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 ~ 1951] 영국의 분석 철학자.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1920~1940년대 영국 철학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에 속한다. 논리학과 언어 철학 분야에서 독창적이고 중요한 철학적 사유 체계를 확립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 제철업자의 8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로부터 예술적이고 지적인 재능을 물려받아 음악적 재능 또한 뛰어났다. 오스트리아· 독일·영국 등지에서 공부하였으며, 항공기 프로펠러를 연구하다가 수리 논리학 분야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11년 케임브리지로 간 그는 《
수학 원리》의 저자
B. 러셀과 함께 논리학을 연구하면서 많은 토론을 주고받았다. 그 후 노르웨이의 스홀덴으로 가 논리학에 대해 혼자 연구에 몰두하면서 언어에 의한 철학적 분석 방법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 군대에 입대하여 포병 장교로 복무하면서 논리학과 철학을 계속 연구하였다.
이탈리아의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된 후, 1921년 전쟁 중에 연구한 기록들을 정리한 《논리 철학 연구》를 출판했다. 이 책은 100쪽도 되지 않는 분량이지만 언어의 본성, 논리학 · 윤리학· 철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가장 독특한 특징은 언어의 한계에 대한 것이었다. 즉 철학적 문제들은 언어 작용의 오해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가 곧 사고의 한계이기 때문에 사고하고 의지하는 자아의 존재나 절대적 가치의 존재 등은 사고될 수 없다고 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이 존재한다는, 말할 수도 없고 사고할 수도 없는 매우 형이상학적인 주장을 펼쳤다. 더 이상 철학에 이바지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의 작은 도시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는데 자주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불행했다. 1929년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온 그는 일상 언어의 분석에서 철학의 의의를 발견하게 되었다. 자신이 주장했던 것에 대하여 자기 스스로 비판하여 새로운 입장을 정리하게 된다. 그는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견해를 버리고, 개념이 어떻게 행위와 그에 대한 반응과 연결되는가, 즉 인간의 삶에서 개념이란 어떻게 표현되는가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 그는 개념들의 기능과 유의미성이 정신 영역에서가 아니라 그 개념들이 들어 있는 인간의 삶의 형식에서 생겨난 것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1953년 이와 같은 그의 견해를 담은 《철학적 탐구》가 사후에 출간되자 찬사와 비난이 엇갈렸다.
1939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로 임명되어 1947년까지 재임하였으며, 1951년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철학적 탐구》의 완성을 위해 정열적으로 연구에 몰두하였다.
생전에 출판된 저작은 《논리철학 연구》뿐이지만, 강의와 연구를 통해 오스트리아의 빈 학파와 영국의 분석 철학계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