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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3월호 단문란에 주요한 씨의 『우울』 중에 ‘고향에 갈 여비가 없는데 좀 힘써 봐 주어야겠소. 이것은 나의 전일(前日) 동료요, 시와 문도 능하고 사상운동에도 관계가 있는 친구의 말이다.’ 한 일절은 여(余)를 두고 하신 말씀인가 생각하매 다시금 어그러진 환경 마음 괴로이 눈앞에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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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富)가 반드시 자랑이 아닐 것과 마찬가지로 빈(貧)이 또한 수치일 것이 아니요, 그렇다고 자랑할 것은 물론 아니다. 자본가의 가정에 태어나지 아니하였으매 부(富)를 상속해 올 수 없는 것이요, 또 자본주의자적 심리를 소유하지 못하였으며 소위 자수성가란 격(格)으로 치부할 자격부터 없는 여(余)이라 『빈(貧)』 이것은 여의 운명의 반려라 할 수밖에 없는 오히려 귀여워야 할 한 존재요 또 소산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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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털어놓고 말이지. 누가 부를 싫어하며 빈을 낙(樂)할 사람이 있으랴. 비록 일인(一人)의 부는 만인(萬人)의 골혈(骨血)이라는 셈으로 남의 피와 땀을 착취하야 아(我)의 부를 축적할 그러한 부르주아적 심리는 갖지 못하였을망정 불의(不義)한 부와 귀(貴)는 어아(於我)에 여부운(如浮雲)이라는 결백한 지조로써 남이 넘겨주는 부를 거절할 심리는 갖지 않았다. 세상의 부를 다 준다 할지라도 사의(謝意)하지 않을 양심을 여(余)는 소유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것으로써 독락(獨樂)을 할 향락혼(享樂鬼)의 그것과 같은 야욕은 물론 안 가졌다. 그렇게만 된다면 유의유리(有義有利)하게 쓸 길이 오죽이나 많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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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빈이란 원인과 결과는 다 집어치우고 그 가운데 되는 한 토막만을 놓고만 볼지라도 참으로 인간 이외에서는 볼 수 없는 쓰라린 현상이요 존재인 것이다. 남에게 대한 인사치레이니 또 무엇이니 하는 말부터도 극빈자의 입으로는 하는 말이 아니다. 식(食)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死)이다. 이것만이 있을 뿐이다. 이 얼마나 두려운 사실이랴? 기천 기만 년의 역사를 가지고 이 땅덩이를 지배하여 온다는 소위 인간사회에는 전율할 사실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 아니 일취월장의 격으로 나날이 속도로 증진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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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 원인은 어디 있는가? 다윈철학이 말하는 바와 같이 ‘적자생존’ 철칙 하에서 소위 생물진화의 한 과정적 현상이라 할 것이냐? 빈에 쪼들리며 아사의 구렁텅이로 몰려 들어가는, 나날이 늘어가는 이 수많은 무리는 모두 생존경쟁 장리(場裡)에서 패배한 그야말로 열패자라 할 것이냐? 즉 이 사회에서 생존할 권리를 거부당한 부적자라 할것이냐? 다윈철학과 함께 그의 신봉자들은 그렇다 할 것이다. 부르주아 사상가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렇다 할 것이다. 우등열패와 약육강식의 원칙(?)을 설명하며 호언장언할 것이다. 얼마나 위대한 또는 철저한 그야말로 달관한 해석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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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강자의 힘이 참으로 강자 자신의 힘이며 부자의 부가 과연 부자 그 자수(自手)의 부일까? 남의 힘,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저 스스로 강할 수 있으며 저 스스로 부할 수 있을까? 아니다 아니 될 말이다. 장개석의 강(强)이 저 혼자의 힘이 아님을 알면 그만이다. 삼□의 부가 저 혼자의 손으로 된 것이 아님을 알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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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인간이 다른 생물보다 진화를 하였다면 그것은 크로포트킨의 말한 바군중적 상호의존의 결과가 아니면 아니 된다. 비사교적 비협동적 종(種)은 쇠퇴 또는 멸망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은 다윈의 생존경쟁설을 격파하기에 족하다. 이것은 결코 이론만으로가 아니라 인간사회의 진화를 위하여, 만인의 행복을 위하여 크로포트킨의 설을 취하고 다윈설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즉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다윈식의 모든 조직을 버리고 상호부조의 조직을 만들지 않으면 만인의 행복은 바랄 수 없을 것이다. 