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59] 고려 인종 때의 문신.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항적(亢迪), 시호는 경정(敬靖)으로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익(翼)의 아들이다. 1112년(예종 7)에 오연총(吳延寵), 임언(林彦) 주관하의 문과에 급제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여
이자겸이 집권하게 되자 그와 맞서던 장인
한안인이 죽게 되었으며, 이어 합문지후(閤門祗侯)로서 형
공인과 정극영(鄭克永), 이영(李永), 임원준(任元濬)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이자겸이 몰락한 뒤 1127년(인종 5)에 복직되었고, 1129년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133년 시어사(侍御史)로서
묘청의
도참설(圖讖設)에 현혹된 인종에게 이들을 추종한 대신들을 배척하라고 요청했다가 충주목 부사(忠州牧副使)로 좌천되었다.
의종 때 서북면 병마사를 거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예부 상서(禮部尙書)· 병부 상서(兵部尙書) 등을 지냈다. 글씨에 능했으며, 주로 문한직을 역임하였다.
작품으로는 '묘향산 보현사 창사비(妙香山普賢寺創寺碑)'의 비명(碑銘)과 음기(陰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