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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태위 문하시중 집현전대학사 판상서이예부사 겸태자태사 감수국사 상주국(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 守太尉 門下侍中 集賢殿大學士 判尙書吏禮部事 兼太子太師 監 修國史 上柱國)인 신(臣) 김부식(金富軾)이 왕명을 받들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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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림랑 시상서병부시랑 겸동국시강학사 사자금어대(文林郎 試尙書兵部侍郎 兼東宮侍講學士 賜紫金魚袋)인 신(臣) 문공유(文公裕)가 왕명[宣]을 받들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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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 보현사는 탐밀(探密)과 굉확(宏廓) 두 스님이 처음 지은 것이다. 탐밀은 본래 성이 김(金)씨로 황주(黃州) 용흥군(龍興郡) 사람이다. 25살에 출가하여 뜻을 굳게 하고 고행하였다. 승복 한 벌과 발우 하나로 생활하였으며, 아주 추운 날이 아니면 신을 신지 않았고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서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고 배움에 힘썼다. 이름난 스승에게 나아가 화엄교관(華嚴敎觀)을 전해 받았다. 거란의 태평(太平) 8년 무진년(1028)에 연주(延州)의 산에 들어와 암자를 짓고 거주하였다. 굉확은 탐밀의 조카로서 중희(重熙) 7년 무인년(1038)에 찾아와 제자가 되었는데, 〈두 사람의〉 뜻은 하나였고 기는 합하여졌으며, 덕은 충만하여 명성이 널리 퍼졌다. 배우려는 사람들이 명성을 듣고서 몰려들자 그 땅이 수용하기에 부족하여 중희 11년 임오년(1042)에 동남쪽 모퉁이 1백여 보쯤에 땅을 골라서 사찰을 창건하였는데 무릇 243칸이었다. 그 산을 일러 묘향(妙香)이라 이름하고 그 절을 이르기를 보현(普賢)이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승려 3백여 명을 불러 모아 염불하고 경전을 읽으며 낮과 밤으로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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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스승이 돌아가시자 제자들이 서로 이어 주지를 맡았는데, 불사를 행할 때 처음부터[權輿] 〈끝까지 스승의 가르침을〉 계승하지 않음이 없었다. 함옹(咸雍) 3년 정미년(1067)에 ▨▨▨ 문종께서 이야기를 들으시고 가상히 여기셔서 유사(有司)에 명하여 땅과 밭을 내리셨다. 그리고 교(敎)하여, 만약 주지〈의 자리〉가 비었을 경우 그 문인으로서 무리 중에 경전에 밝고 수행을 제대로 하여 능히 조사들의 도를 받들 수 있는 사람을 뽑아 아뢰어 임명하라고 하셨고, 좌우가(左右街, 승록사(僧錄司))에 하명하여 〈보현사의〉 삼강(三剛, 사찰의 행정을 담당하는 기구)에 전하여 행하되 바꾸지 말라고 하셨다. 이에 도인(道人) 창선(暢先), 각린(覺隣), 승총(勝聰), 혜쌍(惠雙), 성각(性覺) 등이 세월이 지나 문서가 손상되면 조사들의 행적이 (…결락…) 하고 선왕의 명령이 흐려져 없어질까 염려하여 돌에 새겨 후대의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연명으로 주청(奏請)하여 신(臣)으로 하여금 그 일을 적도록 하니 하교하여 허락하셨다. 신(臣)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이른다. 공자께서 〈『논어』에서〉 일민(逸民)을 서술할 때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앞에 두고 유하혜(柳下惠)를 뒤로 하였으며, 맹자께서도 세 성인을 서술하며 또한 백이를 이윤(伊尹)과 유하혜의 앞에 두었고,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의〉 열전 70권을 지을 때 특별히 백이를 첫머리에 두었다. 그래서 양자(楊子, 楊雄)의 『법언(法言)』에서는 “옛날에는 굶주리며 드러난 사람을 높였고, 벼슬하며 숨은 사람은 낮게 여겼다.”고 하였다. 하지만 공자께서는 “나는 이와는 다르니 옳은 것도 없고, 옳지 않은 것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무릇 성인들의 행실은 구슬이 쟁반을 구를 때에 세우고 눕히고 기울이고 바르게 함에 따라서 천번 만번 변화하지만 끝내 쟁반을 벗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마음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고 하셨고, 장주(莊周, 莊子) 역시 “자기 마음대로 행하여도 올바른 법도에 맞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굶어서 드러났거나 벼슬하여 숨었거나 그 높고 낮음을 단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공자의 일민(逸民)이나 맹자의 세 성인도 그 순서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양자가 이처럼 높고 낮음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은 고결한 