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1~1642] 조선 선조 때의 무신, 시인 . 호는 노계(蘆溪), 무하옹(無何翁)이다.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정세아 아래에서 별시위가 되어 왜군을 무찔렀고, 수군 절도사
성윤문의 군대에 들어가 공을 세웠다. 이후 무과에 급제하여 만호 벼슬에까지 올라 선정을 베풀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지내면서 글짓기에 힘썼다.
그는 도학 사상과 자연애, 애국심에 바탕을 둔 여러 가사와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시조를 남겨 시가 문학사상 정철, 윤선도와 함께 3대 시가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박인로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작가로서, 그의 가사 작품에는 여러 가지 특징적 면들이 포함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수군(水軍)으로 종군해서는 '태평사(太平詞)'와 '선상탄(船上嘆)'을 지었는데 표현은 소박해도 나라를 근심하고 군사들의 용기를 북돋우고자 하는 마음을 뜨겁게 나타냈다. '독락당(獨樂堂)', '소유정가(小有亭歌)'에서는 명승지를 찾아 그 유래와 경치를 찬양했고, '영남가(嶺南歌)'에서는 민심을 돌보러 온 관원의 덕치(德治)를 찬양하면서 임진왜란 후 백성이 조석(朝夕)을 잇지 못하면서 부역에 시달리는 사정을 나타내었다.
그는 유자(儒者)로서의 당위와 궁핍한 현실 사이에서 깊이 고심했는데, 이런 문제 의식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노계가(蘆溪歌)'와 '누항사(陋巷詞)'이다. 이들 작품에서 박인로는 안빈낙도하는 이상적 삶을 노래하면서도 궁핍하고 누추한 현실에서 오는 갈등과 괴로움을 핍진(逼眞)하게 그리고 있다. 특히 '누항사'에서는 지금까지 가사에 등장하지 않았던 일상 생활의 언어를 대폭 받아들여 생동감과 구체성을 획득하는 탁월함을 보였고 그를 통해 조선 후기 가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선국적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