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 또는 번역한 작품.
‘번역'은 어떤 언어를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공통적으로 쓰이는 말로, 신역·신번이라고도 했다. 반면에‘언해'는 한문 을 한글로 번역할 때만 사용되며, 내용상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현토·석의·음해·훈의·역훈·언석이라고도 했다. 이 밖에 한문으로 된 책에 한글로 토를 달아 놓은 것은 언토· 언두라 했다.
언해의 조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 언해'에서 '언'은 한글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15세기에 한글이 창제된 후부터 19세기의 개화기까지 번역된 것만 언해라 한다. 예를 들어, 현대에 와서 번역된 《조선왕조실록》도 한문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지만,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언해라고 하지 않는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한글이 발명 되고 나서도 한글보다는 한문을 더 많이 썼다. 따라서 한문을 많이 쓰던 시기에 한글로 번역된 것들만 ' 언해 '라고 하는 것이다. 개화기 이후에 우리 문자가 한문에서 한글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후의 번역은 ' 언해'라고 하지 않는다.
둘째, 한문이나 백화문으로 되어 있는 책을 번역한 것만 언해라고 한다. 백화문이란 구어체로,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쓰는 대화체를 말하며, 지금의 중국어가 되었다. 즉, 중국에서 옛날에 쓰던 문어체(한문)와 구어체(백화문)를 번역한 것만 언해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통역이나 번역을 하던 관청이 있었는데, 사역원이 그것이다. 이 곳에서는 당시에 조선과 외교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던 몽골· 만주 · 일본의 말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의 책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이나 번역한 책은 언해라고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노걸대》는 백화문으로 된 중국어 학습서인데, 이를 번역한 《
번역노걸대》와 《
노걸대언해》만이 언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한글로 된 번역만을 언해라고 한다. 단, 한글에 한자가 섞여 있는 번역도 언해이다. 그러나 이두로 번역된 책은 언해라고 할 수 없다. '이두'는 한자 의 음과 뜻을 빌려와 우리말을 적던 표기법으로, 신라 때부터 사용해 온 언어이다. 이두는 독창적인 우리말이기는 하지만, 한자만 쓰이고 한글은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언해 라고 하지 않는다. 《대명률직해》나 《양잠경험촬요》 등이 바로 이두로 번역된 책인데 이들은 언해가 아니다.
언해의 구성은 보통 한문으로 된 원문과 한글로 된 번역이 함께 짝지어 놓여 있다. 원문에는 한글로 토를 달아 놓는데, 이것을 구결이라고 한다. 따라서 언해를 보면 원문이 있고, 그 아래 구결이 달려 있으며, 한글로 번역이 되어 함께 놓여 있다.
언해의 대표적인 예로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불경언해》와 교정청에서 편찬한 《경서언해》가 있는데, 모두 원문과 구결·번역이 짝지어져 있다. 이러한 원문의 구결은 번역의 절차와도 관련된다. 원문에 구결을 다는 것은 번역보다 먼저 이루어진다.
중국어는 우리말과 문법 체계가 전혀 다르므로, 이를 번역할 때는 원문의 문장 구조를 파악하고 나서 원문의 구절 사이에 적당한 우리말로 토를 단 다음 번역의 기초로 삼았다. 구결은 원문의 앞뒤를 분명히 해 주기 때문에 구결만 정해지면 번역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 《능엄경언해》와 《금강경언해》의 발문에 의하면, 원문에 구결을 먼저 달고 그 구결에 따라 번역이 이루어졌다고 되어 있다.
15세기에 수양 대군이 아버지 세종의 명으로 편찬한 《석보 상절》은 《석가보》 《법화경》 《아미타경》 등을 번역한 것인데, 이 책에는 번역과 원문이 대조되어 있지 않으므로 언해라 하기 어렵다.
언해는 한글이 발명된 후부터 시작되어 개화기까지 계속되었다. 한글 발명 이후 약 50년 동안은 활발하게 언해가 이루어져서 이 때 나온 번역서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과 전해지지 않는 것을 전부 합해서 40여 책, 200여 권에 이른다.
한글 창제 이후 처음으로 번역된 책은 《
훈민정음언해》였다. 《훈민정음언해》가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월인석보》의 책머리에 실려 전한다. 《월인석보》는 1459년에 나온 책인데, 《훈민정음언해》의 번역은 그 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477년 무렵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언해는 세조 때부터 본격적으로 행해졌다. 세조, 즉 수양대군 자신이 이미 세종 때 아버지의 명으로 《석보상절》을 번역하여 편찬한 적이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번역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461년(세조 7)에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위해서 간경도감을 설치하였다. 간경도감에서는 당대의 대학자인 윤사로와 강희맹 등이 중심이 되어 많은 불경을 번역하였다. 《
능엄경언해》 10권을 비롯해서 《
묘법연화경언해》 《
원각경언해》 《
금강경언해》 등이 이 곳에서 번역된 책들이다. 이외에도 많은 양의 불경이 번역되어 간행됨으로써 불교 문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불경 언해는 성종 이후에도 계속 이루어졌는데, 질과 양의 면에서 세조 때의 것에는 미치지 못했다. 세조 때에는 불경 언해책 외에도 의학책인 《
구급방언해》가 번역되어 간행되었고, 성종 때에 오면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 대비 가 부녀자들의 덕을 가르치기 위해 《내훈》을 번역하여 편찬하고, 유윤겸 등이 당나라의 시인 두보의 시를 번역한 《
두시언해》를 편찬하였다. 이렇게 언해는 점차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어 갔다.
불경 번역이 조선 시대 초기에 주종을 이루었던 것과는 반대로, 조선 시대의 국가 이념이었던 유교 경전 에 대한 번역은 16세기 말에 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선조 때 교정청에서 유교에 대한 책이 언해되어 나왔는데, 이것은 《불경언해》보다 약 100년 이상 늦은 것이었다. 유교 경전을 언해하려면 먼저 원문에 대한 구결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유경 경전에 구결을 다는 것이 불경보다 어려웠던 것으로 생각된다.
언해는 처음에 중앙에서만 이루어지다가 16세기에는 지방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언해는 지방으로 퍼지면서 일반 사람들에게 한글을 널리 보급하게 되었고, 번역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게 되어 문화 향상과 학문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18세기 후반 영· 정조 때에는 가장 많은 언해서가 간행되었다. 이 시기에는 각종 교화책과 역학책이 대대적으로 번역되었다. 또한, 앞의 시기에 간행되었던 각종 언해책들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다시 간행되기도 하였다. 이는 당시의 문화 수준이 높아지고, 한글로 된 책의 독자층이 많아졌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언해 는 역사적으로 문화 발전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발전해 왔다. 따라서 언해책이 발간되던 당시의 문화 발전 모습을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언해책은 오늘날 역사적 연구 자료를 제공하는 데에 그 가치가 있다. 그리고 개화기 전에 만들어진 책들은 대부분이 언해본이기 때문에 중세 국어 와 근대 국어 등 국어의 역사를 연구할 때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제까지의 국어 연구 또한 언해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