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 249] 중국 삼국시대
위(魏)의 관료이자 사상가로, 자는 평숙(平叔)이며, 남양군 완현(宛縣) 사람이다. 후한의 대장군
하진의 손자이다.
후한(後漢) 말기 황제의 외척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하진(何進)은 외척으로서 대장군까지 지냈는데, 십상시의 난 때 뜻밖의 죽음을 당하고 만다. 이후 정권을 잡은 동탁에 의해 하씨 일족이 몰살당했는데, 여기서 그의 아버지가 간신히 살아남았으나 일찍 병사했고, 어머니 윤씨가
조조에게 재가함으로써 하안은 조조의 양자가 된다. 이후 조조의 딸인 금향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여 부마(駙馬)가 되었다. 240년 조방(曹芳)이 위나라의 3대황제로 즉위한 후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임명되며 정치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당시 위나라 황실의 실권을 장악했던 조상(曹爽) 일파의 붕당에 가담함으로써 정치적으로는 좋은 평가를 얻지 못했다. 결국 249년에 조상 일파의 권력 독주에 불만을 품은 사마의가 군사를 일으킨 ‘고평릉(高平陵)의 변’에서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는 정치보다는 학문을 통해 후세에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그 자신 삶의 근본을 정치가 아닌 학문에 두어, 현학{玄學}과 유학{儒學}, 도가{道家} 학문에 두루 깊이 연구를 다하여
왕필(王弼)을 발탁하는가 하면 『
논어집해(論語集解)』, 『
주역강소(周易講疏)』, 『
도덕론(道德論)』 등의 여러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당시는 후한 왕조가 붕괴되고 각지의 군웅이 봉기한 군웅할거시대를 거쳐 삼국시대로 이어지던 난세였다. 이러한 혼란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노장老莊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형이상학적 담론, 또는 철학론적 색채가 짙은 현학{玄學]이 발생하게 된다. 하안은 어릴 때부터 영특한 것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는데, 이러한 시대 배경의 영향 하에 어려서부터 노장(老莊)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노장(老莊)과 현학(玄學)에 그대로 머물지는 않았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하안을 철저한 노장학자가 아닌, 인의(仁義)를 긍정하며 유가(儒家)의 기본 이념에 충실한 채 노장학을 연구한 유학자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