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학이 점차 형식화되어 가자, 왕양명이 실천을 중요시하는 지행 합일설(知行合一說)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였다.
이 학설은 안다는 것은 행동하는 첫걸음이며, 행동하는 것은 아는 것의 완성이라 보고, 앎과 행함의 공부는 분리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양명학은 명나라 때 크게 유행하였고, 우리 나라에도 전해졌으나 크게 성하지는 못하였다.
박상(朴祥, 1474~1530)의 《눌재집(訥齋集)》연보 48세 조에 “왕양명 수인의 《전습록》을 변(辨)하다. 명의 학설이 동래(東來)하였는데 동유(東儒)들은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몰랐으나 선생이 그것을 보고 선학(禪學)이라 변척하여 십청(十淸)
김세필(金世弼, 1473~1533)과 더불어 수창(酬唱)한 삼절시(三絶詩)가 있었다.”는 내용을 볼 때 양명학 전래 시기는 중종 16년(1521년) 이전이다. 이후 16세기∼18세기에 조선 유학계에서 양명학의 찬·반 논쟁이 전개되었다. 양명학 배척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그 도입을 억제하고, 양명학 찬성론을 ‘사문난적(斯文亂賊)’, ‘이단(異端)’이라고 규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먼저
이황은 「전습록변(傳習錄辨)」을 지어 지행합일설을 비판하였는데, 양명학을 불교의 선학(禪學)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비판했다. 양명의 《대학》 친민설, 심즉리설도 여러 논변에서 비판했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 중에 양명학의 가장 핵심 논지인 치량지에 관한 내용이 없는 것에서 그가 양명의 모든 전적을 충분히 보지 못하고 비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유성룡은 왕양명의 주자학 비판을 조목별로 반박했다. 그 뒤로 퇴계의 문하 뿐 아니라 조선 성리학 전체가 양명학을 배척하여 양명학은 조선에 발 딛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양명학을 받아들인 학자로는
남언경(1528 ~ 1594)과
이요가 있다. 그들을 이어
장유(1587~1638),
최명길이 미미하나마 연구했으며, 특히 장유는 조선 유학계의 주자학 일변도를 개탄하였다. 또한
이익(李瀷)도 주자학의 주지주의(主知主義)적 경향의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비판하고 행(行)을 강조하였다. 이후
정제두(1649~1736)에 이르러 크게 발전했다. 근대 초
정인보·
박은식까지 그 학풍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