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7~1555] 조선 중종 때의 문신. 호는 농암(聾巖)이고, 시호는 효절(孝節)이다.
1498년에 문과 에 급제, 사관, 정언이 되어 서연관의 잘못을 논박하다가 귀양살이를 하였다. 중종 반정 후에 복직되어 충주 부사, 안동 목사 등을 지내면서 인재 배양에 힘쓰다가, 부제학, 형조 참판에 이르러 관직에서 물러나 자연을 벗하여 많은 시가를 남겼다.
작품에 10장으로 전하던 「
어부가」를 5장으로 고쳐 지은 「
어부사(漁父詞)」가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전하며, 그 밖에 「
춘면곡」 「
효빈가」 「
농암가」 등이 있다.
예안(禮安)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농암집》이 있다.
시조 - 귀전록(歸田錄)
효빈가(效嚬歌)
귀거래(歸去來) 귀거래(歸去來)하되 말뿐이요 갈 이 없어
전원(田園)이 장무(將蕪)하니 아니 가고 어찌 할꼬.
초당(草堂)에 청풍명월(淸風明月)이 나명들명 기다리나니.
농암가(聾岩歌)
농암(聾岩)에 올라 보니 노안(老眼)이 유명(猶明)이로다.
인사(人事) 변한들 산천이딴 가실까.
암전(岩前)에 모수모구(某水某丘) 어제 본 듯하여라.
생일가(生日歌)
공명(功名)이 그지 있을까 수요(壽夭)도 천정(天定)이라.
금서(金犀) 띠 굽은 허리에 팔십봉춘(八十逢春) 긔 몇 해오.
연년에 오늘 날이 역군은(亦君恩)이샷다.
• 72세에 지산정사(芝山精舍)를 짓고,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과 교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