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신은 충선왕 때의 공신인
조인규(趙仁規)의 손자이자 충숙왕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조위(趙瑋)의 아들이다.
공민왕이 세자이던 때 원나라에서 숙위(宿衛)했는데, 공민왕이 즉위하자 그 공으로 참리(參理)에 임명되었다. 귀국해 찬성사(贊成事)가 되고 이어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그 뒤 왕을 숙위한 공로를 빙자하여 인사권 전단(專斷)기구인 정방(政房)의 부활을 요구하는 등의 전횡을 일삼았다.
그는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원나라가 점차 쇠미해지는 반면 중국 대륙에는 한족들이 궐기하는 상황을 감지하였는데,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여러 개혁정치를 시행하자 이를 기화로 부원배들을 제거한 뒤 국왕 측근세력으로서의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조일신은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어 공신으로 책봉된 뒤
1352년 9월 29일, 같은 무리인 전 찬성사 정천기(鄭天起)·최화상(崔和尙) 등과 모의해 부원배의 중추세력인
기철(奇轍)·고용보(高龍普) 등 기씨세력을 암살하려 하였다. 그리고 왕이 거처하던 성입동(星入洞)의 이궁(離宮)을 포위하고 직숙(直宿)을 살해한 뒤 왕을 핍박하여 스스로 우정승(右政丞)이 되고 정천기를 좌정승(左政丞)에 임명하였으며, 나머지 무리들에게도 골고루 요직을 안배하였다.
그러나 그는 기철 등이 도망친 데다 자신의 지나친 행동이 지탄을 받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자신의 무리들에게 죄를 씌워 최화상을 죽인 다음, 왕으로 하여금 장승량(張升亮) 등 8∼9명을 목 베어 저자에 내걸게 하고 정천기를 하옥시켰다. 그리고 그 공으로 스스로 좌정승이 되고 찬화안사공신(贊化安社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에 공민왕은 단양대군(丹陽大君)의 저택으로 옮긴 뒤 삼사좌사(三司左使) 이인복(李仁復)과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고, 같은 해 10월 3일에 행성(行省)에 나아가 기로대신(耆老大臣)들과 밀의하였다. 이튿날 김첨수(金添壽)를 시켜 조일신을 잡아들여 참수하였고 그의 당여(黨與) 2백 18명을 옥에 가두었다. 이로써 조일신의 난은 평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