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교단에서 동학을 널리 알리고 동학 교도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만들었던 가사. '천도교 가사'라고도 한다.
한자를 모르는 민중들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한글로 씌어져서 민중들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받았다. 4음보 연속체로 된 율문(律文)인 전통 가사 형식에 맞추어진 동학 가사는 동학 교도가 노래로 포교하거나 동학 사상을 익히는 데에 주로 사용되었다.
동학 가사는 크게 두 가지 경로로 전해졌다. 하나는 동학 교도들이 암송하거나 노래로 부르면서 전해졌고, 다른 하나는 목판본으로 몇 차례 간행되어 기록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암송이나 노래로 부를 수 있게 한 것은 가사를 지을 때 의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그 내용이 달라지면, 경전으로서의 가치를 잃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기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당시에 가사 가 목판으로 남겨진 것은 매우 보기 드문 경우로 평가된다.
동학 가사의 첫 작품은 최제우(1824~1864)가 1860년(철종 11)부터 1863(철종 13)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1860년에 '용담가', ' 교훈가', '안심가', '검결', '도수가'가 만들어졌고, 1861년에는 '몽중노소문답가'가, 1862년에는 ' 권학가', 1863년에는 ' 도덕가', '흥비가'가 지어졌다.
이 가사들은
최제우가 지은 동학 교도의 포교용 가사집 가운데 하나였던 《
용담유사》에 실려 있다. 《용담유사》에 실린 이 9편의 작품들은, 조선 왕조의 통치는 이미 한계에 이르렀으며 열강들이 곧 조선을 침략해 올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이러한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하려면 가난하고 천한 백성들이 스스로 깨우쳐서 이를 물리쳐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나아가 이를 위해서는 정신적인 지주로서 동학을 일으켜 새로운 세상을 세워야만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주장이었고, 우리 문학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듯 동학 가사는 개화기의 사회상을 심각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전의 가사와는 구별되며, 이러한 가사들은 《독립 신문》 《대한 매일 신보》 등의 신문에 실려 민중 사이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러나 최제우가 관군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게 되자, 그 뒤를 이은 제2대 교주인 최시형(1827~1898)이 비밀리에 교세를 확장하면서 1881년(고종 18)에 충청 북도 단양군에 있는 여규덕의 집에서 1책으로 된 필사본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는데, 이후에도 동학 교단에서는 많은 가사를 지었으며, 《용담유사》 이후의 동학 가사는 필사본과 목판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필사본은 용호 대사의 '궁을가' 이서구의 '채지가' 등 6편이, 홍우가 편찬한 《동학문명》에 수록되어 있다. 이 외에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들도 보인다. 그 가운데는 지은이를 알 수 없는 가사도 있고, 용호 대사라는 미지의 인물이 지었다는 가사도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방대한 것은, 경상 북도 상주에서 별도로 동학 교단을 이끌어 온 김주희가 1922~1933년에 걸쳐 펴낸 동학 가사로 《룡담유》라는 이름의 1책 37장으로 된 목판본이다. 김주희가 간행한 100여 편의 가사에는 '검결' 편이 들어 있지 않은 《용담유사》도 실려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사는 김주희가 직접 지었다. 그 내용은 대부분 관념적인 것이어서 최제우의 가사와는 다르다.
그 밖의 자료는 모두 40책으로, 그 가운데에는 가사집이 아닌 것도 있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도 있다. 김주희는 최제우의 도통을 이어 동학을 창건하였다면서 동학의 정통임을 자처하였으나, 최제우와는 사상 면에서 다른 점이 많았다. 그는 동학을 서학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오행사상에서의 동방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였다. 또한 후천 개벽과 함께 좋은 세상이 온다는 믿음도 많이 약화시켰다. 이와 함께, 많은 가사들은 현실적인 경험들과 동떨어진 측면이 없지 않아 자료가 간행되었어도 적극적인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형식은 거의 4·4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4자로 된 한자어가 자주 되풀이된다. 작자의 심정을 토로하기보다는 교리를 풀이하는 데 치중하여 문학 작품으로서는 그 가치가 적은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