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궁중의 음악과 무용에 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
조선 초기의 음악 기관이던 전악서 (典樂署)· 아악서(雅樂署)·악학(樂學)·관습도감(慣習都監)의 4 기관을 1466년
장악서로 일원화하였고, 1470년 장악원으로 개칭하여 이후 1897년
교방사(敎坊司)로 개칭될 때까지 427년 동안 공식적으로 사용한 국립 음악 기관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장악원의 음악 행정을 담당한 관리들은 문관 출신으로, 직제는 당상관인 제조(提調) 2명, 정3품의 정(正) 1명, 종4품의 첨정(僉正) 1명, 종6품의 주부(主簿) 1명, 종7품의 직장(直長) 1명 등 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영조 때 직장이 없어지고 주부를 1명 더 두었다. 음악의 교육과 연주를 담당한 체아직(遞兒職) 녹관(祿官)으로는 정6품의 전악(典樂) 1명, 종6품의 부전악(副典樂) 2명, 정7품 전율(典律) 2명, 종7품 부전율(副典律) 2명, 정8품의 전음(典音) 2명, 종8품의 부전음 4명, 정9품 전성(典聲) 10명, 종9품 부전성 23명 등 모두 46명을 두었다. 이들은 악사(樂師) 2명, 악공(樂工) 26명, 악생(樂生) 14명, 관현맹(管絃盲) 4명 등이었다.
악생은 양인 출신으로 장악원의 좌방에 소속되어 제례 의식 때 아악을 연주하였고, 악공은 천인 출신으로 우방에 소속되어 연회 때 향악과 당악을 연주하였는데, 이들이 장악원 음악 활동의 주축이었다. 궁중의 내연에서는 관현맹·여자 기생· 무동 등이 연주를 하기도 하였다. 관현맹이란 맹인 중에 관현악 연주를 담당하였던 종9품 부전성 관직이다. 그 밖에 잡무를 담당하였던 차비노(差備奴) 7명, 행정 관리를 수발하였던 근수노 5명을 두었다.
한편 장악원은 예조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제례·연회·조의(朝儀)·대사객(待使客) 등에서 실제적인 음악 활동을 하였다. 종묘·영녕전·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소경전(昭敬殿)의 제례 때는 속부제악(俗部祭樂), 풍운뇌우·사직·우사(雩祀)·선농·선잠(先蠶)·문선왕의 제례 때는 아부제악(雅部祭樂), 국왕이 문무 백관과 조회하거나 국왕과 왕비의 생일, 문무과의 전시(殿試)와 생원· 진사과 급제 발표 등에서는 전정고취(殿庭鼓吹)를 연주하였다. 이러한 장악원의 전통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잠시 중단된 시기를 제외하고는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장악원은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로 개편되었으며, 8·15 광복 후에는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로 고쳤다가, 1951년 국립 국악원이 설립되면서 장악원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