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 활자를 만들던 곳. 1403년(태종 3년)에
승정원 안에 설치하고
계미자를 만들었다. 1460년(세조 6년)에
교서관에 소속되었다가, 다시 1782년(정조 6년)에 교서관이
규장각에 속하게 되면서 규장각 소속이 되었다.
이 곳의 기술자는 장인이면서도 대우가 좋았고, 그의 처자에게도 월급을 주었다고 한다.
주자를 주조하는 경우는 주자도감을 임시로 설치하거나 지방감영 또는
수어청(守禦廳) 등에 명하여 만들어 냈지만, 그 주자는
교서관으로 보내져 인쇄에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교서관에 합속, 운영되어 오다가 조선 초기와 같이 따로 분리, 운영된 것은 정조 때이다.
정조는 조선의 문예를 흥융시킨 호학(好學) 임금으로서 새로
규장각을 설치하여 내각으로, 그리고 교서관을 외각으로 삼고 관찬서의 편찬 및 간행업무를 촉진시켰다.
그런데 간행업무를 맡고 있는 교서관의 위치가 떨어져 불편하였으므로 돈화문(敦化門) 바깥 중부 정선방(貞善坊)으로 옮긴 바 있었는데, 주자시설은 어정제서(御定諸書)의 인쇄를 위하여 더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편리하였기 때문에, 1794년(정조 18) 창경궁의 옛날 홍문관(弘文館) 자리에 새로 설치하였다.
이것을 처음에는 감인소(監印所)로 명칭하였으나, 태종 때의 고사에 따라 ‘주자소’로 개칭하였다. 한편 『한경지략(漢京識略)』의 기록을 보면, 정조 때 선인문(宣仁門) 안에 있는 주자소에 ‘奎瀛新府(규영신부)’의 편액을 걸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 별칭인 듯하다.
1800년 윤4월의 기사를 보면, 주자소가 다시 홍화문 오른쪽 익랑(翼廊)의 의장고(儀仗庫) 대청으로 옮겨져 운영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1857년(철종 8) 10월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빈전도감(殯殿都監)에서 일어난 화재로 인하여 대청(大廳)은 물론 판당고(板堂庫)가 모조리 불타서 그곳에 있었던 정유자(丁酉字) · 한구자(韓構字) · 정리자(整理字)와 인쇄도구, 그리고 책판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858년에 한구자 · 정리자를 다시 주조하고, 교서관에 두었던 임진자(壬辰字)와 함께 한말까지 인쇄에 사용하였다. 이들 활자를 비롯한 그 밖의 활자 일부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래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인용】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