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5 ~ 1842] 조선 후기 형조판서, 예조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문인.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평여(平汝). 호는 계서(溪西)로 알려져왔으나, 형인
이희평(李羲平)의 호가 잘못 전하여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할아버지는 군자감정 이산중(李山重), 아버지는 예조참판 이태영(李泰永)이다. 뒤에 친척 이현영(李顯永)에게 입양됐다.
1805년(순조 5)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809년(순조 9) 한림도당회권(翰林都堂會圈 : 한림의 인원이 모자를 때에 충원을 위한 특별시험)에 올랐다. 1825년(순조 25) 예부승지 가선대부(嘉善大夫)가 가자(加資)되었으며 1827년(순조 27) 이조참판이 됐다.
1830년(순조 30) 경기감사로 부임하여 칙수불부(勅需不敷)·우역조폐(郵驛凋弊)·환곡모축(還穀耗縮)의 세 가지 병폐를 상소하여 윤허를 얻기도 했다. 경기감사의 임기가 찼으나 주전사업(鑄錢事業)이 막 펼쳐졌기 때문에 계속 감사직을 하다가 1832년(순조 32)에 물러났다.
1833년(순조 33) 경기암행어사 이시원(李是遠)이 주전 통용의 폐해에 대한 계(啓)를 올려 삼사의 탄핵을 받아 황해도 배천으로 유배당했다. 이듬해 신위(申緯)와 함께 풀려났다. 1834년 헌종이 즉위하자, 고부 겸 주청부사(告訃兼奏請副使)로 중국에 갔다.
1837년(헌종 3) 부태묘(祔太廟 : 임금의 삼년상을 마친 뒤에 그 신주를 태묘에 함께 모시던 일) 때 종헌관(終獻官)으로 가자되었고, 공조판서에 올랐다. 1838년(헌종 4) 동지정사(冬至正使)로 다시 중국에 갔으며, 형조판서·예조판서를 거쳐 1840년(헌종 6) 사헌부대사헌을 지냈다.
시문에도 능했다고 한다. 한편, 『
계서야담』이 그의 편저라고 전하나 형인 이희평의 저술이라는 설도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