 판지(辦知)할 수 있을 만큼 그 특징을 잘 포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활약의 상태와 어느 정도까지의 표정에 대하여는 실로 가▣할 기교를 발휘한 곳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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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는 물론 화필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묘사 수단은 각선(刻線)을 주로하고 그 중에도 벽화 같은 데에는 황토, 백흑, 골탄, 목탄 등의 천연 회구(繪具)가 이용되었습니다. 각선은 윤곽에만 사용하고 색조의 농담은 이 천연 회구로써 표현하였으나 색채가 물형을 설명하기에는 겨우 대체의 원미(圓味)를 나타내는데 그쳤을 뿐이요 기실은 회화라고 볼 수밖에는 없게 되었으나 선화(線畵)로서는 고급적 사실표현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 윤곽의 곡선 같은 것은 소위 주관적 형식화를 벗어나서 정확한 선의 미를 보인 곳이 많습니다. 도저히 이와 같은 것은 소아나 보통 미개인의 그림과 동일시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늘날 전문가로 하여금 탄상(嘆賞)할 만한 가치를 가진 것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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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는 동물의 고유색에 상사(相似)한 천연색을 사용하였을는지도 모르나 그보다도 대체의 윤곽과 부분의 구획을 명료히 하기 위하여 사용된 듯한 점이 많이 보입니다. 물론 색채에 대한 환희를 가지고 사용한 일면도 없지 않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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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약술로써 소위 순록시대(馴鹿時代)의 회화에 대한 개념만은 우리는 얻을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그 원인 결과에 대한 제종의 문제를 아니 일으킬 수 없습니다. 즉, (제1) 이와 같은 저급한 문화를 가진 인류에게서 이와 같은 예술의 발생이 당연한 것인가? 혹은 특별한 원인이 있는 것인가? (제2)다른 문화 상태에 비하여 가경(可驚)할 만큼 사실적 기교가 발달된 것은 어떠한 특수적 이유가 있는 것인가? (제3) 제재에 있어서 특히 동물을 많이 사용하고 또 인물보다도 동물이 훨씬 우수하게 묘사된 사실은 어떠한 관계인가? 이와 같은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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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서는 제한된 지면에서 충분히 논의할 수 없는 것은 실로 유감입니다. 그러나 다음 기회도 있을 것임으로 여기에서는 그 대략만을 우선 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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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에 대하여서는 동서 학자들의 저급 민족 연구의 결과 그들의 문화가 극히 원시적이면서도 회화와 조각이 발생하게 된 그 사실을 제시하였으니 그 발생 동기를 대략 두 개로 분하여 기일(其一)은 종교적 동기설 기이(其二)는 소한적(消閑的) 동기설입니다. 전자는 금주적(禁呪的) 목적을 가진 공리적 동기설이요, 후자는 어떠한 목적이 없이 다만 유희적 태도에서 된 즉 본능적 동기설입니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는 양자를 혼동시하는 것이 공평하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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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에 대하여서는 크롯세가 가장 재미있게 또 적절하게 해석을 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사실적 발달은 그 관찰의 정세(精細)와 수술의 연숙(鍊熟)에 있는 것이니 수렵생활을 하는 종민(種民)은 자연적으로 차등 조건을 구비하게 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즉 엽자(獵者)는 그 엽물(獵物)에 대하여 필연적으로 예리한 관찰을 갖게 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 활약 치주(馳走)하는 동물을 수렵하자면 불가불 정예(精銳)한 엽구를 선택하지 않으면 아니될지니, 이러한 관계에서 그 관조력과 기교술이 발달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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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동물의 제재가 많은 것은 그들의 생활 전부가 이 동물에 의하여 되는 것이니 그림으로 그네들이 묘사한 동물을 보면 대개가 그네들의 생활과 깊은 교섭이 있는 것입니다. 