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家嚴甲午新及第 赴防時日記則無 乙巳以一當百被抄 赴北時日記是年兵使則金應瑞 判官趙誠立
4
나의 아버지(가엄, 家嚴)1)의 갑오년(1594년, 선조 27년) 신급제(新及第, 과거에 처음 급제한 사람) 때 부방일기는 보이지 않는다.
5
을사년(1605년, 선조 38년)에는 일당백장사(一當百壯士)로 선발되어 부북(赴北)2)할 때의 일기이다. 이 때 병사(兵使, 경상 좌병사)는 김응서(金應瑞), 판관(判官, 울산 판관)은 조성립(趙誠立)3)이다.
9
성주(城主)4)와 병사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12
마을의 여러 친구들이 전별연을 열어 주어 종일토록 취하게 마셨다.
14
十七日 發程 又設錢於達洞路邊 日暮宿於蔣友家
15
길을 떠났다. 달동(達洞) 가는 길에서 또 전별연이 있었다. 날이 저물어 장씨 성을 가진 친구 집에서 머물렀다.
17
十八日 早朝發行 農所朝飯 則爲發行到鵂巖 則同村諸友先會於川邊 終日飮錢 未末時發程 暮到毛火村止宿
18
아침 일찍 떠났다. 농소(農所)에서 아침을 먹고 바로 길을 떠나 휴암(鵂巖)에 도착하니 그 마을의 여러 친구들이 이미 강가에 모여 종일토록 전별연을 벌었다. 미시(未時, 오후 3시경)에 출발하여 저녁에 모화촌(毛火村)에서 잤다.
20
十九日 到新院 則入谷開谷石村諸友 亦設錢飮醉 到陵旨止宿
21
신원(新院)에 도착하니 입곡(入谷), 개곡(開谷), 석촌(石村)의 여러 친구들이 다시 전별연을 벌여 취하도록 마셨다. 능지(陵旨)에 도착해 머물러 잤다.
23
二十日 沒陽驛朝飮 阿火抹馬 時兵使亦到 卽拜兵使 兵使則先行 隨後發程 日落時到永川 則兵使送人請入飮三盃 自本郡夕飯 入夜陪話 而退歸下處 則陪行軍官 持若干酒饌 鄕所持酒肴 吏廳及將官等盛備酒饌來錢 自本郡定送茶母小童使令 入夜大飮 滿座主客皆醉 奴輩等亦大醉而安宿
24
몰양역(沒陽驛)에서 아침밥을 먹고 아화(阿火)에서 말을 먹였다. 병사(兵使)가 도착하여 배알했다.
25
병사는 먼저 떠나고 뒤따라 출발하였다. 저물녘에 영천(永川)에 도착했다. 병사가 사람을 보내어 들어오기를 청하여 술 석 잔을 마셨다.
26
영천 군수(이경립, 李景立)와 저녁밥을 같이 먹고 밤이 될 무렵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처소로 돌아오니 배행(陪行) 군관이 약간의 술과 먹을거리를 가지고 왔다. 향소(鄕所)에서 또한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고 이청(吏廳)과 장관(將官)등 도 주찬을 성대히 준비하여 전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영천 군수가 다모(茶母), 소동(小童), 사령(使令)을 보내어 주었다. 밤이 깊도록 크게 취하도록 마셨다. 가득 모인 주객(主客)이 모두 취하고 사내종들 또한 크게 취해서 모두들 편안하게 잤다.
28
二十一日 金正冾自興海路來到 興海居金應澤崔淇文金大器裵應春 迎日金八凱 淸河李德鵬 梁山丁彦祥 亦一時齊到 吾日纔出先入見兵使仍白安東府逢點 路由竹嶺則枉道極悶 以下各官先到九人 則此郡逢點後 鳥嶺路作行云爾 則快諾 聞金冾來奇 催促入來 請主倅 吾 與金正兩行各粮米一斗太一斗粥米一斗式帖給 吾與金則自本郡朝飯 食後兵使欲爲發行之際 主倅入拜兵使前曰 與蔚山朴判官面分甚厚 今作三千里外之行欲設錢酌 使道行次亦未可暫時迎行乎 惶恐敢達 兵使笑曰 太好 移時設宴後點考次 招興海迎日淸河梁山 等出身以大盃饋二盃出送日幾午罷宴 兵使先發 吾等最午後發行 暮到新寧驛下館 昏察訪及主倅持酒來錢請來 同行諸友同飮仍宿
29
흥해(興海)의 김정협(金正冾)과 김응택(金應澤), 최기문(崔淇文), 김대기(金大器), 배응춘(裵應春), 영일(迎日)의 김팔개(金八凱), 청하(淸河)의 이덕붕(李德鵬), 양산의 정언상(丁彦祥)도 함께 도착하였다.
