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7~151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이며,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적이다. 1474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77년에는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주서· 홍문관 정자· 의정부 사인 등을 지냈으며,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초기에는 다시 홍문관으로 옮겨 전한·직제학· 부제학 등을 맡아 보았다. 1497년 승정원 동부 승지가 되었으며, 1498년에는 좌승지를 거쳐 그 해 여름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 관찰사·경상도 관찰사· 경기도 관찰사를 맡아 보았다. 1499년에는 예조 참판으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성학심법》 4권을 구하여 왔다. 1503년 경상도 관찰사· 형조 판서 겸 춘추관 지사· 홍문관 제학 등을 거쳐서, 1504년에는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이 해에 갑자사화가 일어났을 때, 그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복권을 주장하여 연산군의 신임을 받았으며, 이로 하여 정헌 대부에 오르기도 하였다. 1506년에는 어머니상을 당하여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왕명으로 어머니에 대한 상(喪)을 짧게 줄여 마치고 우의정 에 부임하였다. 연산군의 신임을 받았던 그는 왕의 폭정에도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도록 애썼다. 그러나 갈수록 심해지는 연산군의 폭정에, 1506년 연산군을 폐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는 중종 반정에 참여하였다. 그 공으로 좌의정에 올랐으며, 정국 공신 2등과 영가 부원군에 봉해졌다. 1510년에는 영의정에 올라 그 해에 일어난 3포 왜란을 총지휘하여 진압하였다. 연산군에게 충실하였음을 들어 비난을 받기도 하였으나, 품성이 단정한 데다 청탁을 받아들이지 않는 강직함을 지니고 있었으며, 연산군의 폭정으로부터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하는 등 어려운 시대를 비교적 무난하게 살아왔다. 예서를 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