즉 그 예를 들면 순록 같은 것은 가장 그네들의 일상생활의 의식료품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더 밀접한 교섭이 있는 동포 즉, 인물에 대하여 그 묘사가 동물보다 졸렬한 것은 우리가 우리 것과 마찬가지로 너무도 접촉이 잦은 만큼 새로운 감각을 얻지 못하며 따라서 연마의 수술이 부족한 원인이라고도 하겠지만 이 시대뿐만 아니라 인물보다 동물이 우수한 것은 고대 민족의 대부분의 공통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석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여기에서는 이것으로 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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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타레니스시대 이후의 구주는 기후라든지 동식물이 모두 오늘날과 비슷한 상태였으니 이것이 곧 차기의 개막입니다. 빙하시대의 종말이 이로부터 몇 해 전이었는가는 사도(斯道)의 전문학자들도 확언을 주저하는 바거니와 대략 최단 시대를 일만삼, 사천년이라 하니까 즉 선사후기라는 것은 B.C 1만년 2, 3 천년으로부터 동 4천년 간을 의미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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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간의 구주 급(及) 부근의 문화는 신석기시대에 속하게 되는 것이니 즉 차기에 이르러서 비로소 인류는 야수를 가축 삼으며 식용 곡류는 경작하여 포백(布帛)의 재료를 공급하는 식물을 재배하며 토기를 소성(燒成)하는 등 여러 가지를 발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건축의 맹아와 사자(死者)를 어떠한 종교적 형식에 의하여 매장할 줄을 알게 된 것도 차기에서 비롯하였습니다. 기구 같은 것도 꽤 발달이 되었으며 무기로는 궁전(弓箭)이 일반적인 것이 되고 석기에도 연마성형의 법을 안 까닭에 수석(燧石)과 석영암(石英岩) 밖에 경석(硬石)을 취택(取擇)하게 되었으며 그 형식도 여러 가지가 있으나 대개는 나무자루를 붙이어서 사용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 이 만치 이 시대의 문화는 구석기시대에 비하여 장족의 진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석기 문명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종종(種種)의 정도가 있는 것이니 즉 연대와 토지의 차이에 의하여 그 발달 계단도 각각 다르니 만큼 또한 이것을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올시다. 이 기간에 문화가 현저히 진보한 곳은 양하(兩河) 지방(Mesopotamia)(하간(河間)의 지대를 의미한 것이나 편의상 이것을 양하 지방이라 명칭 함)과 이집트 문화의 중심으로 서부 아세아 및 북부아프리카 지방이니 이 기말(期末) 즉 B.C 4천년 경에 이르러서는 이미 금속시대에까지 들어갔으므로 이 지방만은 신석기문화의 연속기간이라 일컫는 선사후기와는 개략(槪略) 일치한 보조를 보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음 시대로부터 기록을 오늘날까지 끼쳐준 점으로 봐서 차기를 진실한 의미의 선사시대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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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는 이렇지 못하였습니다. 즉 B.C 4천년 후에도 신석기 정도의 문화가 긴 시간을 두고 계속하였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역사 시대에 까지 이르기는 훨씬 뒤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신석기 문화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역시 양하 지방과 이집트 변방에 비하여서는 그 정도가 몇 층이나 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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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하 지방의 하류에는 이 시대의 어느 때쯤 온 것인지 혹은 전 시대부터 있었던 것인지 그것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수메르’ 라는 인종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거주하였는데 그 인상도 골격도 완전히 동양계에 속하는 인종으로 세계 최고의 고등 문명을 창시하였다 합니다. 즉 그들은 경지와 도시를 만들어 놓았고 금은동철 등을 분석 하야(鍜冶)하는 지식과 기술을 가졌으며 연와(練瓦)의 건축을 만들고 정원 같은 것도 꿈인 줄 알았으며 실내에는 침대와 의자까지 두었다 합니다. 더욱이 여기에 특필하여 둘 것은 이 인종이 개벽 이후의 최초 문자 발명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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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대의 벽두에 출현한 고 ‘바빌론’ 의 문화는 ‘수메르’ 문화를 기초로 하고 그 위에다 ‘세미트’ 족이 건조한 것이니 저 계형문자는 실로 ‘수메르’ 문자를 양식화한 것입니다. 