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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북일기(赴北日記) 1646년(병술년) ◈
◇ 1월 (正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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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6년
박취문(朴就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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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취문(朴就文) 일기>
2
병술년(인조 24년, 1646년)
 
 
 

1월 (正月)

 
 

1월 1일

5
사또에게 문안 인사(都問安)를 하고 망궐례(望闕禮)1)를 행한 후에 이어 공무를 보았다. 여러 관직자들이 예를 올리고 행영 노비들을 점고한 후 한 무리는 기생들과 편을 갈라 쌍륙(雙六)놀이를 하고, 한 무리는 비장(裨將)들과 편을 갈라 활을 쏘고, 또 한 무리는 악기를 연주 하였다.(作樂) 영(令)이 내렸는데
 
6
“활 10순을 쏘아 거말(居末, 꼴찌)한 자는 곤장 5대(棍打五度), 거수(居首, 장원)에게는 씨를 제거한 목화(核木花) 5근을 상으로 주겠다.”
 
7
​고 하였다. 거말(居末)은 강성일(姜成一), 김여해(金汝海)가 43발, 나와 이시복(李時馥)이 다 맞추어 목화 5근에 1근을 더 하여 각 3근씩 나누어 받았다. 꼴찌한 사람을 잡아오게 하니 김여해가 고하기를
 
8
“곤장을 맞는 것은 가장 민망하여, 원컨대 술로써 대신하고자 합니다.”
 
9
​라고 하였다. 강성일도 원래 약하여(殘疲) 술 5선으로 대신케 한 후 파하였다.
 
 
 

1월 2일

11
숙회(叔晦)와 함께 회령 부사(會寧府使)를 찾아뵙기 위해 말미를 얻었다. 월매는 내 처소에 머물렀다. 저녁에 숙회와 함께 출발하여 해가 지기 전에 회령에 도착하여 바로 들어가 문안하고 밤이 된 후에 하직하고 나와 처소에서 묵었다. 인연 있던 사람들이 부지기수로 찾아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날이 밝기 전에 불을 밝히고 돌아 갈 길에 예를 갖추어 인사드리고자 하였으나 판관이 너무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뵙지못하고 돌아왔다. 숙회는 뒤쳐졌다.
 
 
 

1월 3일

13
숙회가 도착하였다.
 
 
 

1월 4일

15
활 50순을 쏘았다. 김충의(金忠義, 김여해)가 사또에게 산에 갈 때 쓸 총 한 자루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여 영(令)이 내려왔다.
 
 
 

1월 5일

17
활 30순을 쏘았다. 공방(工房) 임무를 바꿔 달라는 일로 하소연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1월 6일

19
도망쳤던 사내종이 전역(傳驛)2)하여 압송되어 왔다. 시비 불문하고 족장 50대를 때렸다. 경흥(慶興) 부사와 온성(穩城) 부사, 경원(慶源) 부사, 고령(高嶺) 첨사도 도착하였다.
 
 
 

1월 7일

21
회령(會寧) 부사와 판관(判官)이 도착하였다. 활을 쏘았다.
 
 
 

1월 8일

23
회령 부사가 술상을 내려 종일 잔치를 벌였다. 부사가 청하여 사또가 잔치에 참석하였다.
 
 
 

1월 9일

25
영(營)에서 술상을 차려 종일 잔치를 벌였다.
 
 
 

1월 10일

27
수령(守令)들이 각자 돌아갔다.
 
 
 

1월 11일

29
활 40순을 쏘았다.
 
 
 

1월 12일

31
거위털로 만든 푸른색 장옷감(鵝靑長衣具) 2단(端)3)을 세포(細布)4)로 바꾸기 위해 사내종을 회령으로 보냈다.
 
 
 

1월 13일

33
정철(正鐵)이 거의 떨어져서 급히 운송하라는 전령을 본영의 유진장(留鎭將)에게 보냈다. 활 40순을 쏘았다.
 
 
 

1월 14일

35
잡아온 종(上還奴)에게 한 차례 족장(足掌)을 때린 후 낙후한 이유와 복물(卜物)의 거처에 대해 물었다. 진술을 받고 사또에게 고하여 최득길(崔得吉)을 잡아오는 일을 길주 목사에게 발관(發關)5) 하였다.
 
 
 

1월 15일

37
사또가 회령 부사와 함께 애탕(艾湯, 쑥국)을 먹기 위해 회령 원산촌으로 출발했고 설매(雪梅)와 월매(月梅)가 모시고 갔다. 월매가 떠날 때 반쯤 물들인(半染) 치맛감 20척을 주었다. 저녁에 예방감관(禮房監官) 황덕남(黃德男), 한산급(韓山岌), 김낙(金珞), 김광일(金光一), 김고(金杲), 공망(公望), 숙회(叔晦), 백예원(白禮元)과 함께 술병을 옆에 끼고(佩壺) 기생들을 데리거 남문 밖에서 답교(踏橋)6)를 하고 밤이 되어 파하였다.
 
