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7 ~ 1616] 조선 중기에, 홍문관부교리, 대사성,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 장원(掌苑) 윤계정(尹繼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용(司勇) 윤희림(尹希林)이다. 아버지는 군자감정(軍資監正) 윤변(尹忭)이며, 어머니는 부사직(副司直) 현윤명(玄允明)의 딸이다.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동생이다.
김덕수(金德秀)·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58년(명종 1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용된 뒤, 승정원주서·춘추관기사관·연천군수 등을 거쳐 1562년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이 때 기묘사화로 화를 당한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을 청했다가 과천현감으로 체직되었다.
이듬 해 8월 행신(倖臣) 이량(李樑)이 아들 이정빈(李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하자 형 윤두수, 박소립(朴素立), 기대승(奇大升) 등이 반대하였다. 이로 인해 이량의 사주를 받은 대사헌 이감(李戡)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 해 9월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우의정 심통원(沈通源)의 계문(啓文: 왕에게 일정한 양식을 갖추어 올리는 글)으로 죄가 없음이 밝혀져 승문원 검교에 서용되었으나, 형 윤두수가 이조전랑이어서 취임하지 않았다.
1565년 홍문관부교리로 다시 기용된 뒤 이조좌랑·정랑(正郎) 등을 차례로 지내고, 이듬해 의정부사인·지제교 겸 교서관교리(知製敎兼校書館校理)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검상·사인·장령·집의·사예·부응교 등을 역임했으며, 1572년(선조 5) 동부승지를 거쳐 대사성에 승진하였다. 이듬해 주청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 명나라 『태조실록』과『대명회전』에 이성계의 가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도록 요청한 일)를 하였다.
그 뒤 경상도감사·부제학·개경유수·공조참판 등을 거쳐 158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었으며, 귀국할 때 『대명회전전서(大明會典全書)』를 가져왔다. 이듬해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1등에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591년 우찬성으로
정철(鄭澈)이 건저(建儲: 세자 책봉) 문제로 화를 입자, 윤근수가 정철에게 당부했다는 대간의 탄핵으로 형 윤두수와 함께 삭탈관직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예조판서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문안사(問安使)·원접사(遠接使)·주청사 등으로 여러 차례 명나라에 파견되었고, 국난 극복에 노력하였다.
그 뒤 판중추부사를 거쳐 좌찬성으로 판의금부사를 겸했고,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다. 1606년 선조가 죽자 왕의 묘호를 조(祖)로 할 것을 주장해 실현시켰다.
청백간손(淸白簡遜)하고 문장이 고아하며 필법이 주경(遒勁: 그림이나 글씨 등에서 붓의 힘이 굳셈)해 예원(藝苑)의 종장(宗匠)이라 일컬어졌다 한다. 저서로는 『사서토석(四書吐釋)』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인용】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