31
“안동부(安東府)에서 점고하고 죽령(竹嶺)을 넘는 길로 가게 되면 돌아가게 되는 것이어서 극히 불편합니다. 먼저 도착한 아홉 사람은 영천군에서 점고한 후에 조령(鳥嶺)을 넘는 것으로 길을 잡으면 어떻겠습니까?”
32
라고 아뢰니 병사(兵使)가 흔쾌히 승낙하였다.
33
들어오라는 기별을 김협에게서 들었다. 영천 군수가 나와 김정에게 각각 쌀 1두, 말먹이 콩 1두, 말먹이 죽 1두씩을 지급해 주었다. 나는 김정협(金則自)과 더불어 본군에서 아침을 먹었다. 식후에 병사가 출발하려고 할 때에 영천 군수가 들어가 병사를 뵙고 말하기를,
34
“울산 박판관(蔚山朴判官)5)과는 평소 알고 지낸 사이이고, 오늘 삼천리 밖으로 멀리 떠나 전별연을 열려고 하니 사또(使道)께서도 행차를 조금 늦추시어 잠시 참석해 주시기를 황공하게 감히 아룁니다.”
36
병사가 웃으며 ‘아주 좋다’고 하여 전별연을 베풀고 난 후 거의 정오 무렵 잔치가 파하고 점고를 하였다. 병사는 먼저 출발하였고, 우리는 정오가 지나 흥해, 영일, 청하, 양산 등의 출신 군관들을 불러 큰 잔으로 두 잔씩을 먹고 출발하였여 저녁에 신녕역(新寧驛)에 도착하였다.
37
밤에 찰방(察訪)과 수령이 술을 가지고 전별연을 열어주었다. 동행한 친구들도 함께 술을 마시고 머물러 잤다.
39
二十二日 早朝發程 去路入謝 主倅及察訪而行 薪院抹馬宿 軍威太守則出去 巡營不在鄕所等持 若干酒肴來饋 吏廳亦持酒肴來饋
40
이른 아침에 출발했다. 가는 길에 수령과 찰방에게 들러 감사인사를 드렸다. 신원(薪院)에서 말을 먹이고 군위(軍威)에서 잤다. 군위 현감(縣監)은 경상 순영(巡營)에 가고 없고 향소에서 약간의 술과 안주를 들고 와서 대접했다. 이청(吏廳)에서도 술과 안주를 들고 와서 대접했다.
42
二三日 比安抹馬 太守送問安 又送吸唱請來與金正 同入卽設盃酌午後罷 安溪驛止宿驛長等花紋疊席一部 白紋疊席來納 花席則金正處被奪
43
비안(比安)에 도착해서 말을 먹였다. 현감이 급창(及唱)6)을 보내어 안부를 묻고 들어오라 청하니 김정협과 들어가 술을 마시고 오후에 파했다. 안계역(安溪驛)에서 잤다. 안계 역장 등이 화문첩(花紋疊) 한 부와 백문석(白紋席)을 가져 와 주었는데, 화문첩은 김정에게 빼앗겼다.
45
二四日 早早發程 水山驛朝飯到咸昌縣 則刷馬及馬料太粥而已 小無上下間接待之事
46
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하여 수산역(水山驛)에서 아침을 먹고 함창현(咸昌縣)에 도착하니 쇄마(刷馬)7)와 말먹이 콩, 죽 뿐이고 상하간에 전혀 접대하는 일이 없었다.
48
二五日 幽谷抹馬 察訪前有面分 持酒來饋 聞慶止宿 與咸昌同 小無接待之擧 加以料米太 不爲准數 捉致該色臀打十度而送
49
유곡(幽谷)에서 말을 먹였다. 찰방(察訪)8)이 전에 알고 있던 사람이라 술을 가지고 와서 대접을 하였다. 문경(聞慶)에서 머물렀다. 그런데 함창에서와 같아 접대하는 움직임이 전혀 없고 급료로 주는 쌀도 규정만큼 되지 않아서 해당 색리(色吏)를 불러 볼기를 10대 때리고 보내주었다.
