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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김만덕(金萬德)
김만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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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김만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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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 (金萬德)
[1739 ~ 1812] 제주출신 여성. 조선후기 거상(巨商)으로 제주도에 큰 기근(飢饉)이 발생하자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아 육지에서 사온 진휼미로 빈사상태의 제주도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김만덕 (金萬德) 실학 탕평책 1790년 1794년 1796년 조선 정조 김상철 순조 영조 장헌 세자 정존겸 채제공 혜경궁 홍씨 이병모 규장각 정조실록 홍재전서
▣ 원문/전문 (인기순, 1~10 위)
◈ 참조 원문/전문
만덕전 萬德傳 고전 소설 채제공 (68)
▣ 시민참여콘텐츠
◈ 인기순 (1 ~ 4 위)
2024.04.26
금강산 등정하는 여정에서 병자호란 포로 김승경 사연 듣고 밤새 울어
【문화】 만덕과 경흥로 만덕을 가마에 태운 일행은 조선시대 6대로 중 2대로 인 경흥로를 거쳐 금강산으로 향했다. 경흥로는 한양에서 출발하여 수유리를 지나 누원점(樓院店), 축석령, 송우점, 파발막, 양문역, 김화, 금성, 창도역, 회양, 철령, 고산역, 안변, 함흥, 북청, 길주, 명천, 회령, 온성, 경원, 경흥, 서수라까지 이어지는 긴 도로이다.
2024.04.18
금슬이 너무 좋았던 아내, 자식을 낳다 죽어 슬퍼... 백저행 시 지어 사모
【문화】 영상(領相)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도망시(悼亡詩) 조선 후기 영의정을 역임한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18세인 1737년에 직장(直長) 오필운(吳弼運)의 딸 15세 동복(同福) 오 씨(吳氏, 1723~1751)와 혼인을 했다. 채제공과 부인 오 씨(吳氏)는 금슬이 너무 좋아 이웃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2024.04.22
중국 산수화 본떠서 상상으로 그려... 원형 구도로 봉우리 한눈에 보는 금강전도 국보 지정
【문화】 겸재 정선의 금강산 여행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아들 태종의 처신을 못마땅히 여겨 태종 1년(1401) 윤삼월 11~15 일 사이에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태종은 하륜(河崙, 1347~1416), 태조의 부마인 이거이(李居易, 1348~1412), 성석린(成石璘, 1338~1423), 조준(趙浚, 1346~1405), 이무(李茂), 이서(李舒) 등과 정사를 의논하다가 금강산을 신하들에게 묻는다.
2024.04.17
김만덕, 월해금법 제정 후 167년 만에 바다 건너 육지행 허락
【문화】 만덕(萬德), 제주 사람을 구하다! 이백여 년 전 제주도는 심각한 기후변화로 1792년부터 1795년까지 4년간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번져 연일 아비규환(阿鼻叫喚)이 이어졌다. 매일 사람들이 굶어 죽고, 마을마다 병으로 죽어 이 기간에 죽은 자가 17,963명이나 되었다.
◈ 등록순
2024.04.27
1만2천봉의 환상적인 풍광에 매료되어 속세를 벗어나는 욕망 가져
【문화】 만덕과 금강산 단발령 만덕의 선행은 소문이 나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마다 선비들이 나와 환영을 해주었다. 만덕은 정조가 내린 왕명 덕분에 식량과 편안한 숙소를 받았다. 그러나 금강산 가는 길이 멀어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날씨가 봄날이기는 하지만 밤이 되면 춥고 썰렁했다.
2024.04.26
금강산 등정하는 여정에서 병자호란 포로 김승경 사연 듣고 밤새 울어
【문화】 만덕과 경흥로 만덕을 가마에 태운 일행은 조선시대 6대로 중 2대로 인 경흥로를 거쳐 금강산으로 향했다. 경흥로는 한양에서 출발하여 수유리를 지나 누원점(樓院店), 축석령, 송우점, 파발막, 양문역, 김화, 금성, 창도역, 회양, 철령, 고산역, 안변, 함흥, 북청, 길주, 명천, 회령, 온성, 경원, 경흥, 서수라까지 이어지는 긴 도로이다.
2024.04.25
정조, 재색 겸비하고 노래와 춤 뛰어난 ‘홍도야 울지마라’ 주인공에 별호 하사
【문화】 동도명기 홍도(紅桃)가 만덕에게 시를 보내다 한양에 머문 지 반년이 지난 만덕(萬德)은 1797년 3월에 영상 채제공과 장안 선비들의 환송을 받으며 금강산 유람에 올랐다. 만덕의 금강산 출발이 장안에 퍼지자. 선비들은 모두 그녀의 용기를 칭송하였다. 당시 시를 잘 짓기로 유명한 홍도(紅桃)가 그녀의 덕행에 감탄하여 길을 떠나는 만덕을 위해 칭송하는 시를 보내와, 만덕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
2024.04.22
중국 산수화 본떠서 상상으로 그려... 원형 구도로 봉우리 한눈에 보는 금강전도 국보 지정
【문화】 겸재 정선의 금강산 여행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아들 태종의 처신을 못마땅히 여겨 태종 1년(1401) 윤삼월 11~15 일 사이에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태종은 하륜(河崙, 1347~1416), 태조의 부마인 이거이(李居易, 1348~1412), 성석린(成石璘, 1338~1423), 조준(趙浚, 1346~1405), 이무(李茂), 이서(李舒) 등과 정사를 의논하다가 금강산을 신하들에게 묻는다.
2024.04.21
1681년 중국 출항해 일본 항해 중 태풍 만나 임자도 정박... 400경전 수집 복각
【문화】 만덕과《가흥대장경(嘉興大藏經)》 만덕은 부처님의 심오한 교리는 잘 모르지만, 순천과 해남 지역에서 온 승려들을 만나 부처님 법문을 듣고, 선비들을 만나 금강산 유람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만덕은 제주도에 표착한 청나라 사람들을 보면서 이웃에 있는 다른 나라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2024.04.20
한양서 선비들과 교류하면서 제주 풍속 대화 나눠...이상한 소문도 나
【문화】 채제공과 김만덕의 만남 정조와 효의왕후를 대궐에서 알현하고 나온 김만덕은 영상 채제공의 집으로 돌아간 이후, 한양도성의 선비들을 만나 교유하며 제주 한라산의 아름다움과 매년 세차게 불어오는 무서운 태풍 및 흉년의 참상을 모두 설명하였다.
2024.04.18
금슬이 너무 좋았던 아내, 자식을 낳다 죽어 슬퍼... 백저행 시 지어 사모
【문화】 영상(領相)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도망시(悼亡詩) 조선 후기 영의정을 역임한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18세인 1737년에 직장(直長) 오필운(吳弼運)의 딸 15세 동복(同福) 오 씨(吳氏, 1723~1751)와 혼인을 했다. 채제공과 부인 오 씨(吳氏)는 금슬이 너무 좋아 이웃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다.
2024.04.17
김만덕, 월해금법 제정 후 167년 만에 바다 건너 육지행 허락
【문화】 만덕(萬德), 제주 사람을 구하다! 이백여 년 전 제주도는 심각한 기후변화로 1792년부터 1795년까지 4년간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번져 연일 아비규환(阿鼻叫喚)이 이어졌다. 매일 사람들이 굶어 죽고, 마을마다 병으로 죽어 이 기간에 죽은 자가 17,963명이나 되었다.
2022.11.25
【문화】 【기고】《은광연세》 7호 (제주김만덕기념관) (2022년 12월) / 정조 임금은 “제주 기녀 만덕을 한양으로 올라오게 하라. 내가 친히 그의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라고 의정부에 명했다.
 
