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5 ~ 1805] 조선 제21대 왕인 영조의 계비. 본관은 경주로 성은 김(金)이며 오흥 부원군
김한구의 딸로 출생하였다. 영조의 정비인 정성 왕후 서씨가 죽자, 1759년(영조 35)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자신보다 51세나 나이가 많은 영조와 결혼하여 왕비로 책봉되었다.
슬하에 자식은 두지 못하였지만,
사도 세자와 갈등이 있었고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이는 그녀의 친정은 노론의 중심 가문이었으나, 사도 세자는 소론 쪽에 우호적인 경향을 보이며 노론에게는 비판적이었던 것에 원인이 있기도 하였지만, 사도 세자 내외가 어머니뻘인 자기보다 10살이나 나이가 많다는 것도 갈등을 빚게 하는 다른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던 중
1762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가혹하게 죽이는 일에 그녀도 아버지 한구의 부추김을 받아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사도 세자는 그의 그릇되고 도덕에 어긋나는 행위들에 대한 나경언의 상소에 의하여, 서인으로 폐위당하고 결국 뒤주 속에 갇혀 굶어 죽었던 것이다.
그 뒤 영조 말년에는 그녀의 동생인
김구주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사도 세자 의 장인인
홍봉한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대립하였으며, 이어 정조대에는 사도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와 그에 반대하는 '벽파'가 대립하였는데 그녀는 당연히 김귀주의 세력과 벽파를 두둔하였다.
1800년에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자, 모든 신하들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하여 수렴 청정을 시작하였다.
자신을 여주 또는 여군으로 칭하며 실질적인 국왕의 모든 권한과 권위를 행사하며 국정을 주도하였고,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는 개인별 충성 서약을 받았으며, 신하들도 왕의 신하가 아니라 그녀의 신하임을 공공연히 말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큰 권한을 갖게 되자 정조의 장례가 끝나기가 무섭게 사도 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정조의 이복 동생인 은언군 인과 혜경궁 홍씨(정조의 친어머니)의 동생인 홍낙임 등이 죽음을 당하였다.
이어 벽파인 공서파 등과 한 통이 되어 시파인 신서파를 모함하고, 가톨릭교에 대한 금압령을 내리는 등 심하게 가톨릭교를 탄압하여
신유박해를 일으켰다.
이 때 이가환· 정약종 등 가톨릭교 간부들이 죽음을 당하였고, 정약전· 정약용 등이 전라도 지방으로 유배당하는 등 남인들이 축출되었다.
또, 친정 사람들인 김관주·김일주·김용주 그리고 영의정이었던 심환지 등과 함께 몇몇의 종친(임금의 친족)들에게도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하였고, 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혁파하는 등 정조가 세웠던 정치 질서를 부정하였다.
그러나 벽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시파인 김조순의 딸이 정조가 결정하였던대로 순조의 비가 되자 시파가 세력을 얻기 시작하였다.
1803년 12월에 정순 왕후의 수렴 청정은 끝났고 이어 벽파는 세력을 잃고 조정에서 숙청되었으며,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였던 그녀의 친정 사람들도 대부분 물러나게 되었다.
한편, 국정을 운영함에 있어서는 민생 문제의 해결을 위해 비변사· 관찰사· 수령으로 이어지는 통치 질서의 확립을 강조하고 과단성 있는 정치를 수행하는 등 국가의 질서와 안정을 확고히 하였다.
1772년에 예순· 성철·명선·융인 등의 존호를 받았고, 시호는 정순이므로 정식 칭호는 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융인소숙정헌정순왕후김씨이며, 능호는 원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