52
고사(古沙)에서 말 먹이를 주고 수교(水橋) 주막(酒幕)에서 머물러 잤다.
54
二七日 丹月驛抹馬 到忠州 主牧出去不在 凄凉空館 艱得冷飯 奴馬俱飢 轉展達曙 比安至各官之極待 無非營軍官 積年之致 可笑可笑
55
단월역(丹月驛)에서 말먹이를 주고 충주(忠州)에 도착하였는데 목사는 출거(出去, 출타)하여 없었다. 처량하게 빈 관사에서 찬밥도 얻기 어려워 종과 말이 모두 굶주리어 새벽에 이르도록 뒹굴었다. 비안(比安)에서 온 벼슬아치에 대해서는 극진히 접대하는 것이 영군관(營軍官)의 몇 배에 해당하니 우습고도 우스웠다.
57
二八日 不給刷馬之故 勢不得已 齊到鄕廳 開陳義理則馬之際 日已暮矣 仍宿
58
쇄마를 지급해주지 않은 탓에 향청에 가서 의리로서 설명 할 때 날은 이미 저물어 부득이하게 머물러 잤다.
62
※ 한글 번역본의 주석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왕조실록, 고전번역원, 울산박물관 번역본의 주석을 참고 합니다.
63
1) 가엄(家嚴) : 남에게 자기(自己)의 아버지를 이르는 말.
64
2) 부북(赴北) : 북쪽 지방에서 부방(赴防) 하는 것.
65
부방(赴防)은 조선시대 다른 지방의 병사가 서북 변경의 국경지대에 파견되어 방위임무를 맡은 일을 말한다.
66
성종 때부터 실시하였으며, 무과 출신으로서 60세가 지난 자, 양친이 80세 이상인 자, 남한산성 근무자 등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북 국경지대의 변경과 해안에 한 번씩 부방하였다. 이에 면제된 자는 그 대가로 규정된 수량의 양곡(糧穀)을 납입하였다. 함경도 ·평안도의 토착군병(土着軍兵)에게는 공부(貢賦) 외의 잡역(雜役)을 과하지 않고 방위임무만 맡겼다. 임진왜란 뒤에는 부방군(赴防軍)을 확보하기 위해, 보통 무과시험 때 30명 내외를 뽑던 것을 한 번에 수천 명을 뽑았다. 병자호란 직전에는 서북변(西北邊)의 방위가 급해져 부방병의 보충 ·강화가 불가피하게 되자, 무과 시험은 남취(濫取)로 변하여 별시(別試) ·정시(庭試) 등에서 한 방(榜)에 만여 명을 뽑아 이를 만과(萬科)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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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성립(趙誠立) :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1605년 2월에 판관은 이미 조성립에서 오여벌(吳汝橃)로 교체 되었다고 나온다.
68
4) 성주(城主) : 고을의 수령. 여기서 울산 판관. 당시 울산은 경상 좌병영이 있는 곳이므로 울산 군수는 없고 좌병사와 판관이 있었다.
69
5) 울산 박판관(蔚山朴判官) : 여기서 박판관은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다.
70
문맥상 경상 좌병사의 행차를 조금 미루고 부방하는 군관들의 전벌연에 참석해 달라는 이야기인데 울산 박판관과 영천 군수 자신의 친분을 내세우는 장면이다.
71
울산 판관은 선조 37년 1604년 10월에 조성립(趙誠立)이 제수 되었고 다음에인 선조 28년 1605년에 윤홍국(尹弘國)이 제수 되었다. 다음에 5월에 박사제(朴思齊)가 제수 되었으니 박판관은 누구인지 확실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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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급창(及唱) : 조선 시대에, 군아에 속하여 원의 명령을 간접으로 받아 큰 소리로 전달하는 일을 맡아보던 사내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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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쇄마(刷馬) : 조선 시대 지방에 배치한 관용의 말 또는 이러한 말의 이용을 규정한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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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찰방(察訪) : 조선시대 각 도의 역참(驛站)을 관리하던 종6품의 외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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