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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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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墓)
사람의 사체나 유골을 묻어 두는 구조물. 묘 또는 분묘라고도 한다. 무덤의 의미는 사체나 유골을 처리하는 장소적 의미를 가지면서 한편으로는 죽은 사람을 제사 지내기 위한 장소나 시설물을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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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무덤을 껴안고 근/현대 시 홍사용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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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사체나 유골을 묻어 두는 구조물. 묘 또는 분묘라고도 한다. 무덤의 의미는 사체나 유골을 처리하는 장소적 의미를 가지면서 한편으로는 죽은 사람을 제사 지내기 위한 장소나 시설물을 말하기도 한다.
 
화장을 할 경우의 시체 처리장인 화장터는 무덤과 다른 것이며, 사원이나 집에 모시는 위패당이나 영묘·불단· 납골당 등은 제사 를 지내기 위한 의미를 가지므로 무덤과는 구별하고 있다.
 
무덤을 만들게 된 배경은, 죽은 사람의 사체를 보호하자는 데 있었으나 점차 성격이 바뀌어 죽은 사람을 오랫동안 옆에 두고 기억하기 위한 기념물적인 성격으로 변하였다. 이에 따라 무덤 양식은 그 당시의 생활 모습과 풍습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토장(땅에 묻는 방식)·수장(물에 띄워 보내는 방식)· 화장(불에 태우는 방식)· 풍장(땅 위에 두어 짐승에게 잡아먹히게 하는 방식) 등인데, 이것은 무덤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다.
 
토장 형태의 묻는 방식은 큰식(횡렬식)과 구덩식으로 나누어지는데, 큰식은 지면과 수평으로 판 널길을 이용하여 널방(현실: 무덤 안)을 만드는 방식이고, 구덩식은 직사각형으로 땅을 깊게 파고 구덩이에 사체를 넣고 돌이나 널빤지로 덮는 방식을 말한다.
 
또한 무덤은 지역과 시간에 따라 폭넓게 퍼져 있으며, 표현 방식도 여러 가지이다. 이를테면 피라미드 처럼 특이한 것도 있고, 우리 나라를 비롯한 한자 문화권 에서는 무덤을 분·총·영·묘·능과 같이 구분되어 사용하고 있지만 구분 방법은 뚜렷하지 않다. 그 뜻을 알아보면, 일반적으로 임금의 무덤을 능이라 말하고, 총은 흙으로 무덤을 만든 다음 나무를 심어 놓은 무덤이고, 묘는 흙으로 쌓아올리지 않고 구조물로서 무덤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이 언제부터 죽음을 생각하고 무덤을 만들게 되었고, 죽은 사람에게 애착을 가졌는가 하는 ' 무덤의 변천'에 대한 것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의 여러 자료에 의하면 최초로 무덤을 만든 것은 10만 년 전 중기 구석기 시대였던 것 같다. 이라크의 샤니다르 동굴에서 땅을 파고 사체를 넣은 다음 그 주변에 꽃을 꽂아 놓았음이 밝혀졌는데, 이는 구석기 시대 사람의 믿음과 죽은 사람에 대한 경건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에 있는 동굴에서는 어른과 어린이를 합장하고 어른의 머리 부분에 넓적한 돌을 덮어 놓았다. 중앙 아시아와 타시크탓슈에서는 어린이를 눕히고 주변에 염소 뿔을 꽂아 놓았다.
 
후기 구석기 시대에는 죽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져 부장품을 함께 넣기도 하고, 피의 상징인 붉은 흙을 주위에 뿌려 부활이나 영생을 빌기도 하였다. 이 시대의 우리 나라의 무덤 형태는 알 수 없다.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 공동체의 생활 양식의 변화와 공동의 힘이 생기면서 고인돌과 같은 커다란 돌을 이용한 무덤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에서도 이 시기에 고인돌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는 곳이 있다.
 
청동기 시대에 와서는 도시 혁명 등을 통한 사회 구조의 변혁 등으로 국가가 세워졌으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무덤이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그 예가 피라미드이며, 그 크기는 엄청났다. 길이가 230m이고, 높이가 146m이며, 2.5t짜리 돌이 무려 230만 개나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이 시기에 순장과 같은 거대한 무덤의 형태가 나타났는데, 안양의 무관촌에 있는 은나라의 무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다음으로 무덤을 만든 방식이나 사용했던 재료 등에 따른 '무덤의 유형'을 구분하여 나누어 볼 수 있다.
 
사람들에게서 최초로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지금까지도 일반적으로 쓰여지고 있는 형태는 널무덤(토광묘, 토장)의 형태이며, 구덩이를 파고 묻는 방식으로 다른 구조물이 없어 그 구조가 극히 간단하다. 돌무덤은 맨땅 또는 구덩이에 사체를 놓고 돌을 쌓는 방식으로 춥고 바람이 거센 시베리아 초원 지대에서 널리 이용되며, 우리 나라에서는 강가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다.
 
고인돌은 고이는 돌이 있는 무덤으로 프랑스의 브르타뉴 지방을 비롯하여 스칸디나비아 반도 · 대서양 지역· 지중해·인도·우리 나라와 동북부 지역 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다.
 
