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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정봉수(鄭鳳壽)
정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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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정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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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수 (鄭鳳壽)
[1572 ~ 1645] 조선 중기의 무신·의병장. 본관은 하동이고 자는 상수이며 시호는 양무이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정봉수 (鄭鳳壽) 정묘호란 평안 북도 후금 1627년 광해군 모문룡 이입 인조 병자호란 용골산성
▣ 참조 카달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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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 (3) 백과 모문룡 (2) 백과 이입 (2) 백과
▣ 백과사전
[1572 ~ 1645] 조선 중기의 무신·의병장. 본관은 하동이고 자는 상수이며 시호는 양무이다.
 
1592년 일본의 고니시 유끼나가·가또오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을 선두로 하여, 15만 대군이 우리 나라를 침범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키자,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한 후에 선전 관청에서 일하는 관원인 선전관이 되었다. 그 당시 선전 관청은 임금이 나들이할 때에 나발을 불고 북을 쳐서 상주하는 계라나 부신(조선 시대 병조 등에서 발행한 여러 가지 신표), 임금을 모시어 호위하는 시위 따위의 명령을 전하거나 기폭과 북을 울려서 군대의 여러 가지 행동을 호령하는 군대의 신호법인 형명에 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다. 그는 선전관으로서 왕가를 모시고 따라다니는 일을 하다가 부장(部將)이 되었으며, 그 뒤 사복시주부· 감찰·영산 현감을 지내었다.
 
1605년에는 무안현 대장으로 있으면서 흑산도 앞바다에 침입한 왜구 6명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1627년에 금군이 침입하여 정묘호란을 일으키자, 4,0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고 의병장이 되었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오지 못한 김종민을 각 군영의 대장이나 사(使)의 다음 가던 장관 벼슬인 중군으로 삼았으며, 장사준·이광립 등과 더불어 의병을 훈련시키는 한편 날래고 용맹스러운 정예병을 기르면서 정세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용골산성에 모여 있던 철산·의주의 피난민이 고립되자, 조정에서는 성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피난민들로 하여금 산으로 피신하여 화를 피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정봉수는 조정의 권고를 물리치고, 끝까지 이 성을 지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러자 조정에서도 그에게 당상계(정3품 이상 되는 벼슬)를 주어 전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는 전 병사에게 적의 침입에 맞서 싸우도록 하여, 결국 용골산성에서 절반이 넘는 후금군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수천 명의 백성을 구해 내는 큰 공을 세웠다.
 
그는 이러한 전투의 성과를 인정받아서 철산 부사에 특별히 진급되었고, 이어 가선계에 올라 용천 부사와 조방장이라는 직책을 함께 맡아 일하였고, 이어 방어사와 의주 부윤을 함께 맡기도 하였다. 그 후 적군이 물러난 뒤에는 구성 부사·개천 군수·오위장 부총관을 지내었다.
 
1630년에는 조정의 특별한 지시에 의해 부총관으로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의 벼슬을 받았다. 이듬해인 1931년에는 가의 대부로 벼슬이 올라 경상도의 병마 절도사가 되었다. 그 후 전라도의 병마 절도사를 거쳐, 1635년에 중추부동지사로 부총관·훈련원도정을 겸하여 맡았다.
 
정봉수는 철산의 충무사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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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