진화는 정체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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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너무 딴 길로 들어갔다. 그러면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자. 주요한 씨의 『우울』 중 또 ‘아해와 아기가 일시에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수무일분(手無一分)이니 전환(電換)으로 이것은 나의 죽마고우요 조선의 일류창작가의 한사람인 모군의 편지’이 일절의 주인공도 대강 짐작을 하겠다. 아마 김동인 씨를 두고 한 말씀인가 싶다. 여(余)는 김동인 씨와는 겨우 일지면(一知面)이 있을 뿐으로 친(親)하지는 못하거니와 여기서 김 씨로 추측하게 하는 것은 여(余)가 귀향할 여비문제로 S동으로 L씨를 찾게 되었을 때 L씨에게서 들은 말도 있거니와 최근 본지에 실린 『병과 빈』이라는 김 씨의 수필을 읽어 더 잘 알려지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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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김동인씨도 빈(貧)과 씨름은 무던히 하시는 분 같다. 여(余)와 거의 한 해에 수무일분(手無一分)이라는 똑같은 처지로서 돈타령을 하고 해매였다는 점으로 보아 금전(金錢)을 요하게 되는 그 입장이 비록 다르다 할지라도 동정하는 마음이 새삼스레 일어난다. 과부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셈과 같다 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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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김 씨는 세상이 다 아는바와 같이 일류 창작가로서 경성서 창작생활을 하시는 분이니까 더 말할 것 없거니와 여(余)는 무슨 뜻으로 껑정 뛰어갔다가 돈타령을 하다 내려 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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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들었다면 정이 든 경성을 여(余)는 만 4년이나 안 갔었다. 그것은 도시 「룸펜」생활에서 싫증이 난 것도 일인(一因)이오 따라서 청산은 수첩이오 벽계는 일곡(一曲)이라는 말 그대로 그리던 내 고향, ― 하향피촌(遐鄕僻村)인 내 고향의 맑은 산수에 애착이 깊어 아니 간 것도 일인(一因)이라면 일인일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툭 털어놓고 말한다면 빈(貧)이라는 철쇄(鐵鏁)거 여(余)의 전신을 얽매고 있는 까닭에 주인(主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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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경성까지 여비만 하여도 약 4원 게다가 단 일 개월이라도 여사(旅舍)에서 머물자면 식비가 20여원, 그러고 보니 이것만 하여도 합계 25원이라. 이것으로서 벼(租)를 사면 개량조 3석 백미가 소두(小斗)로 30두 이만하면 5-6식구가 3개월은 연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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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고 보니 수중에 조그마한 금액도 없거니와 설혹 있다손 치더라도 큰 볼일이 없는 이상 벌떡 일어설 수 없는 것이다. 얼마나 밝은 계산이랴. 얼마나 없는 계산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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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햇수로 4년 여(余)의 경성 행을 막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 객동(客冬)에는 전후사를 불계(不計)하고 차표를 끊어가지고 수종원고(數種原稿)를 유일한 행장 삼아 상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상경을 하고 보니 적수(赤手)의 여행인지라 언제나 별수가 있으랴마는 게다가 전일의 동지들도 이금(以今)에 안재(安在)오라는 글자 그대로 하나도 만날 수가 없고 몇몇 선배와 문우들이 보일 뿐으로 남는 것 이라고는 올데 갈데 없이 서울의 명물인 냉돌방(冷突房)에서 화로하나 없이 두 손만 싹싹 부비고 앉아 있는 맛참으로 적막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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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골 농촌 같으면 비록 조당죽을 못 끄려먹고 있을망정 뜻뜻한 방에 모여 들어 앉아 서로 간격 없이 안거니 눕거니 하며 구수한 이야기도 듣고 윷도 같이도 던져 보고 밤이면 춘향전 심청전도 보고 주머니털이 하여 짓고 추를 듬뿍 담아 넣은 메밀묵에 탁주 돌부리도 하련마는 겨울의 서울은 참으로 붉고 씻은 듯이 고적한 느낌밖에는 아니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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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기생집이 있고 카페가 있고 요리집이 있고 마작구락부가 있고 동구장(憧球場)이 있고 활동사진관이 있고 연극장이 있고 댄스홀까지 있어서 밤과 낮이 없이 온갖 유흥이 다 벌어져 있는 도시인지라 어찌 적막을 말하리오마는 탐(貪)의 소지자에게는 이러한 모든 것이 도리어 적막한 느낌을 사게 하는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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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구러 날수로 30여일 그동안에 경무국에 제출한 원고는 겨우 통과되어 나왔다. 