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3 ~ 1662]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만사, 본관은 청송, 자는 원지이며, 아버지는 감찰 설이다.
1620년(광해군 12)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대북파인
이이첨과 가까웠으나 이에 가담하지 않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 반정 후 검열로 등용된 뒤 정언· 부교리·교리·헌납 등을 지냈다. 1630년(인조 8) 함경도 안찰어사로 파견되어 6진 방어에 대한 대책을 진언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수비하다 함락되자 남한산성에서 왕을 호위하는 한편 조익 등과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화의로 해산, 1650년(효종 1) 평안도 관찰사, 이듬해 이조 판서를 거쳐 우의정, 그리고 좌의정에 이르러 중추부 영사가 되었다. 1657년 청나라에 사행하고 돌아와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원상으로 국정을 맡고 총호사로서 효종 상례 에 책임을 졌다. 현종이 즉위하면서 자의 대왕 대비의 복제 문제로
서인의 영수로서
송시열의 뜻을 좇으면서도 남인인
조경을 적극 신구(죄가 없음을 사실대로 밝혀서 구해 주는 것)하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적 견해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즉, 김홍욱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신구하지 못하였다든가, 강화 설진을 반대하였다든가, 또는 양역의 폐를 알고 있으면서도 선비의 가족들에 대한 수포를 적극 반대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저서로는 《
만사고》가 있고, 글씨에 능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그의 글씨로는 과천의 《
정창연비》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