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8 ~ 1612]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 자는 공언(功彦)이며, 호는 악록(岳麓) 또는 산전(山前)으로 불렸다. 1548년 조선 조선 명종 3년 부친 초당
허엽과 첫째 부인인 한씨와 사이에서 태어난 큰아들로
허난설헌의 큰 오빠이자
허봉,
허균의 배다른 형제이다.
우성전의 처남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정헌대부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증직으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이 추서되었다.
유희춘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1568년 선조 1년 생원시험에 합격했다. 1583년 선조 16년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를 하였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검열(檢閱)을 지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한
1590년에는 왜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조선통신사가 결성되었는데, 1589년 11월 18일
정탁을 사은사로 차출하고,
황윤길을 정사,
김성일을 부사로
허성을 서장관으로 차출하여, 이듬해 1590년 3월 6일 대마도로 출발하였다. 1591년 1월 28일 일본에서 귀국한 허성은 귀국하자마자 탄핵을 당하여 바로 동래부에 수감되어 의금부로 압송된다.
같이 통신사로 갔던 김성일 등의 동인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므로 전쟁에 대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허성은 동인임에도 불구하고 서인이었던 황윤길의 주장에 찬성을 하게 된다.
사간원의 정언과 헌납, 이조 좌랑 등을 지낸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난 후 이조좌랑, 강원도 소모관, 1593년 사헌부 집의, 1594년 이조참의로 승진되었으며, 1595년 사간원 대사간과 부제학을 지냈다. 이어 이조참판과 전라도안찰사를 거쳐, 예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에까지 요직을 두루 거쳤고, 1607년 선조의 유교를 받게 되어서 세인들이 고명칠신이라 칭했다. 1610년 지돈녕부사가 되었다.
최종관직은 정헌대부 이조판서를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사후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 추서되었다.
허성의 딸 양천군부인 허씨는 선조와 인빈 김씨의 아들
의창군과 혼인하였다. 다른 한명의 딸은
홍가신의 아들
홍영과 결혼하였으며 외손자는 태백5현인
홍우정과 판서를 지낸
홍우원, 청백리인
홍우량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