몇몇 출판업자들을 찾았다. 그러나 남은 해를 넘겨두고 머릿골을 짜 만든 저작을 일금 기십 원에 그렇지 않으면 거절이다. 영리 일점(一點)만에 착안하고 있는 그네들인 다음에야 더 말해 무엇할 것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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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네들 출판업자에게도 동정할 한구석은 있었다. 즉 조선의 독서층은 그 대부분이 학생들인데 아무리 좋은 내용을 가진 서적이라도 조선문으로 된 것이면 잘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일본문으로 된 서적들을 구독하는 까닭에 농촌으로 풀려나가는 고대 소설류가 아니면 사실 서적업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처지에 있다 한다. 그러니 아무리 귀중한 원고일지라도 제 대접을 다하고 나면 결국 오그랑장사 밖에는 될 것이 없으니 어찌하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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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노릇이다. 읽기에 무엇보다도 자유로울 내말로 된 것을 버리고 부드럽지 못한 남의 말로 된 서적만을 읽으려고 드는 심리들도 한심한 노릇이요 또 그렇게 되게시리 만들어진 조선서적업계도 한심한 노릇이요 이러한 환경속에서 붓대를 잡고 있는 저술가 문필가들도 한심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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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미문대가(美文大家) 국지관(菊池寬)은 원고만으로 월수 5천원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면 조선의 미문대가는 월 얼마나 수입이 되는지? 그러고 보니 미문가가 못된 문인들이야 일러 무엇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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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원고지 위에다 붓끝을 날리는 사람들이라면 물론 원고료쯤을 생각함 즉은 만무하다. 자기의 주의와 사상을 전포하기 위하여 붓을 드는 것이다. 직업적 운동자나 사상가가 못 쓸 것과 마찬가지로 직업적 저술가나 문인이 되어서도 못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그치고 말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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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은 먹어야 글을 쓴다. 입어야 글을 쓴다. 먹고 입기에 별걱정이 없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못한 처지로서야 어찌하랴. 부득이 ‘원고를 쓰겠으니 조금만’ 하든지 ‘탈고 된 것이 있으니 돈을 좀’ 이렇게 원고를 받아 줄만한 곳을 찾아 가서 청구하느니보다도 구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빈한 한 문사, 그 중에도 조선의 빈한한 문사임을 생각하매 사실 한심한 생각이 절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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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필업을 자손에게 전하면 내가 쇠아들일세’ 이것은 일직이 조명희씨의 말이거니와 나도 몇 번이고 맹세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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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이번 상경은 이첨 저첨 싫증 밖에는 날것이 없게 되어 마지막으로 귀향을 결심하였다. 우울한 심리를 참다못하여 탁주 몇 잔으로 화풀이를 하다가 알코올 기운을 이기지 못하여 면상(面傷)까지 얻게되니(불행중 다행으로 심하지는 않았으나) 짜증은 더 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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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차표는 무슨 돈으로 사나? 식채(食債)는 무엇으로 주나? 생각다 못하여 식채만은 귀향 후 어떻게 할 내정으로(주인과 구면인 관계로) 우선 차비만을 변통하여 보기로 하고 J사의 A씨를 찾아 갔더니 A씨 역시 곤란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주선을 하여 주신다. 