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에 일본에 보내던 외교 사절. 본래 통신사라고 하던 것을 강화도 조약 이후 양국이 대등한 처지에서 국교를 행한다는 뜻에서 수신사로 고쳐 불렀다.
강화도조약 체결 뒤 일본은 초대외교(招待外交)형식을 취하여 조선에게 사신파견을 요청하였고 조선은 회사(回謝)의 뜻으로 예조참의
김기수(金綺秀)를 수신사로 파견하게 되어 일행 76명은 그 해 4월 4일 서울을 출발, 부산을 떠나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하였다. 그 뒤 약 2개월 간 시찰을 하고 고종에게 복명(復命)하였다.
이들은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일왕(日王)과의 접견식을 가지고, 원로원·의사당(議事堂), 육해군의 군사시설 및 훈련상황, 박물관 등 근대시설을 관람하고, 개국주의에 큰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또한 일본이 1879년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를 변리공사로 파견하여, 원산·인천의 개항을 강요하고 부산의 관세배상, 미곡금수(米穀禁輸) 해제를 제기하자 조선정부는 문제의 절충과 일본의 진의를 탐색하기 위하여 1880년 5월 수신사
김홍집(金弘集) 등 58명을 파견하였고, 일행은 그해 11월 귀국하였다.
그러나 양국간의 현안문제들에 대하여 일본측은 확답없이 미루기만 하였고, 김홍집은 청국공관에서 참찬관(參贊官) 황쭌셴[黃遵憲(황준헌)] 등과 접촉하며 조선이 모르던 국제정세에 대한 중요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그 뒤 개화와 척사의 대립 속에서 다시 1881년 조준영(趙準永) 등 양반자제의 소장 인물을 망라한
신사유람단 38명을 일본에 파견하여 70여 일 동안 일본문물을 조사, 연구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