고인돌의 구조는 고인돌의 형태에 따라 탁자식·바둑판식·구덩식 고인돌로 나누어진다. 넓적한 판돌에 뚜껑과 네 벽을 상자 형태로 만든 돌널무덤은 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상류에서 비롯되었으며, 주변에 판돌이나 네모난 돌로 울타리를 만들었다. 중국 동북 지역의 랴오허· 지린 ·즈펑· 한반도에 걸쳐 널리 분포되며, 시베리아 지역 과 차이가 있다.
 
또한 사체를 넣는 방법에서 직접 묻는 방식과 나무덧널에 돌덧널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으며, 중국 동북부 지역과 우리 나라에서는 청동기 시대로부터 삼국 시대 때에 이르기까지 널리 이용되었다.
 
중국이나 우리 나라 고구려의 것은 궁륭식(한가운데가 제일 높고 차차 낮아지는 하늘 형식) 모양의 천장과 옆방이나 감실(제대 위에 성채를 모시는 작은 궤짝)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독무덤은 독에 사체를 넣어 땅에 묻는 방식으로 선사 시대 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벽돌 무덤은 중국 전한 때부터 송나라 때까지 많이 만들어졌으며, 백제의 무열왕릉도 이 양식으로 만들어진 무덤이다. 돌무지 덧널무덤은 땅을 파고 나무덧널을 넣고 돌로 쌓은 다음 흙으로 쌓아올렸는데, 경주 지방에서 유행되었다. 덧널무덤은 흙만 쌓아올린 형태이며, 철기 시대에 유행하였다.
 
무덤은 지역에 따라 그 구조나 형태에 차이가 많았다. 우리 나라의 지역적 특성에 따른 무덤의 형태를 알아보면, 동굴 이나 바위 밑에서 구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뼈가 나오고 있어, 우리 나라에서도 아주 오래 전부터 무덤의 형태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 시대에 이르러서는 땅을 파고 사체를 넣은 다음 덮는 널무덤이 유행했다. 이후 무덤의 형태는 고인돌·돌널무덤·돌넛덜무덤·둘무지무덤· 독무덤이 이용되다가 삼국 시대에 이르러 권력의 상징으로서의 무덤 형태인 ' 고분' 형태의 무덤이 나오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무덤의 변천은 돌무지무덤에서 중국의 영향에 따라 돌방무덤의 형태로 변하였다. 돌무지무덤으로 대표적인 것은 장군총이고, 벽화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돌방무덤의 형태로는 쌍영총과 무용총 등이 있다.
 
백제 는 돌무지무덤에서 굴식 돌방무덤과 벽돌무덤의 형태로 바뀌어 갔다.
 
신라 때는 구덩식 돌무지 덧널무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러한 형태의 무덤들은 후대에 이르러서도 잘 보전되어 있어 당시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당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이에 따라 무덤의 주변에 돌사람· 돌짐승 등의 돌로 만든 석물들이 있으며, 특별한 것은 12지신상이 조각되어 무덤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불교의 영향을 받아 화장 도 널리 성행하였으며, 문무왕 수중릉과 같이 수장의 형태도 나타나고 있다.
 
고려 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차등적으로 무덤이 이용되었으며, 풍수 지리설에 입각하여 무덤을 쓰는 풍습이 생겨났다.
 
조선 시대에는 고려 시대의 양식에 유교 사상이 혼합된 형태의 무덤이 유행했다. 돌덧널무덤과 화장묘 등의 형태는 없어지고 널무덤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크리스트교와 서양의 무덤 형태에서 영향을 받은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외형적인 면을 중요시 여기기 시작했으나 기본 골격은 널무덤이 주종을 이룬다.
 
세계 여러 나라의 무덤의 형태를 알아보면, 중국 에서는 봉분 형태의 무덤이 주나라에 처음 나타났으며, 무덤의 표시로서 나무를 무덤의 주변에 심었다. 한나라 때는 죽은 사람의 행적 등을 적은 것도 함께 무덤에 넣었으며, 방위나 땅의 형세에 치중하여 무덤을 썼다. 또한 부부의 합장이 유행되어 남자는 왼쪽에, 여자는 오른쪽에 묻었다.
 
동남아 지역에서는 무덤 주변에 경계의 표시를 하였으며 무덤을 만들고 물소 등의 짐승으로 연회를 열었다. 이와 같은 것은 향응의 의미와 죽은 사람의 죄를 대신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중앙 아시아의 유목민들은 감실이 있는 무덤방을 이용하고 짐승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무덤을 돌로 쌓았다. 유럽에서는 널무덤에서 고인되었다가 큰돌무덤의 형태로 바뀌어 갔다.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무덤을 만들고 껴뭍거리의 색을 서로 다른 위치에 두었는데, 동쪽에는 흰색, 서쪽에는 붉은색, 남쪽에는 초록색, 북쪽에는 검은색을 놓았다. 호피족은 사체의 머리에 가면을 씌우고 새의 깃털 을 같이 묻어 주는 특징이 있다.
 
아프리카는 무덤에 봉분을 만들고 옆에 사당 형태의 집을 지었는데, 이와 같은 의미는 죽은 사람의 혼령이 떠돌아다니다 종국에는 이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살아난다고 믿는 의식에서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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