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례의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 파견 이후,
1636년에서 1637년에 걸쳐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던 대일 국교를 정식으로 재개한 사행. 병자통신사(丙子通信使).
막부장군이 국서를 보낸 것에 대하여 조선이 ‘회답’하고, 임진・정유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포로를 ‘쇄환’한다는 두 가지 목적으로 파견한 조선국왕의 사절인 회답겸쇄환사가 1607년・1617년・1624년 3차례에 걸쳐 파견되었다.
1636년(인조 8)년 이루어진 병자사행은 회답겸쇄환사 파견 이후,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던 대일 국교를 정식으로 재개하고 태평을 축하하기 위해 이루어진 사행이다.
정사
임광(任絖), 부사
김세렴(金世濂), 종사관
황호(黃㦿), 제술관 권칙(權侙), 서기 문홍적(文弘績) ‧ 문필(文邲), 역관 홍희남(洪喜男) ‧ 강위빈(姜渭賓) ‧ 강우성(康遇聖) ‧ 이장생(李長生), 사자관 전영(全榮) ‧ 박지영(朴之英) ‧ 조정현(趙廷玹), 화원
김명국(金明國) ‧ 하담(荷潭), 의원 백토립(白土立) ‧ 한언협(韓彦脇) 등이 파견되었으며, 1636년 8월 11일 한양을 떠났으며, 10월 6일 부산을 출발하여 이듬해 2월 25일에 돌아왔다.
이번 사행에서 일본은 쓰시마도주를 통해 사행단의 닛코산(日光山) 유람과 참배를 처음으로 요청했으나, 조선 측은 전례에 없던 일이며, 도쇼구 참배에 대한 국명(國命)이 없었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러나 국서개작사건인 야나가와잇켄(柳川一件) 이후 쓰시마도주의 입장을 세워주고 일본과 평화유지를 공고히 한다는 대일 기본원칙 때문에 닛코산 ‘유람(遊覽)’ 만을 승낙했다.
한편, 일본 경학파(京學派) 문사의 등장과 사행단 내 이두문관(吏文學官)과 서기(書記) 직임이 신설된 가운데, 양국 문사의 필담창화가 촉발되었으며, 독자적인 필담창화집이 처음 성립되었다.
본 사행의 기록으로 임광(任絖)의 『병자일본일기(丙子日本日記)』, 와다 세이칸가(和田靜觀窩)의 『조선인필어(朝鮮人筆語)』, 이시카와 조잔(石川丈山)의 『조선필담집(朝鮮筆談集)』 등이 있다.
【인용】조선시대 대일외교 용어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