 
 

1월 16일

39
영(營)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방직기를 데리고 공망의 처소에 다녀왔다.
 
 
 

1월 17일

41
공방 임무를 교체하는 일로 아뢰었다. 저녁에 방직기의 친족인 공방의 피공(皮工) 복생(卜生)이라는 자가 방직의 것으로 소분토(小分土) 1부, 내 것으로 평혜(平鞋)7) 1부, 사내종 것으로 다로기 1부, 패낭(佩囊), 비갑(臂匣) 각 1개 씩을 가져와 바쳤다. 재임시에는 물건을 드릴 수 없고 체임된 후에야 처음으로 드린다고 하였다.
 
 
 

1월 18일

43
밤에 눈이 내리다가 아침에 개고 바람도 잦아들었다. 사또를 모시고 활 50순을 쏘는데 사또가 말하길
 
44
“군관들의 활쏘는 재주가 모두 다르니 다음 10순은 3등(等)으로 나누어 각 등의 거말(居末)은 방직기와 함께 광대 옷을 입히겠다.”
 
45
​는 영(令)을 내렸다. 등급을 나눌 때 상재(上才)는 중재(中才)편에 들고자 하고 중재(中才)는 하등(下等)에 들려고 하여 서로 다툼이 그치지 않아 사또가 직접 등(等)을 나누었다. 하등(下等)에 속한 백예원(白禮元)은 같은 군관으로서 홀로 활을 쏘지 않는 것은 극히 부당하다고 하면서 함께 활을 쏘기를 원하여 사또가 심히 옳다 여기고 함께 활을 쏘았다. 상등(上等) 가말(居末)은 한상급(韓山岌), 중등(中等) 거말(居末)은 김고(金杲)와 공망(公望), 하등(下等) 거말(居末)은 백예원(白禮元)이었다. 공망(公望)은 김고(金杲)와 서로 우열을 가릴 것을 하소연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방직기들을 불러서 음악 없이 뜰아래에서 춤을 추게 하다가 잠시 뒤에야 마루 위로 오르게 하여 음악에 맞추어 춤추도록 하였다. 이날 각 방직기들이 연이어 불려오게 되니 몹시 민망해 했다. 매우 우스웠다.
 
 
 

1월 19일

47
순찰사가 철호안(鐵胡鞍)8) 1부를 원해서 만들기 시작하였다. 병을 핑계로 활을 쏘지 않았다.
 
 
 

1월 20일

49
길주(吉州) 목사와 명천(明川) 부사가 도착하여 곧바로 가서 뵈었다. 종성(鍾城)과 회령(會寧) 부사는 저녁에 또한 도착한다고 하니 다 모인 자리에서 마땅히 또 하소연을 할 터이다. 그 때 힘을 다해서 거들어줄 것을 간청하고 돌아왔다.
 
 
 

1월 21일

51
종성 부사와 회령 부사가 아침 먹기 전에 도착해서 곧바로 가서 뵙고 4관(四官)의 수령에게 술자리를 마련할 것을 간청하였다. 김충의(金忠義, 김여해)가 부탁한 총이 완성되어 전해 주었다. 4관의 수령과 더불어 잔치를 벌였다. 잔치가 끝난 후에 종성 부사가 청하기를
 
52
“비장(裨將)들로 하여금 상을 걸고 하는 활쏘기로 겨뤄 보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53
​라고 하였다. 즉시 사또가 명을 내리기를 활을 쏘아 기괴(居魁, 1등)에게는 상을 주고 거말(居末)에게는 벌을 내린다 하였다. 나와 이시복(李時馥) 김낙(金珞)이 모두 50발을 명중시켰다. 승부를 가리기 위하여 또 10순을 쏘았는데, 나와 이시복이 또 50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또 10순을 쏘았는데 또 모두 명중시켰다. 또 10순을 쏘았는데, 제 8순 제 5번째 화살이 빗맞았다. 이시복이 1등을 하여 쌍대무(雙對舞)를 추고 또 많은 상을 받았다. 회령 부사가 말하기를
 
54
“10순을 연속으로 명중시키는 것도 오히려 가히 뛰어난 재주라고 하겠는데, 박모(朴某, 저자 박취문)도 연속으로 30순을 명중시켰는데 상을 받지 못한다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55
​라고 하였다. 종성 부사, 명천 부사, 길주 목사가 모두 말하기를
 
56
“회령 부사의 의견이 실로 합당합니다.”
 
