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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암태도 소작 쟁의(岩泰島小作爭議)
암태도 소작 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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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도 소작 쟁의 (岩泰島小作爭議)
1923년 8월~1924년8월 전라 남도 무안군(지금의 신안군) 암태도의 소작 농민들이 단결하여 지주와 일제에 대항한 소작 쟁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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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도 소작 쟁의 (岩泰島小作爭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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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8월~1924년 8월 전라 남도 무안군(지금의 신안군) 암태도의 소작 농민 들이 단결하여 지주와 일제에 대항한 소작 쟁의 사건.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일본은 쌀 값을 크게 낮추는 이른바 '저미가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땅을 가지고 소작인들의 힘을 빌려 농사를 크게 짓던 지주들은 쌀을 팔아 얻는 수입이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지주들은 이러한 손해를, 소작인들로부터 거둬들이는 소작료를 큰 폭으로 높임으로써 메꾸려 들었고, 그 결과 소작료는 전체의 70~80% 수준으로 올랐다. 그러나 소작 농민들로서는 1년 농사를 짓는 데 드는 각종 투자비와 일손을 사는 데 드는 돈을 빼고 나면 그렇게 많은 소작료를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암태도에서도 이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암태도는 꽤 큰 섬으로 섬 중앙 부분에 넓은 평지가 있어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했으며, 어업과 함께 농업이 이 곳 주민들의 주된 생활 수단이었다. 당시 암태도에는 논·밭을 합쳐 총 140 정보의 농지를 가지고 있는 대지주 문재철이 소작인들을 대신 관리해 주는 마름을 두고 소작인들을 부려 농사를 짓고 있었다. 문재철 역시 다른 지역의 지주와 마찬가지로 소작료를 올렸고, 마름들은 오른 소작료를 제대로 거둬들이기 위해 더욱 혹독하게 소작인들을 독촉했다. 이를 견디다 못한 소작 농민들은 농작물 수확을 얼마 앞둔 1923년 8월 서태석이 앞장 서 '암태 소작인회'를 만들고, 소작료를 40%로 낮추어 줄 것과 1%에 이르는 소작료 운반 비용을 지주가 부담할 것' 등을 요지로 한 집단 건의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건의는 받아들여 지지 않았고, 결국 소작 농민들은 벌판의 곡식을 추수하지 않고 버려 두는 실력 행사에 들어 갔다. 추수를 하지 않고 있으니, 당연하게 소작료도 낼 수가 없어 추수 거부는 곧 소작료 납부 거부 운동으로 이어졌다. 문재철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을 이용해 암태도뿐만 아니라 주위의 자은도 등 섬 지역과 전라도 지역의 땅을 크게 모아들인 사람인 만큼 일제 경찰에 도움을 청해 소작 농민들의 단결을 방해하기에 이르렀다. 일제 경찰들은 순찰을 더욱 강화하는 등 위협적인 분위기를 만들었고, 지주는 이러한 기회를 틈타 소작농 하나하나에 대한 협박과 회유를 통해 소작료를 걷으려 했다. 이에 암태 소작인회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함께 벌이고 있는 소작료 납부 거부 운동을 계속하기 위해 순찰대를 만들었으며, 1924년 3월 27일에는 동와촌리에서 지주의 횡포를 규탄하는 항의 집회를 가지고 더욱 강하게 대항할 것을 다짐했다. 이들은 또한 빠른 시일 안에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들어 주지 않을 때는 암태도 수곡리에 있는 문재철의 아버지에 대한 송덕비를 깨뜨려 버리겠다는 위협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해결이 나지 않자 자신들의 사정을 전국적으로 알리고자 신문 등에 그간의 사정을 알리는 글을 실어 전국적인 호응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노동 단체에도 직접 호소해 도움을 요청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4월 15일 열리는 전 조선 노농 대회에 서태석·박응언·손학진을 보내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계획의 실패에 화가 난 소작 농민들은 앞서 항의 집회에서 경고했던 것처럼 송덕비를 무너뜨렸고, 이를 막는 지주 쪽 사람들과 크게 부딪쳐 소작인회 지도자 13명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목포로 끌려갔다. 이후 사태는 더욱 나빠져 소작인회 외에도 청년회와 부녀회가 항쟁에 힘을 합쳤고, 청년회장인 박복영이 앞장서 6월 2일 다시 한 번 면민 대회를 열어 목포로 가서 항쟁을 계속할 것을 결의하기에 이른다. 6월 4일~8일 목포로 몰려간 400여 명의 소작 농민들은 목포 경찰서와 재판소에서 2차례에 걸쳐 집단 항의를 벌였으며, 1달 뒤인 7월 8일부터는 600명의 농민들이 법원에서 3일간 계속된 단식 투쟁을 시작했다. 이후 7월 11일에는 문재철의 집으로 쳐들어가 시위를 벌이다 농민 26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국민들의 도움의 손길이 이어져 목포에서는 먹을 것, 숙소 등을 비롯하여 이들에 대한 각종 지원이 계속되었으며 서울 등지에서도 이들의 사정을 알리고 지지를 호소하는 모임들이 앞다투어 열렸다. 뿐만 아니라 신문도 이들의 활동을 자세하게 알리는 데 한몫을 했다. 조그만 섬에서 시작된 소작료 시비가 이렇듯 전국적인 운동으로 번져 여러 곳에서 이들에 동조하는 모임이 열리고 지원금을 모금하자 이제껏 지주의 편에서 농민들을 억누르는 데에만 열중해 온 일제도 사건을 진정시킬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우선 체포된 사람 중 26명을 풀어 주고 먼저 체포된 소작인회 지도자들도 곧 풀어 줄 것을 약속했으며, 소작 농민들과 지주 사이에 중재자로 나서 지주 문재철이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 주는 쪽으로 합의서를 만들도록 설득했다. 마침내 8월 30일 목포 경찰서장 사무실에서 일제를 대표하는 전라 남도 경찰국의 고가〔古賀〕 고등과장의 참석 아래 지주 문재철과 소작 농민을 대표하는 박복영 사이에 합의서가 만들어졌다. 합의된 내용은 첫째, 소작료는 40%로 정하고 지주는 소작인회에 기부금 2,000원을 낼 것이며, 둘째, 1923년의 소작료 납부 거부 운동으로 내지 못한 소작료는 앞으로 3년 동안 나누어 내기로 하고, 셋째, 체포된 상태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서로 고소를 취하해 풀려날 수 있도록 하고, 넷째, 깨뜨린 송덕비는 소작인회가 책임지고 다시 만들어 놓을 것 등 4개 조항으로 이루어졌다. 약 1년간 강인하게 지속된 암태도 소작 쟁의는 20년대의 대표적인 소작 쟁의로 전국적인, 특히 서해안 여러 섬의 소작 쟁의 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주와 그를 비호하는 일제 관헌에 대항한 항일 운동이었다. 결국 소작인들의 승리로 끝난 이 1년간의 소작 쟁의는 그 뒤를 이어 각 지역에서 일어난 많은 농민 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와 일제를 등에 업은 지주에 대항했던 암태도 농민들의 승리를 위해 한마음으로 뭉친 전 국민의 힘은 앞으로 일어날 갖가지 독립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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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