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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조견(趙狷)
조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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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견 (趙狷)
[1351 ~ 142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조견은 상장군으로 개국 공신 2등에 책정되고 평양군에 봉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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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견 (趙狷) 개국공신 공신 조기 양주시 1405년 1374년 1346년 조준 김사형 남은 배극렴 유경 이색 장사길 장지화 정도전 조온 조선 태종 하륜 조영규 박포 정탁 남을진 사천서원 경제육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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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1(고려 충정왕 3) ~ 1425(세종 7)] 여말선초 문신으로 본관은 평양, 초명은 윤(胤), 호는 송산(松山)이다. 아버지는 판도판서 덕유이며, 어머니는 오의의 딸이다. 영의정 부사 준(浚)의 동생이다. 어렸을 때 출가하여 여러 절의 주지를 역임하다가 30세에 환속하였다. 고려말에는 안렴사(按廉使)를 지냈다.
 
1392년(태조 1) 상장군(上將軍) 조견 등에게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칭호를 내려 주고 포상(褒賞)을 거행하게 하였다. 1394년(태조 3) 경상도 도절제사가 되었다. 방간이 군대를 내어 난을 일으키자 형 조준과 사위 전 중추원부사 정진(鄭鎭)과 더불어 모두 두문불출한 것으로 탄핵받았으나 곧 용서받았다. 1401년(태종 1) 공신으로 내시를 받았고 이듬해 사은사로 임명되자 중로(中路)에 도적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병을 핑계하였기 때문에 사헌부에서 탄핵하여 죄주기를 청하여 축산도(丑山島)로 유배당하였다. 1403년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 평성군(平城君)이 되었으며 명 태조와 고황후의 추숭을 하례하기 위하여 진하사(進賀使)로 경사(京師)에 다녀왔다. 1405년 개성유후(開城留後)가 되고 1407년 충청도도절제사와 수군도절제사를 겸하였다. 1408년 내사 황엄 등이 의정부와 더불어 경복궁에서 처녀들을 선발할 때 평성군(平城君) 조견의 딸은 중풍(中風)이 든 것같이 입이 반듯하지 못한 체 하여 황엄 등이 매우 노하였다. 헌사(憲司)에서 조견 등의 딸을 잘못 가르친 죄를 탄핵하여 아전[吏]을 보내서 수직(守直)하게 하고, 조견은 개령(開寧)에 부처(付處)하였다. 1410년 태조의 진용을 완산부에 봉안하였고, 1411년 과부 표씨(表氏)에게 장가들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415년 신정(新正)을 하례하기 위해 경사(京師)에 갔다. 1419년(세종 1) 판우군총제부에 보임되고, 1421년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425년 5월 3일 75세를 일기로 졸하였다.
 
졸기에 의하면 “타고난 성품이 굳세고 곧으나, 다른 특이한 기능이 없고, 그 형 준의 힘에 얹혀 훈맹에 참예함을 얻고, 네 임금을 내리 섬겨 지위가 1품에까지 이르렀다. 젊어서 중이 되어 여러 사원(寺院)의 주지를 역임하였다가, 나이 30이 지나서야 머리를 기르고 승직(僧職)으로 인하여 처음에 좌윤(左尹)에 임명되었다. 전일에 중이 되었던 것을 부끄럽게 여기어, 남들의 말이 조금이라도 거기에 미치면 곧 노하였다. 집의 살림이 부요하였다”라고 평하였다. 시호를 평간(平簡)이라 하니, 다스려서 잘못이 없는 것이 평(平)이요, 화평하고 온순하여 시비가 없는 것이 간(簡)이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수산(壽山)·석산(石山)·철산(鐵山)이었다.
 
조견에 대해서는 1779년(정조 3) 경기유생 조항이 조견의 사당에 은액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은 바 있다. 이러한 상소는 1784년에도 계속 이어졌는데 경기유생 정동우가 고려 말 충신 남을진·조견의 사우에 화액을 원하니 드디어 시행케 하였다. 더 나아가 1790년에는 “고려의 운명이 끝났다는 소문을 듣고 통곡하면서 두류산(頭流山) 속에 들어가 그 이름을 고쳐 조견이라 하였으니, 이는 대개 개견[犬] 자를 따른 것으로서 나라가 망해도 따라 죽지 못한 것이 개와 같다는 뜻이며, 또한 개는 옛 주인을 생각한다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두류산에서 다시 청계산(淸溪山)으로 왔는데, 매번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송경(松京)을 바라보면서 통곡하였다”며 두류산 속에 들어가 ‘불사이군’한 충정을 기리고자 숭양서원(崧陽書院)에서 제사지내도록 해 줄 것을 바라니 이를 허락하였다. 정조대에 절개를 지켰다며 조견을 추숭하고자 하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실제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태조부터 세종까지 4명의 임금을 모시며, 고종명(考終命)한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 『高麗史』, 『태조실록』, 『정종실록』, 『태종실록』, 『세종실록』, 『정조실록』, 『한국인의 족보』(일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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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과 참조
조선 개국 공신 2등
 
형제 : 조준
 
배향 : 사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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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