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4 ~ 1637]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 문신, 정치인, 철학자, 작가, 시인이다.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이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써 이황(李滉)의 문인과 조식의 문인들 사이에 학덕과 실력을 인정받았으며, 수많은 영남의
남인 학자들을 길러냈다.
류성룡(柳成龍) 등의 천거로 여러 차례 내외의 관직을 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하였고 그 중에서 부임(赴任)한 것은 보은현감(報恩縣監)과 의성현령(義城縣令)의 외직과 내직(內職)으로는 공조좌랑(工曹佐郞),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형조참판(刑曹參判), 의정부우참찬 등이다. 1602년(선조 35)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정부의 주역(周易) 교정사업에 참여하고 이듬해 잠깐 의성현령으로 부임했으며 그 외에는 모두 사양하거나 사직, 고사하였다. 그 뒤 형조참판직에 잠시 취임하였으나 이후 계속 관직을 사퇴하였다.
광해군 때 합천군수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인조반정 이후 조정에서 학문적 권위를 인정한 산림(山林)에 꼽혔다. 인조조에도 사헌부지평·집의 등에 여러 번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 전념했다. 이괄의 난 때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어 취임하였고, 이후 형조참판, 대사헌 등에 제수되어 마지못해 취임했으나 사퇴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우참찬에 임명되고 의병을 일으켜 청나라군과 교전하는 한편 군량과 군자물품의 조달과 지원을 주도했으나, 패전 후 실망하여 포항의 입암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유교의 입장에서 온 세상의 만물이 생겨나는 근원을 이르는 태극을 내세우되 일체유(一體儒)와 그 근원을 대답을 기다리는 것과 조화의 논리로 융화 종합하는 철학적 근거를 명시하였다. 이황의 문인인 한강 정구의 조카사위였다. 이황의 학맥이자
영남학파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던 처숙인 정구를 통해 퇴계와 남명의 학통을 사숙하고, 그의 문인으로는 허목, 유진(柳袗) 정극후(鄭克後) 전식(全湜) 김응조 등이 배출되었다. 또한 허목을 통해 근기남인성리학파와 남인실학파로도 학통이 이어졌다. 노수성, 장순의 문인이다.
경상북도 인동 출신.
【인용】위키백과
고려(高麗) 상장군(上將軍) 김용(金用)의 후손이며 덕녕부윤 안세(德寧府尹 安世)의 8대손(八代孫)으로 증이조판서 열(烈)의 자로 명종9년(1554)에 인동 남산(仁同 南山)에서 태어났다.
7세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8세때 부친(父親)을 잃고 11세때 학자인 신당 정붕(新堂 鄭鵬)의 자정각(子鄭殼)이 보고 기상이 굉위(宏偉)하여 이 아이는 반드시 세상에서 특출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18세에 벌써 학문에 통달하여 우주요괄점(宇宙要括岾)을 짖고 그 말미에 이르기를 '능히 천하의 제일사업(第一事業)을 할줄 알아야 바야흐로 천하제일의 인물이 된다'라고 원대하고 굉위한 포부를 들어내기도 했다.
23세때 재사(才士)로 추천되었으며 26세 때에는 거유 한강 정구의 질서가 되어 한강과의 접촉이 시작되었고‚ 그 때 성주목사로 있던 허잠이 한강에게 묻기를 '남방에서 호학하는 선비가 누구더냐' 하니 호학입지를 보아 이사람이 훗날 나의 스승이 될 만하다'하였다고 한다.
선조28년(1595) 42년때 서애 유성용(西厓 柳成龍)이 학행(學行)으로 천거하여 보은현감이 되어 고을의 부자들과 더불어 매월 초하루 보름에 같이 모여 향약회를 행할 때 백성들의 우환병고(憂?病苦) 등의 딱한 사정을 말하게 하고 힘 닫는데까지 도와주고 덕을 권장하고 효도와 우애를 돈독히 하고 염치를 권장했으니 온 고을이 크게 감화를 하였다. 그 후 1년만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니 다시 거창현감‚ 공조좌랑‚ 형조좌랑‚ 용담현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의성현령 역시 반년만에 사퇴한 후 선산 월파촌으로 옮겨 살았다.
광해조때 다시 여천군수‚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불취하였다. 인조반정(1623)이 있은 다음 사헌부지평‚ 성균관사업‚ 사헌부분령등을 제수하였으나 중도에서 모두 칭병사양(稱病辭讓)하고 이괄의 난때 인조가 공주로 남천했다가 천도함에 행재로 나아가 양재역에서 장령을 제수하고 자정전에서 위정(爲政)의 소견을 물으니 '먼저 마음속에 대강령을 정하소서'하니 이르기를 '대강령이란 무엇인고' '그것은 오직 성상의 마음에 달려 있으니 분발하고 진작하여 마음을 새롭게 한즉 효과가 매우 클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다시 그 후 사언부집의‚ 공조-이조참의‚ 동부승지‚ 형조참판‚ 대사헌-이조참판 등을 제수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공은 조용히 학문에만 정진하고 면학요회‚ 역봉총설급구설‚ 우주설‚ 태극설‚ 도서발휘 등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