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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정비석(鄭飛石)
정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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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석 (鄭飛石)
[1911 ~ 1991] 소설가. 평안 북도 의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원래 이름은 서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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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 1991] 소설가. 평안 북도 의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원래 이름은 서죽이다.
 
1932년에 일본에 있는 니혼(日本)대학 문과를 중퇴하고 습작 생활을 하다가, 1935년에는 동아 일보에 《여인의 상》 《저 언덕길》 등의 시를 발표하였고, 그 밖에도 시로서 《도회인에게》 《어린 것을 잃고》와 소설인 《여자》 《소나무와 단풍나무》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6년에 완전히 소설로 전향하였는데, 그 해에 죽은 아내와 예전에 나누었던 사랑을 되돌아보는 내용을 담은 단편 소설인 《졸곡제》가 동아 일보의 신춘 문예에 입선하였다. 이어서 이듬해인 1937년에 역시 단편 소설인 《성황당》이 조선 일보의 신춘 문예에 당선되었는데, 이 작품은 깊은 산 속에서 숯을 구워서 생계를 이어가는 순이를 주인공으로 하여 원시적인 자연의 건강한 아름다움을 다룬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졸곡제》와 《성황당》으로 인하여 문단에 데뷔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면서 《애증도》 《자매》 《제신제》 등을 발표하였다.
 
《성황당》 이후의 그의 작품은 성격에 따라서 크게 3종류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로는 현실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고민과 사상적인 갈등을 다룬 작품인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저기압》(비판 1938), 《이 분위기》(조광 1939), 《삼대》(인물 평론 1940) 등을 들 수 있다.
 
둘째로는 지은이 자신의 주변 생활에서 발생하는 일을 중심으로 하여 쓴 작품인데, 여기에는 《강태공》(조선 문학 1939), 《귀불귀》(동아 일보 1939), 《고고》(문장 1940) 등이 속한다.
 
셋째로는 여성의 애정 윤리를 다룬 대중 소설인데 《자유 부인》(서울 신문 1954)이 대표적인 작품이며, 그 밖에도 《애정 무한》(1957), 《여성 전선》(1974) 등이 그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세 번째 분류에 속하는 작품들은 그에게 소설가로서 대중적으로 화려한 명성을 가져다 주었고, 대중 소설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혀 주기도 하였지만, 여성의 성(性)과 자유를 다룬 《유혹의 강》이나 《욕망의 해협》 같은 작품 때문에 통속적인 연애 소설가라는 비난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던 《자유 부인》은 단순한 연애 소설이 아니라, 광복을 맞은 이후에 만연하던 사회의 퇴폐적인 풍조를 날카롭게 지적한 일종의 세태 풍속 소설이라고 볼수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발전하기도 하였는데, 당시의 서울 대학교에 법과 대학 교수로 있던 황산덕과 '자유 부인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또한 그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도 소설이라는 것은 독자에게 읽혀져야만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작품의 문학성보다는 대중성을 우선으로 하는 그의 가치관 때문에, 그는 매우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의 나이가 50세를 넘어서던 1970년대 말부터는 역사 소설 을 주로 썼는데, 이 때의 작품으로는 《명기 열전》(1977), 《민비》(1980), 《이조 여인 사화》 등이 있다.
 
또, 한국 경제 신문에 약 8년(1981~1989) 동안에 걸쳐 잇달아 발표되었던 《소설 손자 병법》과 《소설 초한지》는 중국의 고전을 바탕으로 하여 쓴 작품이었는데, 《소설 손자 병법》은 1984년에 발간되어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정비석은 일본에서 귀국한 뒤에 매일신문의 기자로 일한 적이 있으며, 1945년 8·15 광복이 된 뒤에는 중앙신문의 문화부장으로 재직하기도 하였으나, 1954년 《자유 부인》을 발표하고 난 다음부터는 창작 활동에만 전념하였다. 1951년에는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 위원장을 지내었고, 1965년에는 관광정책심의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 1970년부터 1971년까지는 국제 라이온스 협회 한국 지구 총재를 역임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50여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펜을 잡았으며, 고희를 넘어서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91년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때 국민 문학(1943. 4)의 《국경》이라는 수필에서 "내가 살고 싶은 곳은……이 내 나라 일본밖에 ……이 지구상의 단 한 곳의 낙원……조국 일본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였을 정도로 일본인화한 적도 있었다. 어쨌든 그는 일생 동안 40여 편의 장편 소설 과 수 많은 단편 소설들을 써서 많은 작품집을 남겼다.
 
그의 소설집으로는 《청춘의 윤리》(1944)를 비롯하여, 《성황당》(1945), 《고원》(1946) 등 80여 권이 있으며, 수필집으로는 1963년에 나온 《비석과 금강산의 대화》 그리고 1971년에 나온 《노변 정담》이 있다. 또, 평론집으로는 1946년에 발간된 《소설 작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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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