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1 ~ 1609]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평산, 자는 백준(伯峻), 호는 독송(獨松)이다. 임진왜란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해 호성공신에 책봉되었다.
신립의 형이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준(伯俊), 호는 독송(獨松)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주부(主簿) 신말평(申末平), 할아버지는 형조판서를 역임한 신상(申鏛)이다. 아버지는 신화국(申華國)이며, 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윤회정(尹懷貞)의 딸이다. 임진왜란 당시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申砬)과 경기 수어사(京畿守禦使)로 임진강 하류에서 전사한
신할(申硈)이 그의 동생이다.
이산해(李山海)의 문인이다.
1568년( 선조 1) 증광시(增廣試)에서 생원에 입격하였고, 1583년(선조 16)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중에는 비변사(備邊司) 당상(堂上)으로 활동하였고,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병조참판(兵曹參判)을 거쳐 평안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로 부임하였다. 1595년(선조 28)에는 평안도 내의 철산군(鐵山郡)에서 탈옥 사건이 발생하여 그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1596년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1603년에는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후 세자시강원의 빈객(賓客)을 겸임하고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역임하였다. 1608년(선조 41) 개성유수(開城留守)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충청도 진천의 논실에 입향(入鄕)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609년(광해군 1) 노환으로 사망하자 예조에서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2일 동안 시장과 조회를 정지하도록 하는 정시조(停市朝)를 청하였고, 광해군이 해당 관청의 전례에 따라 거행하도록 지시하였다. 이후 1613년(광해군 5)에 진천 유생들의 상소에 따라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그를 기리는 노은영당(老隱影堂)이 지금의 자리에 건립되었고 사액(賜額)을 받았다. 1821년(순조 21) 충헌공(忠憲公)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