본래 회화적이었던 상형문자가 점점 그 본질을 잃고 나중에는 전혀 부호적인 설형문자(楔形文字)에까지 변화가 된 저간(這間)의 시일을 고찰하든지 또는 고 ‘바빌로니아’인인 ‘세미트’ 는 원래 침입자 임에도 불구하고 본토종으로 간주하게 되리만치 양하 지방에 오래적 부터 와서 거주하게 되었으니 그때에 벌써 ‘수메르’ 의 문명은 고도로 발달이 되었던 것을 생각하여보면 ‘수메르’ 문화의 기원이 얼마나 태고적 부터였는지를 상상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다가 선사 후기 말에 와서는 벌써 ‘수메르’ 문화는 파멸이 되고 그 폐허에는 ‘세미트’ 족의 세력과 요소가 현저히 되었습니다. 구약성서에 있는 ‘에덴’ 의 낙원, 최후의 인간 ‘아담’ 기타 홍수 등의 전설은 ‘수메르’의 전설이 고‘바빌론’ 의 ‘수메르’ 족을 통하여 전하여 온 것이니, 그 한 예를 들면 ‘에덴’ 이란 말은 평원을 의미한 ‘수메르’ 어의 ‘에덴’ 으로 ‘바빌로니아’의 평원을 지시하는 데에 쓰던 말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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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시대의 예술적 유물이라고는 별로 특기할 것이 없습니다. 회화에 유속(類屬)할 것이라고는 겨우 도기와 원통형 인형(印形)등의 도안이 있을 뿐입니다. 도기의 도안은 대개가 모양이나 동식물의 표현도 다소는 있습니다. 즉 그 모양에는 순수한 기하 모양도 있고 사생미를 띤 것도 있습니다. 기하 모양에는 대상(帶狀), 방형(方形) 등의 구획 중에 반복파상형(反覆波狀形), 원형반원, 보주형(寶珠形), 어골(魚骨) 모양을 그린 것이 많이 있고, 사생적인 모양에는 영양(羚羊), 인간, 빈우(牝牛)의 수(首)등이 원형을 상상하기 어려울 만치 추상적으로 양식화된 것입니다. 이 종류 중에서 특히 주의하여 볼 것은 타조의 열(列)을 모양화한 것인데, 이집트의 선사시대 도기에도 이와 거진 같은 형식의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동식물의 표현도 역시 모양에 유사한 것으로 사생으로는 극히 원시적입니다. 대체가 영회풍(影繪風)으로 되어서 그 윤곽 같은 것도 심히 형식화되어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인물 같은 것도 두부는 조류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등변 삼각형으로 묘사를 하고 사지도 이에 준거하여 주관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동물은 비교적 인물보다는 사실적이면서도 역시 경화(硬化)의 도(度)가 강한 데에 기울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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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고고학적 유물이라는 것은 그 연대를 확정하기는 사실상 곤란한 일입니다. 그러나 전기의 유물은 대체로 이 기간 내의 비교적 고유품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에 말하려하는 원통형 인형의 유물은 과연 차기에 속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결정적으로 설명할 수 없으나 회화와 유사한 유물로 도기의 도양(圖樣)보다는 일층 적절한 것임으로 이것을 선사 후기 말이나 차대 초기에 속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점에 대하여 잠깐 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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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형 인형은 원통의 곡면에 부조(浮彫)를 한 후 이것으로 연유(軟柔)한 점토판상을 압인하면 인화(印畵)가 토판에 재현되는 것인데 이것은 고대 양하 지방의 특유한 것입니다. 그 인면의 도양은 대개가 동식물의 장식적 배열이요 간혹 부분적으로는 문자도 삽입되어 있습니다. 구도는 병렬주의와 균제와 ‘공극의 공포’ 등을 보여주는 것과 같은 원시적 간명(簡明)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병렬주의에는 조반법(繰返法)을 응용한 모양이 많이 있으며 그렇지 않은 곳에는 무엇인지 모르게 개개 물체간의 관계를 암시하려고 노력한 점이 보이며 특히 균제에 있어서는 소위 문장적(紋章的) 상대법을 인용함 등이 작자의 형식미에 대한 의식적 활동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으리만치 결코 야만의 예술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개개의 물체를 사생적 견지로 볼 때는 물론 기교상 약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시 인물보다는 동물의 편이 우수한 것은 원시인의 통례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당초부터 장식적으로 계획된 것이니만치 그 편으로 견지를 바꿔 관찰할 때에는 대담한 표현에 경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기발한 공상적 면물(勉物)을 조출(造出)한 것도 흥미있거니와 비교적 사실미를 가진 것도 부분 부분이 특색을 비(備)하여 장식적 표현으로는 흥미가 실로 많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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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구주 원시인이 ‘세리안’정도의 문화를 가졌을 때에 이집트지방에서 소시대 동정도(同程度)의 문화를 가지었습니다. 