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에
정제두(鄭齊斗) 등에 의해 창시된
양명학파이다. 정제두를 비롯한 양명학자들이 강화도를 중심으로 형성했다.
정치적으로
노론에 비교하여 열세에 몰렸던
소론이 정계에서 축출되면서 정제두가 강화도로 낙향하여 인재 교육에 몰두한 데서 시작되었다.
강화학파는 양명학을 넘어서서 다양한 학문을 널리 섭렵하려는 박학풍(博學風)과 절충적 학문 경향으로 실천을 강조하는 실리적 학풍이 후대로 계승되어 정제두의 제자들은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광사는 시⋅서⋅화에 뛰어났는데, 특히 서예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영익은 양명학과 성리학을 절충적으로 수용하여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고문상서(古文尙書)』 위작설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유희의 한글 연구는 훈민정음 이래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받는 『언문지(諺文志)』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국학(國學), 특히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도 높아졌다. 예컨대
이긍익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종휘는 『동사(東史)』에서 조선의 독자적 유교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또한 1910 일제 강점이 시작되자 강화학파의 중심인물인
이건승,
홍승헌 등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강화학파에 속하는
이동녕,
이회영 등도 헌신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