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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돌무지 덧널 무덤([積石木槨墳])
돌무지 덧널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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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무지 덧널 무덤 ([積石木槨墳])
지상이나 지하에 무덤광을 만들어 상자 모양 나무덧널을 넣은 뒤 그 주위와 위를 돌로 덮은 다음 다시 그 위를 점토 등의 흙으로 다진 무덤. 신라에서만 보이는 특수한 무덤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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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기순 (1 ~ 4 위)
2020.06.03
경북 의성 대리리에서 삼국시대 의성지역 고유 무덤양식 고분 발견
【문화】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의 허가를 받아 (재)성림문화재연구원(원장 박광열)이 지난 달부터 조사하고 있는 의성 대리리 44호분에서 삼국 시대 의성지역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무덤 형식인 ‘유사 돌무지덧널무덤’ 양식으로 추정되는 고분을 확인하였다.【발굴제도과】
2019.09.30
【문화】 호석과 그 주변에 대한 이번 조사는 예상을 뛰어 넘는 성과를 거두었다. 내년 3차 조사에서 매장주체부까지 확인하면 금령총의 전체 구조 및 축조기법이 명확하게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 【학예연구과】
◈ 등록순
2020.06.03
경북 의성 대리리에서 삼국시대 의성지역 고유 무덤양식 고분 발견
【문화】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의 허가를 받아 (재)성림문화재연구원(원장 박광열)이 지난 달부터 조사하고 있는 의성 대리리 44호분에서 삼국 시대 의성지역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무덤 형식인 ‘유사 돌무지덧널무덤’ 양식으로 추정되는 고분을 확인하였다.【발굴제도과】
2019.09.30
【문화】 호석과 그 주변에 대한 이번 조사는 예상을 뛰어 넘는 성과를 거두었다. 내년 3차 조사에서 매장주체부까지 확인하면 금령총의 전체 구조 및 축조기법이 명확하게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 【학예연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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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쪽샘 44호 적석목곽묘 발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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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2)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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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이나 지하에 무덤광을 만들어 상자 모양 나무덧널을 넣은 뒤 그 주위와 위를 돌로 덮은 다음 다시 그 위를 점토 등의 흙으로 다진 무덤. 신라에서만 보이는 특수한 무덤 형태이다.
 
무덤 구조는 덧널·돌무지·둘레돌· 봉토 등 4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덤의 겉모양에 따라 표주박형 무덤과 원형 무덤으로 나누는데, 2개 이상의 무덤을 연결한 형태가 표주박형 무덤이다. 그것을 다시 무덤의 원래 주인을 모신 널 외에 딸린 덧널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구분하고, 무덤 덧널의 수 등으로도 구분한다.
 
일반적으로 널이 하나 있는 외널묘와 널이 여러 개 함께 있는 여러널묘로 분류된다. 연구 초기에는 이 2가지 형태의 묘가 서로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으나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음이 밝여졌다.
 
여러널묘에는 명칭 그대로 여러널묘와 집단묘, 그리고 부부를 합장한 표주박형 무덤 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쓰던 묘지이고,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외널묘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외널묘에는 황남동 제109 호분과 천마총, 그리고 호우총 등이 있다.
 
한편, 널이 어느 곳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지하식·지상식·반지하식 등으로도 구분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덤이 지하식이며, 추가로 유해를 모시지 못하는 구조를 가진 홑무덤이라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지상식으로는 천마총·황남대총·서봉총· 금관총 등이 있다.
 
돌무지덧덜무덤의 나무덧널을 덮는 돌로는 주로 냇돌을 사용하여, 직사각형이나 머리 부분이 잘린 원기둥꼴 형태로 쌓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무덧널이 썩어 내려앉기 때문에 나무덧널을 덮은 돌이 무너져 전체 모양이 마치 낙타등처럼 된다.
 
돌을 쌓은 다음엔 그 위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점토를 두껍게 바른다. 봉토는 거의 원형으로 쌓는데, 원래 돌무지 규모가 큰 데다 그 위를 덮은 봉토 역시 대규모여서 신라의 고분이 고려나 백제 보다 상당히 대형화되어 있다.
 
고분에 따라서 둘레돌을 세운 것도 있는데, 둘레돌의 재료로는 주로 냇돌을 이용하였지만 막돌을 쓰기도 하였다. 둘레돌을 세운 이유는 봉토를 보호하려는 목적 이외에도 묘소로 정한 구역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경계 표시였던 것 같다.
 
딸린 덧널을 가진 나무덧널무덤은 경주 조양동 고분군 중에서 하나가 발견되지만, 4세기의 경주 정래동 고분에서도 나타난다. 정래동 고분군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아 자세한 부분은 알 수 없으나, 3 기가 모두 높이 30m 되는 언덕의 정상에 있으며, 찰흙 을 기왓가마에서 구워 낸 와질 토기가 아직 남아 있고, 금동 제품이 없지만 철제 무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경주 시내의 고분보다 앞선 4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정래동 고분군의 1호분처럼 구릉 위에 으뜸덧널과 딸린 덧널이 있는 나무덧널무덤인데, 이것을 평지로 옮겨 와서 돌을 덮고 봉토를 씌우면 바로 돌무지덧널무덤이 완성되는 것이다. 정래동과 같은 봉토분은 부산 복천동 학소대와 경산 임당동에도 있는데, 그것은 조양동 고분이 낙동강 동안 지방에 영향을 주어 한 고을을 단위로 형성되었던 성읍 국가의 지배자를 위한 무덤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다시 경주에까지 영향을 미쳐 돌무지덧널무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돌무지덧널무덤이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론들이 있다. 즉, 북방 기마 민족이 한반도로 내려오면서 한반도에 완성된 돌무지덧널무덤 을 전파시켜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시베리아 의 쿠르간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학설로 전파론적인 입장의 견해이다.
 
반면에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돌무지덧널무덤 이 발생했다는 자체 발생설이 있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나무덧널무덤의 전통이 돌무지무덤의 영향을 받아 성립했다는 것이다. 이 학설은 또 어느 시대의 돌무지무덤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청동기 시대에 보이는 고인돌의 돌무지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입장과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돌무지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경주에서 발견된 돌무지덧널무덤 은 나무덧널 위에 돌무지를 씌우고 다시 그 위에 봉토를 덮은 형태이고, 언덕 위에 있던 무덤이 평지로 내려오게 었을 뿐만 아니라 갈수록 무덤이 대형화되면서 한편으로는 나무덧널을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또 한편으로는 봉토의 거대화를 위해 고인돌과 같은 돌무지 전통에서 그 기법을 배운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돌무지덧널무덤은 몇 단계의 발전 과정을 거쳐 대형화되었으며 평지 무덤 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돌무지덧널무덤은 발생기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형태에서 몇 단계의 발전 과정을 거쳐 경주 황남대총과 같은 대형분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돌무지덧널무덤 이 유행하던 시기는 대략 5세기 후반기로 보인다. 특히 울산 지역 중산리의 돌무지덧널무덤은 나무덧널무덤에서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자연스럽게 변해가는 과정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결국 돌무지덧널무덤은 4세기 전반에 일어나서 6세기 전반에 없어진 묘제로서 이 시기의 신라왕이 모두 마립간으로 불렸기 때문에 마립간 및 귀족의 묘제라고 할 수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은 특이한 구조 때문에 도굴이 쉽지 않아 다른 종류의 고분에 비해 부장품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금관총을 비롯해서 경주 분지 내의 여러 무덤 에서 순금으로 만든 금관이나 각종 귀금속과 장신고 등이 잘 보존된 이유는 그러한 구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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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