그러나 구주의 구석기 시대는 이것을 수 개의 소시대별로 지어서 설명을 하여도 가하리 만치 그 발달의 계단이 ▣수하나 이집트 지방은 그 지세와 인종적 관계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발달이 극히 지완(遲緩)하였으며 자연적이었기 때문에 구주의 고고학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구석기 신석기 시대를 획별(劃別)할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석기 시대와 금속 시대와의 구별까지도 명료한 한계를 세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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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보자적(保字的)이요 급극(急劇)한 변화가 없는 것만은 역사시대에 이르러서도 시종이 일관하였으니 이것은 이집트의 특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대체상으로 보아서 선사 후기의 이집트는 신석기 시대의 이집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석기 시대의 이집트인 나일하(河)보다도 사막에 접근한 고원 같은 곳에서 살면서 수렵으로 생활 비료를 구하였으나 차기에 들어와서는 생활을 농(農)에서 구한 까닭에 점점 하안(河岸)의 침전층(沈澱層)을 찾아 들게 되어서 필경은 신석기 시대에서 가장 진보된 문화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옥한 하류인 ‘델타’ 지방이 제일 발전되었습니다. 도기의 형식과 종류의 수효라든지 찬석(燦石)의 세공 같은 것을 보아서 그들의 물적 문화가 상당히 발전되었던 것만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소부락을 이루어 생활하며 부락마다 각각 숭배하는 동물을 가지고 독립하였습니다. 원래 이 민족은 온화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으나 사회 발달의 자연적 현상의 하나로 차차 부락의 정복과 병합이 시작되어 차기 말에 이르러서는 매(鷹)를 숭배하는 ‘홀스’ 라 하는 부락과 호(狐)와 같은 기괴(奇怪)한 동물을 초식하는 북방의 ‘스의트’ 라는 부락은 ‘델타’ 지방의 제부락을 통일하여 여기에 비롯 오 남북의 2대 왕국이 형성되었습니다. 이것이 다음 역사 시대에 이르러 이집트 전체를 통일할 대왕국의 출현을 준비하는 한 개의 계단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니 그 통일자는 ‘홀스’ 족에서 나왔습니다. 즉 남방 왕국이 북방 왕국을 통일한 것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홀스’ 족은 ‘나일’ 동안(東岸)을 횡절(橫切)하고 이집트에 침(侵)한 외래의 종족으로 금속의 하야술(鍜冶術)을 안 까닭에 정예(精銳)한 무기를 가졌으며 따라서 신석기 민족이 정복을 당한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이 민족이 세력을 가지고 이집트를 통일하였을 때부터 연와의 건축과 문자의 사용이며 원통형 인형 등이 이집트에서는 제작되었으니 이 ‘홀스’ 족이라는 것은 대개 양하 지방의 문화를 학득(學得)한 원래 ‘세미트’ 족이라고 학자들은 추찰(推察)합니다. 어쨌든 연와와 인형 등은 양하 지방이 본원지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여기에 만일 여러 가지의 이유로 부터 상상의 유혹을 허(許)한다면 양하 지방 문화의 이집트에 대한 영향은 이미 오래전 부터 있었던 것으로 이집트 통일 직전에 이르러서 이것이 더욱 현저하였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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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此期)의 회화적 유물로는 역시 도기의 도안을 주립(主立)한 아재(牙材)의 부조와 소위 석판 ‘파레트’ 등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 밖에도 수석(燧石)으로 만든 소도(小刀)의 자루에 감은 엷은 황금판 위에 아로 새긴 모조(毛彫)라든지 분묘의 벽화 등이 있으나 이것은 역사 시대에 접근한 것입니다. 도기의 최고한 것은 붉은 바탕에다 희게 표현한 것으로 인물 동물 기타 직선적 표양 등이 있는데, 그 중에 두 개의 인물이 서로 투쟁하는 것을 묘사한 것 같은 것은 진기한 것입니다. 아마 이것은 전쟁화의 최고의 실례가 될 것입니다. 이 시대로부터 훨씬 떨어져서 소위 제2 선사시대에 이르러서는 피부색 바탕에다가 적색으로 그려진 도기가 있습니다. 이것 에는 배(舟), 인물, 동물, 식물, 파상평행선(波狀平行線), S자형 모양, ‘스파이랄’(旋渦) 등이 그려지고 또 망목세공(網目細工)같은 것을 모(模)한 듯한 것도 있습니다. 