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1 ~ 1910] 조선의 학자. 자는 형오(馨五), 호는 석정(石亭). 본관은 신평(新平). 실학(實學)에 조예가 깊었고, 시문(詩文)에 능했으며, 글씨ㆍ그림에도 뛰어났다.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에서 태어났다. 나면서 총명하여 4세 때 『천자문』을 읽고 5세 때 주화인 엽전을 한눈에 보고 종이에 묘사하였는데 원본과 똑같아 신동으로 불렸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12세 되던 해 강회민(姜會民)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이듬해에 안정봉(安廷鳳) 문하에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산학과 예학을 두루 익히고 실학사상에 눈을 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시문과 술수(術數)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기도 하였다.
27세 때는 관직 없는 야인으로 중국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였다. 중국 연경을 돌아본 이정직은 동서양의 문물을 보고 새로운 식견을 얻었으며, 동서양의 사상을 절충하는 새로운 학문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또한 연경에 머무는 1년 여 동안 중국 시문학에 대한 고증과 평론, 정주학과 양명학, 칸트와 베이컨 등 서양 철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동서양의 학문 성취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고, 그 학문적 성과를 『연석산방미정고(燕石山房未定藁)』 등으로 묶어 냈다.
서예에 조예가 깊어 해서는 구양순체의 필법에 안진경체의 특징을 가미하기도 했으며, 행서는 동기창의 서풍 등 다양한 서체를 구사하였다. 화법에도 능하여 사군자와 산수는 물론 어류, 조류, 수목, 괴석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특히 「괴석도」는 필법이 매우 특이하여 당대의 으뜸으로 꼽을 만하다.
이정직은 김제 서예의 맥을 형성하였고, 간재(艮齋)
전우(田愚)와 함께 호남 유학을 이어 놓았으며, 학문과 인격이 뛰어나 매천(梅泉)
황현(黃玹), 해학(海鶴)
이기(李沂)와 함께 호남의 삼재(三才)로 일컬어졌다.
이정직 문하의 서예가로는 유재
송기면, 학산
정우칭, 벽하
조주승, 소강
송헌호, 이당
조병헌(趙秉憲), 석전
김연호(金然灝), 이운
나갑순(羅甲淳), 오당
강동희(姜東羲), 설송
최규상, 유하
유영완, 학헌
최승현(崔承鉉),
정로식,
정한조,
곽탁 등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