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위태로울 때 정부의 명령 없이 스스로 일어나 싸우던 민병. 우리 나라는 예부터 외적의 침입이 잦아 그 때마다 의병이 일어났다. 이들은 지리에 익숙하고, 또 우리 지형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희생으로 큰 전과를 거둘 수 있었는데, 그 중 임진왜란 때와 구한국 말 일제 침략기의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했다.
경상도에서
곽재우에 의해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는데, 농민이 그 주축을 이루고 전직 관리와 사림, 그리고 승려 들이 이를 조직하고 지휘하였다.
대표적인 의병장은 전라도의
고경명과
김천일, 함경도의
정문부, 묘향산의
휴정과 금강산의
유정, 충청도의
조헌 등으로서 이들은 매복과 기습 작전으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 중 조헌은 승병장
영규와 함께
700 의사와 함께 왜적과 싸우다 금산에서 모두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 정신을 이어 받아
을미사변 때부터 일어났다. 그 때의 의병은 강렬한 위정 척사 정신을 이어받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명성 황후의 시해와 단발령에 분격하여 일어났는데, 각지의 민중들이 이에 가담하여
유인석 부대는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 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 운동은 더욱 치열해져 유생들과 전직 관리들을 중심으로 범국민적인 활동을 펴게 되었다.
민종식은 충청 남도 홍성을 점령하였고, 전라 북도의 태인과 순창에서는 유림의 대표였던
최익현과
임병찬의 부대가 크게 활약하였으며, 평민 의병장
신돌석은 경상도 방면에서 항일 투쟁을 폈다.
그러다가 고종이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당하자, 의병 활동의 모습이 달라져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면서 좀더 조직적으로 전개되었고, 무기도 많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지에서 항일 투쟁을 벌이던 의병들은 연합 작전으로 서울 진공 작전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우세한 무기를 갖춘 일본군 때문에 1908년을 계기로 점차 쇠퇴하여 그 활동 무대를 만주와 연해주로 옮기게 되었다.
이 의병 정신은 이후 독립군과 광복군의 투쟁으로 이어져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