선비들을 내세우고 욕심있는 사람을 물리침으로써 천하에서 오랫동안 지켜야 할 가르침으로 삼으려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하물며 ▨▨ 불교에서 하는 이야기를 듣건대 여래께서는 삼겁(三劫)의 시간 동안 수많은 선행을 닦아 깨달음에 이르셔서 복덕과 지혜가 두루 갖추어지고 의보(依報, 심신이 의지해야할 신체 외의 모든 사물들)와 정보(正報, 과거의 업으로 받게 된 현재의 몸과 마음)가 장엄해졌으며, 세상에 나와 교화하실 때에는 맨발에 발우를 들고서 걸식으로 생활하셨다고 하니 어찌 이른바 영예를 제대로 알고 욕됨을 잘 지킨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런 즉 그 제자들도 이를 잘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사람들은 여러 가지 추악한 일을 하지 않음이 없으며, 이보다 나은 사람들도 혹은 탐하고 인색하여 많이 재산을 모으고, 물건을 사용함에 세속의 사람들과 다름이 없고 사치에 있어서는 그들보다 더 심한 경우가 있다. 그러고도 부족하게 여겨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건을 빌려주어 이자를 받아내는데 살을 베고 뼈를 깎는 듯 죽을 때까지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설혹 부처를 ▨▨▨ 한다고 하여도 내생에 반드시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탐밀과 굉확 같은 분들을 어찌 존경하고 내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성조(聖祖)께서 크게 칭찬하시고 밝으신 주상께서 이를 기록하여 후세에 보이게 한 것 역시 마땅하다. 들으니 스님들이 평생동안 부처님을 보고 사리를 얻거나 신비한 빛을 내어 산신들을 감동시킨 일과 같은 영이한 일들이 많았지만 이각(李角)이 지은 행장(行狀)에 갖추어져 있으니 지금은 생략한다. 다만 사찰을 만든 때와 스님들의 덕행을 기록하여 사람들에게 ▨▨▨한 바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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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금 황통 원년 신유(1141) 7월 11일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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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 비구 신(臣) 석(釋) 각린(覺隣) 등이 비를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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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륜사(王輪寺) 대사 혜참(惠參)이 교정하여 새김[刊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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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高麗國) 연주(延州) 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의 탐밀(探密)∙굉학(宏廓) 두 조사( 祖師)의 기(記) 뒤에 아래와 같이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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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인(道人) 향진(向眞), 홍간(弘侃), 현재(賢載), 균선(均善), 혜소(慧炤), 연진(演眞), 혜관(慧觀), 응진(應眞), 응여(應如), 서웅(誓雄), 창선(暢禪), 각린(覺隣) 등은 〈두 선사의〉 교훈을 받들어 서로 이어 주지(住持)를 맡아온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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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明月), 원걸(元傑), 현오(玄悟), 혜소(慧紹), 사혜(思慧), 선수(善修), 자묘(資妙), 상준(尙俊), 탐웅(探雄), 혜탐(惠探), 진원(進元), 선응(善應), 종간(宗幹), 승량(承亮), 지원(志圓), 현심(顯心), 쌍묘(雙妙), 남정(南正), 진간(眞幹), 낭명(朗明), 창영(暢英), 지준(智俊), 의정(義貞), 영선(令宣), 연경(連景), 법영(法英), 정심(正心), 종혜(宗惠), 영우(靈祐), 증원(證元), 증명(證明), 종현(宗賢), 선청(善淸), 청오(淸悟), 교자(敎資), 청담(淸湛), 도훈(道訓), 지견(志堅), 영충(令冲), 승총(勝聦), 준오(俊悟), 덕충(德冲), 수영(守英), 심오(尋奧), 선원(善元), 연수(延壽), 청예(淸銳), 현각(玄覺), 교남(敎南), 창명(暢明), 선충(善冲), 연원(演元), 여현(麗賢), 의명(義明), 지철(至哲), 영오(英悟), 석진(釋眞), 자원(資元), 일여(一如), 석명(釋明), ▨▨, 진오(眞悟), 연묘(延妙), 의린(義鱗), 소관(紹觀), 선겸(善謙), 균오(均悟), 효관(曉觀), 계원(戒元), 순린(順隣), 각융(覺融), 개린(介鱗), 자교(資敎), 선자(善慈), 혜지(惠知), 일선(一先), 응관(應觀), 혜주(惠珠), 원신(元信), 지남(志南), 선함(善含), 요공(了空), 각숭(覺崇), 혜선(惠先), 혜철(惠哲), 