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제1공화국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 조작을 하자, 이에 반발하여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 혁명이다.
원인
자유당 정권의 오랜 독재 정치와 부정 부패로 국민의 분노가 쌓일 대로 쌓인데다가 1960년 3월 15일의 부정 선거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일어난 혁명이다.
6·25 전쟁 을 겪은 국민들은 전후 복구 사업에 온 힘을 기울여 사회 는 차차 안정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으나, 이승만 대통령 은 전쟁의 책임 문제 등으로 제2대 대통령으로 재선될 가능성이 희박해져 갔다. 이에 집권욕에 사로잡힌 자유당 정권은 국회를 통한 대통령의 간접 선거를 피하기 위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탄압하여 이른바 발췌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승만은 직접 선거를 통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 뒤 1954년의 총선거에서도 관권을 동원하여 승리를 거두고 지배 체제를 강화하여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0년 3월 15일의 총선거에서도 자유당 정권은 부정 선거로 이승만과 이기붕을 대통령과 부통령 에 당선시켜 민주 정치를 바라는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와 같은 일당 독재와 부정 부패 및 부정 선거에 분노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감정이 이 4·19 의거로 폭발하게 되었다.
경과
4·19 혁명의 최초의 도화선은 선거 전인 1960년 2월에 대구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어 3월 1일에는 서울, 대전, 수원에서, 8일에는 대전, 12일과 13일에는 부산과 서울에서 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3월 15일에는 마산에서 학생 시위가 일어났고, 자유당의 부정 선거를 목격한 시민들도 이에 합세하였다.
4월 18일에는 고려 대학생들이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되돌아가던 중 정치 폭력배들의 습격을 받아 부상자가 발생했다. 고려 대학생들의 4·18 데모는 그 다음날 학생들이 총궐기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학생과 시민의 시위는 곧 다른 지방에까지 확대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유 민주 정치의 발전을 기대하는 애국적인 학생과 시민들의 거센 시위는 부정 선거로 당선된 이승만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유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의의
4·19 혁명은 정권을 빼앗거나 체제 변혁을 위한 투쟁이 아니었다. 오직 독재에서 나라를 구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청년 학생들의 불타는 정의감에서 일어난 집단 행동이었다.
4·19 혁명는 학생이 주동이 되었고, 그 배경에는 온 국민의 호응이 있었다. 그러한 뜻에서 4·19 혁명은 민주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근대적인 시민 투쟁으로서 우리 민족의 민주적 역량을 보여 준 민주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같은 뜻을 길이 간직하고자 4·19 혁명 당시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묘지를 1995년 4월 17일에 4·19 국립 묘지로 승격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