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 씨는 3세기 초부터, 요하(遼河) 유역에서 세력을 키웠다. 그는 족장이 되자 진나라의 요서 지방을 침략하였으나, 패하여 항복하였다. 그 후 선비 도독에 임명되어 금주 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올바른 정치를 폄으로써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인심을 얻었다.
중국 서진(西晉) 말기인 회제(懷帝)의 영가 연간(307~312)에
흉노(匈奴)가 큰 반란을 일으켰는데, 산시성(山西省) 일대에 이주하고 있던 흉노 부족이 중심 세력이 되어 그 족장
유연(劉淵)은 300년에 있었던
8왕(八王)의 난 뒤의 중원(中原)이 혼란함을 틈타 독립할 결심을 굳히고, 304년 국호를 한(漢)이라 칭하였다. 유연이 죽은 뒤 아들 유총(劉聰)은 거병하여 뤄양〔洛陽〕을 함락시키고 회제를 자신들의 근거지인 산시성[山西省]으로 잡아다가 죽이고, 서진의 군사 10여만 명도 학살함으로써 뤄양은 폐허가 되었다. 이 난을 영가의 난이라 하는데, 이 난으로 서진이 망하고 진나라 백성들이 투항하여 오자, 모용부 내의 농경 등 모든 생산이 증가되었다. 모용 외는 또 중국인 인재를 등용하여 여러 제도를 정비하여 그 때까지 유목적이던 생활 양식 이나 문화를 크게 중국화하였다. 그러나 동진과의 관계를 끊지 못하고, 요동군공(遼東郡公)에 봉하여졌다.
모용 외는 고구려 봉상왕(재위 292~300) 2년(
293)에 고구려를 침범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구려의 장군
고노자(高奴子)의 기병에 의해 크게 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