▣ 참조 카달로그
◈ 참조 키워드
1797년 (6) 백과 금강산 (6) 백과 1796년 (3) 백과 채제공 (3) 백과 1790년 (2) 백과 1790년대 (2) 백과 1791년 (2) 백과 1792년 (2) 백과 1793년 (2) 백과 1794년 (2) 백과 1795년 (2) 백과 1798년 (2) 백과 1799년 (2) 백과 18세기 (2) 백과 백련교도의 난 (2) 백과 카자르 왕조 (2) 백과
▣ 백과사전
[1739 ~ 1812] 제주출신 여성. 조선후기 거상(巨商)으로 제주도에 큰 기근(飢饉)이 발생하자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아 육지에서 사온 진휼미로 빈사상태의 제주도 백성들을 구휼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1739년(영조 15) 아버지 김응열(金應悅)과 어머니 고씨(高氏) 사이에서 2남 1녀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1750년(영조 26) 12세에 흉년과 전염병으로 부모님이 사망하자 제주목(濟州牧) 기녀의 수양딸이 되었고, 18세에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수양어머니에 의하여 불행하게도 기적(妓籍)에 오르게 되었다. 23세에 제주목사 신광익(申光翼)과 제주판관 한유추(韓有樞)를 찾아가 ‘본래 양가 출신으로 부모를 잃고 가난으로 부득이 기녀가 되었으니 다시 양녀(良女)로 환원시켜 달라’고 청원하여 기적에서 삭제되었다.
 
그 후 제주목 동문 밖에 객주를 차리고 말총·미역·전복·양태·우황 등 제주의 특산물을 서울 등지에 파는 등 육지와의 교역을 통해 큰 부자가 되었다. 1790년(정조 14)부터 1794년(정조 18)까지 5년간 계속된 흉년으로 제주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였다. 특히, 1794년의 흉년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에 자신이 모은 전 재산 1천금을 내놓아 육지에서 쌀과 곡식 수천 석을 사들여 기아로 목숨을 잃고 있는 도민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제주목 관아에 진휼미로 기부하였다. 또한 제주 관덕정에 큰 솥을 걸고 손수 죽을 쑤어 많은 사람들을 구제했다. 제주목사를 통해 선행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조(正祖)대왕은 내의원의 의녀반수(醫女班首)라는 직을 제수하고 예궐을 허락하였다. 이에 58세인 1796년정조대왕을 알현하였다. 정조대왕은 김만덕의 선행을 만천하에 널리 알리는 한편 조선의 명산인 금강산을 유람토록 하였다.
 
김만덕은 평생 독신으로 자선사업을 계속하여 온 도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만덕할망”이라 불리다가 1812년 73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김만덕의 사후에 제주도로 유배 온 추사 김정희는 김만덕의 선행에 큰 감명을 받아 ‘은광연세(恩光衍世)’라는 편액을 써서 김만덕을 칭송 하였다. 김만덕의 묘는 고으니모루에 조성되었으며, 1977년 정월 제주시 건입동의 모충사로 이묘되었다. 현재 제주도에서는 "김만덕상"을 제정해 사회봉사와 기부문화 확산에 이바지한 자를 선정하여 시상하고, 만덕제를 성대히 올려 의인의 선행을 기념하고 있다. 또한 김만덕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그녀의 나눔 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국내외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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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클레르 드 륀 펜션 제주시 애월읍, M 010-6693-3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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