그리고 다시 O서점에 소설 표장화대로 얼마쯤 받아가지고 나서 좀 숨이 돌려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사(旅舍)에 들어와서 주인 노파에게 귀향할 뜻을 말하였더니 주인 편에서 도리어 사정을 좀 보아 주고 가라고 애걸이다. 딱한 사정이다. 부득이 있는대로 다 털어주고 며칠을 더 머무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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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는 동안에 죽마고우로서 방금 P국에 근무중인 工學士[공학사] K씨를 5-6차 방문 하였더니 일금 3원야(也)가 손에 쥐어진다. 차비도 부족이다. 될 대로 되어라 싶어 이것마저 주인의 손에 넘겨주었다. 이러고 또 며칠을 지내었다. 의외로 시골서 전보가 왔다. 바로 12월 27일이다. 그것은 곧 H읍에 계신 O母[모]의 별세보이다. 일은 큰일이다. 내려가지 않으면 아니 될텐데 글자 그대로 수무일분(手無一分)이니 사실 내하(奈何)오? 동광사 주요한씨에게 달려갔다. 주요한씨는 전일부터 어떠한 인연으로 많은 도움을 받던 여(余)의 존경하는 분의 하나다. 차마 입이 안 떨어지는 것을 『또 좀 힘써 봐 주셔야겠습니다』 입을 열었더니 모든 곤란한 형편을 말하시면서도 차마 떼시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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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도 존경은 드리면서도 아직 ‘좀’하고 졸라 본적이 없는 L씨를 다시 찾기로 하였다. L씨는 신양(身恙)으로 출사도 못하시고 S동 자택에 누워계시었다. 얼마쯤 담화하는 중에도 씨는 누우 신대로 무엇을 종이에 쓰더니 그것을 내어 보이신다. 그것은 곧 여(余)의 귀향을 읊으신 전별시(餞別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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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의 은근하신 마음으로 주시는 시인지라 감격히 받아 간수한 후 일어날 길에 최후의 무거운 입을 열었더니 부인에게 문의한 결과 마침 수중에 없음을 말씀하며 도리어 여(余)이상으로 미안해하신다. 이에 몇 자의 간단한 편지를 얻어가지고 다시 동광사를 찾았더니 주요한씨 역시 여(余) 이상으로 우울한 표정을 지으시며 『이거 참 딱하군』하고 털어주시는 양이 아마 금고 바닥을 닥닥 긁으시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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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놈의 부족은 면할 길이 없다. 최후의 일책으로써 S사의 K씨를 조르기로 하였다. 사(社)로 갔더니 단골 인쇄소에 가서 계시다하기로 다시 그곳으로 달려갔다. 이때는 벌써 오후 6시경. 아침부터 내리는 때 아닌 부슬비는 그침이 없이 내려 우울한 심사만 더 자아 내주고 차시간은 각일각(刻一刻) 다가만 오니 그때 내 마음이야 말로 뭐라고 형언하였으면 좋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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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들어서든 길로 딴 인사 차릴 여가 없이 입을 열었더니 선선하신 K씨는 두 말없이 청을 들어주셨다. 후유! 싶었다. 곧 주인집을 다녀 경성역을 나오니 아직도 차시간은 넉넉한지라 더 한번 후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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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말하기 괴로운 것은 내게 없는 것을 남에게 요구할 적인가 한다. 일찍이 바쿠닌은 자기의 가진 바를 동지에게 선선히 떼어주고 또 자기의 주머니가 비게 되면 남에게 내어 줄때와 마찬가지의 조자(調子)로 친우들에게 빼앗아 쓰고는 하였다는 말이 있으나 아무리 하여도 내가 남에게 줄때와 같은 조자로 남에게 청구하기에는 마음이 자연히 무거워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아마 부르주아 사회에서 자라난 때 묻은 양심일는지도 모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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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리하여 차에 올랐으니 경성을 떠나는 이 마음을 섭섭하다 할까? 시원하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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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희비극이 또 어디서 있을 것이냐? 귀향한지 불과월여(不過月餘)에 이번에는 경성에 계신 이모(姨母)의 별세 전보이다. 이분은 무남독녀 외딸밖에 없는 외로운 신세로 작별을 하였으니 이질인 여(余)로서는 반드시 올라가 보아야 할 경우연마는 조문 한 장으로 오 백리 밖 백사지 땅에서 쓸쓸히 작고하신 영혼을 조상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이것도 일장희극(一場喜劇)이라 할는지 여(余)의 세례도 이만치 받게 되면 도리어 장자(膓子)없는 웃음만이 터져 나오는 것인가 한다. (2월 16일 夜半[야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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