배와 인물 동물 같은 것은 대개 무슨 광경을 의미한 것 같이 취급되어 있으며 파상평행선은 물을 상징한 것인 듯합니다. 동물은 영양, 타조 등을 주로 하였는데 특히 타조의 예는 양하지방의 도기와 혹사(酷似)한 점에서 주의할 가치가 있습니다. 대체로 이 도기는 양하지방의 것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다만 스파이랄만이 양하 지방에서 아직껏 보지 못하던 것입니다. 분묘의 벽화라는 것은 헤라콘포리스라는 곳에 있는 것인데 그 도양(圖樣)은 대체가 상기한 도기의 것과 같이 일반 인물, 영양 등을 취재로 하였습니다. 아조(牙彫)와 석판 파렛트는 출처는 불명하나 고졸(古拙)한 기풍으로 기린, 녹(鹿), 견(犬) 등이 표현 되어 있습니다. 황금박판의 모조라는 것은 사자, 영양, 산양, 사(蛇), 기타 식물 등을 배치하여 장식적 도양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밖의 동물로는 상(象), 하마 같은 것도 흔히 그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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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위와 같은 작품은 그 성질상 물론 장식본위의 것입니다. 구도 중에 어떠한 의미를 암시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 관계는 단순하고 또 표현도 유치(幼穉)하였습니다. 따라서 사실적 방면에 있어서도 불만한 점이 적지 않습니다. 즉 예를 들면 배(舟) 같은 것도 사실 배를 그린 것인지 촌락의 외벽을 원경으로 그린 것인지 관자(觀者)에 의하여 종종 판단이 다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배로 보는 사람이 많은 모양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인물보다는 동물편이 역시 그 특색을 잘 포착한 점으로 보아서 우수한 것은 전에도 말한 바 당초부터 장식적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서 취급한 것은 원시 회화의 특색입니다. 그 중에도 백회(白繪) 도기에 표현된 동물 같은 것은 순전한 모양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인물의 묘사는 다 같다는 것은 아니로되 대개가 부호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머리는 점으로 구간(軀幹)은 도형(倒形) 삼각형으로 4지는 선으로써 단순 이상의 단순한 정도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적절한 실례는 백회 도기에 그려진 2인의 전투도(戰鬪圖)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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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적 견지로부터 관찰하면 병행반복, 균제, ‘공극의 공포’ 등이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평등 균형의 구도 같은 것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2인 투쟁의 구도는 그 일례입니다. 균제로는 2개의 동물을 대립시키든가 혹은 장사형(長蛇形)으로 좌우의 곡선을 대등하게 만들어 놓고 그 중간의 원형적 공극(空隙)을 과실이나 화초 같은 것으로 보충하는 등의 방법을 흔히 사용하였습니다. 개개 물체의 묘사, 특히 동물 묘사에 표현된 장식적 표현은 전체의 윤곽도 그러하거니와 관절렵(關節鬣) 각옥(角屋)등의 모든 특징 있는 부분을 대담히 장식화한 점에 있어서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같은 것도 양하지방과 근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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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하지방과 이집트는 차기에 이르러서 문화적 정도가 장족으로 진보하였음에 반하여 구석기시대에 그와 같이 사실적 예술을 창작하던 구주방면의 문화는 차기에 와서는 심히 침체하였습니다. 이 지방은 신석기 시대는 지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대개 B.C 2백년 경까지 계속된 것으로 선사 후기의 말경에 이르러서는 점차 호상주거(湖上住居)가 유행하여 현재의 니우키니아 토인들 모양으로 수중에다 상다리를 매고 그 위에다 조잡한 주택을 어리하고 거주한 것이니 스위스와 불란서 등지의 호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고고학자들은 말합니다. 불란서 브르따뉴에 있는 열립(列立)한 거석과 환상거석군(Oromleck), 직립거석(Menhir), 거석탁(Dolmen) 등과 같은 거석의 구조는 그 후 시대에 속한 것으로 이 지방에 있어서 차기의 예술적 유물로는 볼 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도기 같은 것은 물론 있으나 극히 조잡한 장식도 없는 것뿐이니 단순한 기하모양과 승목모양(繩目模樣) 같은 것도 후 시대의 것으로 간주되며 또 단순 치졸한 석조로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인정될 만한 것도 간혹 있으나 이것도 역시 거석 구조물과 같이 후 시대에 속한 것입니다. 