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 ~ 1943] 한국의 역사학자·민속학자이다. 자는 자현(子賢), 호는 간정(侃亭)·상현(尙玄)·무능거사(無能居士)이다.
충청북도 괴산(槐山) 출신이다. 본관은 전주로 정종(定宗)의 넷째 아들인 선성군(宣城君)의 후손이며, 홍문관 교리와 이조참의, 군국기무처 회의원을 지낸 이원긍(李源兢, 1849~1919)의 아들이다.
어려서 동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고향에서 그의 별명은 이탈망(李脫網)이었는데, 평소 망건을 쓰지 않고 다녔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21세 되던 고종 26년(1889년)에 상경, 정동 영어학당에 입학하여 2년 동안 배웠으며, 1894년에는 한성한어(중국어)학교를 졸업하였고, 이듬해인 1895년에 관립 법어(프랑스어)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전인 1897년에는 한성외국어학교의 교관과 학감이 되어,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프랑스어를 가르쳤으며(~1911), 1905년부터 1906년까지 사립 일어야학사(日語夜學舍)를 졸업하는 등 한성외국어학교의 교관으로 재직하는 와중에도 외국어를 익히는 등 영·불·중·일어에 능통하였다. 1906년 10월에는 한성법어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의정부의 특명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여러 관청을 시찰하고 돌아온 뒤 1907년 7월에는
국문 연구소에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한일합방(1910년) 이후부터, 이능화는 조선의 종교와 민족문화, 사회 사정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1912년에는 사립 능인보통학교를 세워 교장으로 있었고, 1914년에는 불교진흥회의 간사와 불교진흥회의 기관지인 『불교진흥회월보』의 편집 및 발행인을 거쳐 1917년에는 이사가 되었다.
1922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조선사편찬위원회(후에
조선사 편수회로 변경)의 위원으로 재직하면서 15년간 《조선사》 편찬에 참여하였고, 수집된 자료로 한국의 종교와 민속을 연구하였다. 1930년에는 일본 학자들이 주도하는
청구학회의 평의원이 되었다. 1931년에는
계명구락부를 설립하여 민족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고 중앙불교전문학교(현재의 동국대학교)에서 강사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