원오(元悟), 시각(始覺), 억원(億元), 계선(戒宣), 승린(勝麟), 영언(靈彦), 정유(定猷), 승서(承誓), 묘원(妙元), 응균(應均), 함영(含英), 상종(尙宗), 견일(堅一), 영준(靈俊), 품관(稟觀), 혜쌍(惠雙), 언류(彦流), 견신(堅信), 응선(應先), 혜평(惠平), 각혜(覺惠), 혜원(惠元), 지선(智詵), 보원(甫元), 자균(資均), 도혜(道惠), 지현(之玄), 홍민(洪敏), 의균(義均), 현준(玄俊), 의종(義宗), 영소(靈炤), 의가(義可), 도숭(道崇), 요비(了非), 요원(了元), 영순(靈順), 덕명(德明), 광숭(廣崇), 승관(昇貫), 지염(智琰), 상겸(尙謙), 효종(曉宗), 승회(承誨), 혜여(惠如), 신관(信寬), 석룡(釋龍), 언청(彦淸), 승선(勝宣), 홍준(洪俊), 혜각(惠覺), 신선(信先), 명계(明戒), 성관(成貫), 법명(法明), 분담(分湛), 명대(明大), 오여(悟如), 연자(演資), 선창(善昌), 계승(戒升), 이승(理升), 명오(明奧), 승언(僧彦), 지초(智超), 지오(至悟), 성진(性眞), 승필(承弼), 관청(貫淸), 의혁(義赫), 신정(神正), 자관(資觀), 경련(景連), 이소(理紹), 신연(信緣), 학초(學初), 지량(志良), 도현(道賢), 우청(祐淸), 영균(令均), 혜량(惠良), 지혁(之赫), 언▨(彦▨), 의운(義雲), 신원(信元), 영여(令如), 선여(善予), 사천(思泉), 법혜(法惠), 종예(宗銳), 해현(海賢), 도추(道樞), 혜교(惠敎), 지명(至明), 경승(景升), 지일(之一), 숭언(崇彦), 원소(元炤), 동관(洞觀), 지여(智如), 이심(理心), 지수(志修), 원도(元道), 성준(成俊), 종겸(宗謙), 신전(信全), 도상(道常), 혜연(惠然), 원청(元淸), 학진(學眞), 성현(性賢), 언경(彦卿), 도웅(道雄), 선엄(善嚴), 언웅(彦雄), 존정(存正), 혜염(惠琰), 학관(學觀), 언유(彦猷), 성선(誠善), 혜아(惠牙), 정림(正林), 특현(特賢), 영혜(令惠), 우현(祐賢), 의룡(義龍), 상현(尙賢), 종보(宗輔), 신수(信守), 도균(道均), 언자(彦資), 학묘(學妙), 의향(義香), 원실(元實), 혜사(惠思), 순심(順心), 언립(彦立), 승겸(勝謙), 혜민(惠敏), 경부(景夫), 승효(承曉), 정해(正解), 성연(性延), 신현(信賢), 의인(義仁), 처▨(處▨), 언종(彦宗), 처원(處元), 언승(彦升), 영주(令周), 혜부(惠夫), 정상(定常), 사남(師南), 선학(善學), 언혜(彦惠), 겸상(謙常), 승연(勝延), 의지(義池), 지종(智宗), 승연(承延), 혜당(惠幢), 광선(光善), 언실(彦實), 언혁(彦赫), 학순(學純), 경▨(景▨), ▨▨, 이혁(里奕), 혜겸(惠謙), 혜택(惠澤), 지청(智淸), 성량(性良), 의연(義延), 언소(彦素), 언관(彦寬), 영필(令必), 순사(順思), 소남(炤南), 경소(景素), 계향(戒香), 경남(景南), 관의(寬義), 일초(日初), 순자(順資), 응남(應南), 득남(淂南), 영남(令南), 혜엄(惠嚴), 학충(學冲), 준서(俊胥), 의준(義俊), 도석(道碩), 석련(釋蓮), 혜명(惠明), 이약(理若), 효장(孝長), 언남(彦南), 영연(瑩然), 성담(性潭), 성서(性胥), 처신(處神), 학영(學英), 존의(存義), 준혁(俊赫), 종필(宗必), 혜혁(惠赫), 승민(承敏), 언상(彦常), 정선(正先), 순오(純悟), 신남(信南), 연우(連祐), 개혜(開惠), 준소(俊少), 혜심(惠心), 성혁(性赫), 달혜(達惠), 도청(道淸), 학련(學連), 혜묘(惠妙), 소현(少賢), 신량(信良), 일승(日升), 경숭(景崇), 현의(玄義), 승실(承實), 소현(炤玄), 순인(順仁), 일충(日冲) 등은 법화를 떨치도록 도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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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간(宗幹), 종혜(宗惠), 각융(覺融), 성각(性覺), 선함(善含), 상겸(尙謙), 혜각(惠覺) 등은 대중을 모아 대사(大事)를 이루도록 도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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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와 같이[右件] 문도(門徒)의 과등(科等)과 순서를 새겨 시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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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대금(大金) 황통(皇統) 원년(元年), 세차(歲次)로는 신유년(1141, 인종 19) 7월 일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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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륜사(王輪寺) 대사(大師) 혜삼(慧參)이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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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림랑 시상서병부시랑 겸 동궁시강학사(文林郞 試尙書兵部侍郞 兼 東宮侍講學士)이며 자색(紫色) 공복과 금어대(金魚袋)를 하사받은 신(臣) 문공유(文公裕)가 왕명을 받들어 글을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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