57
​라고 하여 6승포 3필과 씨를 제거한 목화 2근, 쌀 5두, 좁쌀 1석, 콩 1석을 지급 받았다. 거말(居末)한 백예원은 방직기와 함께 광대 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저녁 무렵 뜰에 내려서서 하소연하기를
 
58
“3달 반 동안 조총을 만든 바 연마와 장식 작업을 아직 하지 못한 총까지 합치면 거의 300자루에 달하고, 항차 이제 철물이 거의 다 떨어졌기 때문에 얼음에 녹는 3월쯤이 되어야 취철(吹鉄) 할 수 있습니다. 이 몸의 아버지 나이가 거의 80세에 가까운데 저 외에 달리 가까이에서 모실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사정이 아주 절박합니다. 만약 방환되지 않는다면 형세상 도망치게 될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59
​라고 하였다. 4관(四館)의 수령이 함께 거들고 나서자 사또가
 
60
“이전에 이미 계문(啓聞)한 것이니 바로 따를 수는 없다. 다만 너의 방환은 가장 빠른 시일내에 할 터이니 잠시 물러가고 너의 생년월시나 상세히 적어서 올려라.”
 
61
​라고 하여 즉시 써서 올렸다. 저녁에 선전관(宣傳官)의 말망(末望)에 들어 유리하지 않은 경보(京報)9)가 왔다.
 
 
 

1월 22일

63
아침에 돌아온 사내종(還奴)을 때릴 때에 공망과 숙회가 말렸다. 사또도 때린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멈추라고 명령을 내려 5대를 때리고 그만 두었다. 식후에 영(營)에서 술상을 내려 주었다. 오전(日未午)에 사또가 불러 들어가니 말하기를
 
64
“간절히 가고 싶어 하고, 네 곳 수령의 청 또한 간절하니 마땅히 원대로 해주겠다.”
 
65
​고 하였다. 이어『 자미두수(紫微斗數)』라는 책을 내어 놓았는데, 논해져 있기를 ‘계절이 바뀔 즈음에 머리를 산발하는 아픔이 있다.’라 하였다. 그것을 보고 곧바로 슬프게 우니, 병사가 술로 위로해주었다. 그러고는 즉시 문서를 만들어 주었다. 『자미두수(紫微斗數)』는 명천 부사 윤창구(尹昌耈)가 손수 베낀 것이다.
 
 
 

1월 23일

67
길 떠날 짐을 꾸렸다. 4관(四館) 수령이 각각 돌아갔다. 종성 부사에게 하직인사를 하였다. 저녁에 문서를 전장(傳掌)10) 하기 위해서 여러 물건들을 회계하였다.
 
 
 

1월 24일

69
오전에 회계를 마치고 물건 일체를 계산하여 필장총(畢莊銃) 187자루와 미장총(未莊銃) 98자루를 합쳐 모두 285자루, 그리고 사냥총 3자루를 후임자에게 맡기는 일을 마쳤다. 먼저 방직기를 경성으로 보낼 때에 사또에게 고하여 복생(卜生)에게 말미를 주어 함께 보냈다. 후에 전송 인사를 받고 이어 잔치를 열었다. 밤이 되어 파하였다.
 
 
 

1월 25일

71
공망은 아직 행장을 다 꾸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뒤처졌다. 숙회와 함께 식후에 바로 하직하고 부부현(浮夫峴)에 도착하였다. 여러 동료 군관 및 김여해, 기생들이 여럿이 모여 전별연을 열어주었다. 오후에 출발하여 회령에 도착하여 박이돈의 주인집에서 잠시 머물다가 저녁에 월매집에 들렀다. 저녁에 들어가서 부사를 뵙고, 밤이 되어서는 또 판관을 뵈었다. 의향은 촌가에 가고 없었다. 알고 지냈던 위·아래 사람들이 밤에 대단히 많이 방문하였다. 파총 정윤신은 황모(黃毛) 10조(条)를, 허국촌은 초피(貂皮) 1령(令)을 주었다. 달리 보답으로 줄만한 물건이 없어서 삼양죽전(三陽竹箭)을 각 10개씩 주었다. 월매는 나에게 세포 20척을 주었고, 서로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도 각기 황모를 가지고 와서 주었는데, 거의 50여조에 이르렀다.
 
 
 

1월 26일

73
숙회가 뒤처져 머물렀다. 일찍 아침밥을 먹고 부사에게 하직하고 또 부사의 별실에게도 하직하니 향초피(鄕貂皮) 2령을 주었다. 매우 감사하다. 부사는 소녹피(小鹿皮)1령, 황모 10조, 백미 4두, 좁쌀 4두, 콩 4두, 소금에 절여서 말린 연어 5마리, 문어 1마리, 말린 꿩 5마리를 내려 주었다. 후에 남문에 나와 앉아 판관과 함께 전송연을 베풀어 주었다. 관청으로부터 받은 물건은 모두 월매, 의향, 설매 등에게 주었다. 의향이 촌가에서 왔다. 공망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후에 출발하여 비석(碑石) 머리에 도착하였는데, 회령의 전 동료 군관 및 기타 서로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 술을 가지고 와 전별하였다. 밤이 되어 풍산(豊山)에 도착하여 숙박하였다.
 