선사 후기에 대하여서는 말을 너무 길게 한듯 하므로 이로부터는 가급적 간단히 쓰려하거니와 차기에 대하여 우리가 특히 주목할 사실은 일반적 문화의 진보를 따라 그 일상 생활상태가 전기보다 훨씬 풍족함에도 불구하고 예술적 활동이 침체 부진한 것입니다. 그 유품을 관찰할지라도 독립적으로 완성된 예술적 작품은 전혀 없고 대개 소공예품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유품이나마 소위 그 예술적 성질을 검찰하여 보면 전부가 주관적, 특히 장식적인 것뿐으로 양하 지방과 이집트 등지에서는 인물, 동물 등을 제재로한 것이 있으나 그것조차 표현은 주관적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위에도 말하였거니와 전기 시대에 우수한 사실적 작품을 창작하던 구주 지방에서 전혀 사생적 유품을 발견할 수 없는 이것만은 특별히 우리가 주의할 사실입니다. 이 이유에 대하여서는 다음과 같이 상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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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이 시기에 들어오자 전대의 수렵생활을 버리고 농업, 목축의 생활을 비롯하였습니다. 이 생활은 전대의 동물적 생활과 닮아서 일상 활동이 실생활로 인하여 분망하여졌습니다. 따라서 소한적(消閑的) 작품을 많이 만들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공리적인 것이라도 될 수 있는 한에서는 간편을 위주로한 고로 제작상 노력을 가급적으로 생략하는 경향이 현저한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독립한 예술품 감소의 이유도 될 것이요 사생적 작품 부진의 이유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적 예술이 감소하는 원인에 대하여는 더 한가지 부대적으로 고찰하여 볼 조건이 있으니 그것은 즉 수렵생활의 민족은 자연적으로 사생적 능력이 발달된다. 그 원인은 전회에 이미 말한 바와 같거니와 이 시기에 와서 생활 상태가 변화함에 따라 그 원인은 소멸되고 말 것이니, 사생 능력이 쇠퇴한 이상 그 제작 동기가 또한 엄밀한 사실을 요구하지 않을 것은 물론입니다. 따라서 그 작품은 상징적 혹은 모양적인 것으로 되고 말 것도 추단하기 어렵지 않은 자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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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모양에는 구조적 기원과 사생적 기원의 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최초에는 사실적이던 것도 무의식적 기교에 의하여 누차 반복되면 필경은 원형과 판이한 모양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원이 구조적인 것이든 사생적인 것이든 그 결과에 이르러서는 전자 후자를 판별하기 곤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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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 지방의 전기 예술과 차기 예술의 그 경향과 정도상 차이를 대비하여 민족의 전환, 기후의 격변으로 인한 인류의 감소 등의 이유를 들어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반드시 이와 같은 「가다스트로 ― 후」를 상상하지 않더라도 상술한 이유에 의하여 충분히 이 현상은 설명될 줄로 믿습니다. 문화가 진보한다고 반드시 사생적 예술이 발달 또는 번성한다고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예술의 발생은 그 문화의 발달을 전제로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문화적 상태 여하에 의하여 또한 일치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문화정도에 의한 예술적 상태가 그 보다 저급한 문화의 그것보다 반드시 우수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실례는 현재의 미개민족 사이에서도 넉넉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농업 목축의 생활은 수렵생활보다 문화적 정도가 우월하면서도 예술의 산출, 특히 사생적 예술의 발생에는 그 사회적 환경이 편의를 주지 못하니만치 전기의 그것보다 저열한 것은 우리로서 새삼스럽게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문화의 상태가 한 계단을 다시 넘어서게 될 때에는 예술의 진전도 다시 원기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니 이집트와 양하 지방의 예술이 장식적인 것이면서도 어느 정도까지 변화있는 사생적 제재가 그려진 것도 이것이 구주방면보다 수단(數段) 이상 사회적 상태가 진전됨에 따라 일반 민중의 생활적 여유적 능력이 풍부 또는 우승하였던 까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하부터는 역사시대에 속하겠음으로 이만 각필(擱筆)합니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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