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말엽부터 고려 초까지 중국 달마의 선법을 종지(宗旨)로 삼은 선종을 이어받아 당시의 사회 변동에 따라 산골짜기에서 퍼뜨리면서 당대의 사상계를 주도한 아홉 갈래의 대표적 승려 집단. 일명 구산이라고도 한다.
구산 선문은 첫째, 홍척 국사가 남원 실상사에서 산문을 연
실상 산문, 둘째, 도의 국사가 장흥 보림사에서 산문을 연
가지 산문, 셋째, 범일 국사가 강릉 굴산사에서 산문을 연
사굴 산문, 넷째, 혜철 국사가 곡성 태안사에서 산문을 연
동리 산문, 다섯째, 무염 국사가 보령 성주사에서 산문을 연
성주 산문, 여섯째, 도윤 국사가 능주 쌍봉사에서 산문을 연
사자 산문, 일곱째, 도헌 국사가 문경 봉암사에서 산문을 연
희양 산문, 여덟째, 현욱 국사가 창원 봉림사에서 산문을 연
봉림 산문, 아홉째, 932년에 이엄이 해주 수미산 광조사에서 산문을 연
수미 산문을 말한다.
이들은 단도 직입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直指人心), 중생 이 본래 지니고 있는 불성에 눈뜨고(見性成佛), 대립과 부정을 상징하는 문자를 뛰어넘어 초월의 세계로 지향하며(不立文字), 번거롭고 자질구레한 교리를 일삼은 교종 종파들이 소홀히 다루어 온 부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본래 의미를 따로 전한다는(敎外別傳) 4구의 구절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정리하고 있다. 당시 선사들은 선교들 사이의 상호 위치 정립에서 대립보다 양립의 관계를 선택하였다.
신라 말~고려 초 법맥을 승계의 특징을 살펴보면, 사문 안에서 자유로운 교류를 하고, 다른 가르침이나 스승을 허용하고, 자칫 스승이나 시간 위주의 보수적이고 경색되기 쉬운 사제 간의 관계 설정이 수도자에게 달려 있을 만큼 자유 분방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구산 선문의 성립은 신라 후대에 이르러 이전 시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성장한 지방민의 사회 경제적 토대가 마련되었기에 가능하였다. 비록 특정한 신분 집단 이나 개인의 지원이 있기는 하였지만, 일정한 세력 일변도의 지지 속에서 선종의 기반이 세워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농민 전쟁기를 고비로 호족과 선사들의 밀착 관계가 형성되고, 후삼국의 패권 다툼이 심하였던 곳에서는 세력권의 변화에 따라 연고지의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변화를 찾게 된다.
결국 논리 없이 이심 전심을 중요시하며 참선에 의하여 본성을 터득하려는 선종이 다소 사회성을 띠기는 하였지만, 이전의 화엄종의 대안으로 등장한 신라 말 고려 초의 주요한 이념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