 
 

1월 27일

75
이른 새벽에 출발하려고 역장을 불러보니 복마(卜馬)들이 모조리 병영에 정철을 실어 운반하는 데 동원되어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서 달리 말이 없으니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부득이 식후에 길을 떠났으나 복물은 소에 실고 부령(富寧)에 도착하였다. 부사는 여러 달 째 신병을 앓고 있어 만나지 못하였다. 진사 정기(鄭淇)를 만나보고, 역장의 집에서 숙박하였다. 저녁에 향춘(香春)이 술을 가져왔다.
 
 
 

1월 28일

77
아침 일찍 출발하였다. 수성(輸城)에서 아침밥을 먹고, 경성에 도착하여 판관을 뵈었다. 병영에 머물러 있던 동료 군관들과 최계망(崔繼望), 이훤(李萱)을 만나보았다.
 
 
 

1월 29일

79
아침에 좌랑 정대용(鄭大容)에게 인사드리고 이별을 할 때 악수하고 통곡하니 참으로 비통하였다. 전에 경성(鏡城)에 있을 때에 비치해둔 좁쌀 1석, 쌀 5두, 콩 1석, 귀리 2석을 저녁에 방문하여 사례로 주니 또 눈물을 흘려서 술과 안주를 얻어 위로하고 밤이 되어서 돌아왔다.
 
 
 

1월 30일

81
마철(馬鐵, 말편자)을 붙이고 나니 짐 싣는 말(卜馬)이 절뚝거려 매우 답답했다. 들어가서 판관을 뵈었다. 경성부의 좌수인 송경(宋璟)이 와서 만났다. 이훤과 최계망도 왔다. 조경직(趙敬直), 조사인(趙士仁), 김계인(金繼仁)등도 모두 만났고 기생들도 와서 봤다. 병영의 각 관청의 감관(監官)들이 반찬거리를 보냈다. 선달 장두민은 병사에게 하직하기 위해 길주에서 오자마자 곧바로 행영으로 떠났다.
 
 

 
82
1) 망궐례(望闕禮) : 경관직으로서 중앙 관사에 있는 자는 조하(朝賀)를 통해 임금을 뵙고 경의를 표할 기회가 있으나, 지방 관아에서는 그렇지 못하였으므로 망궐례를 했다. 즉, 궁궐이 멀리 있어서 직접 궁궐에 나아가서 왕을 배알하지 못하는 각 지방의 수령들이 지방 관청에서 임금을 공경하고 충성심을 표시하기 위해 임금과 궁궐의 상징인 나무에 ‘궐(闕)’자를 새긴 패(牌)를 만들어 각 고을 관아의 객사에 봉안하고 예를 올렸다. 또한 지방관으로 임명된 자로서 사정에 의해 조정에 하직을 하지 못하고 부임한 자도 부임지에서 망궐례를 가졌다. 통상 매달 1일과 15일에 거행 하였다.
83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84
2) 전역(傳驛) : 사람이나 물건이 역에서 역으로 전해짐.
85
3) 단(端) : 피륙의 길이를 재는 단위로 보통 20척(尺)에 해당한다.
86
4) 세포(細布) : 가는 삼실로 짠, 썩 고운 삼베. 세마포(細麻布).
87
5) 발관(發關) : 상관(上官)이 하관(下官)에게 관문(關文)을 보냄.
88
6) 답교(踏橋) : 정월 보름날 밤에 다리를 밟는 풍속. 이날 다리를 밟으면 일년간 다릿병을 앓지 아니하며, 열두 다리를 건너면 일년 열두 달 동안의 액을 면한다고 한다.
89
7) 평혜(平鞋) : 밑창이 평평한 신발.
90
8) 철호안(鐵胡鞍) : 말안장인 듯 하다.
91
9) 경보(京報) : 조보(朝報)를 가리킨다. 조보는 조선시대에 (承政院)의 발표사항을 필사해서 서울과 지방의 관서에 배포하던 전근대적인 관보로 국왕이 내리는 명령과 지시, 유생이나 관리들이 올리는 상소, 관리의 임면 상황 등이 실려있다.박취문이 아마 선전관의 후보 3명 안에는 들었으나 최종 낙점은 받지 못한 상황을 서술하고 있는 듯하다.
92
10) 전장(傳掌) :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맡아보던 사무나 물건을 인계함.
【원문】1월 (正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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