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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놀이터 :: 홍건적(紅巾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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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 (紅巾賊)
중국 원나라 말기에 허베이성(河北省) 일대에서 일어난 한족 반란군. 머리에 붉은 두건(頭巾)을 둘렀다고 해서 홍건적이란 이름이 붙었으며, 홍두적(紅頭賊) · 홍적(紅賊)이라고도 한다.
▣ 지식지도
◈ 지식지도 비교
홍건적 (紅巾賊) 반성 (反省) 백련교 (白蓮敎) 1368 (明) 1067 흥왕사 (興王寺) 1359년 1260 (元) 조선 (朝鮮) 1398년 1360년 1361년 1362년 1363년 1351년 1352년 1356년 1280년 14C초 김용 (金鏞) 1392 조선 태조 (太祖) 1368 홍무제 (洪武帝) 1316 최영 (崔瑩) 1313 정세운 (鄭世雲) 1312 이방실 (李芳實) 1312 안우 (安祐) 1312 김득배 (金得培) 14c초 기철 (奇轍) 1400 조선 태종 (太宗) 1400 건문제 (建文帝) 1399 조선 정종 (定宗) 1389 공양왕 (恭讓王) 1382 의안 대군 (宜安大君) 1351 공민왕 (恭愍王) 1346 조준 (趙浚) 1344 충목왕 (忠穆王) 1337 정도전 (鄭道傳) 1337 정몽주 (鄭夢周) 1337 환조 (桓祖) 1333 김사형 (金士衡) 1325 배극렴 (裵克廉) 1322 안우경 (安遇慶) 1321 신돈 (辛旽) 1320 남을번 (南乙蕃) 1280 정동행성 1258 쌍성총관부 1909 최도통전 태조실록 (太祖實錄) 1363 흥왕사의 변 1359 홍건적의 난 1359 홍건적의 침공 1388 위화도 회군 1352 조일신의 난 요동 정벌 일본원정 (미정의) 삼원수살해사건 (미정의) 오인택
▣ 백과사전
중국 원나라 말기에 허베이성(河北省) 일대에서 일어난 한족 반란군. 머리에 붉은 두건(頭巾)을 둘렀다고 해서 홍건적이란 이름이 붙었으며, 홍두적(紅頭賊) · 홍적(紅賊)이라고도 한다.
 
원나라 말기에 봉기한 군웅 세력은 화북의 원나라 계통 군벌들과 장사성, 방국진, 진우정, 하진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홍건적 계열이다. 다만 홍건적은 황건적과 마찬가지로 단일 종교단체라기보단 느슨한 정치·군사 종교세력으로 홍건적의 난을 일으킨 한산동, 유복통, 한림아 휘하 동계홍건군의 송나라가 가장 세력이 큰 종주였으나 여러 동서남북 계열로써 원말명초의 붕괴 후 혼란기 난세에 군웅할거하였다.
 
결국 홍건적의 난으로 원나라가 무너지고, 홍건적 출신의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웠으니 중국 역사에서 몇 안 되는 성공한 반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백련교는 일명 '명교(明敎)'라고도 불렸는데, 주원장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명(明)'으로 하였던 것에서 명교의 영향력이 있었다 여겨진다. 그러나 주원장은 명나라 건국 전후 정통 중화제국의 황제로 자처하면서 홍건적의 성격을 부정하고 홍건적의 토대 백련교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백련교를 금지시키고, 자신을 추종하지 않고 명 왕조국가의 잠재적 위협이 되던 독자적인 명교 세력을 대거 숙청했다.
 

 

한국사

연원 및 내용

 
1355년(공민왕 4) 국호를 송(宋)이라 정하고 허난성(河南省) · 산시성(山西省) · 산시성(陜西省) 등지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 일부가 만주(滿洲) 지역으로 북진해 요동(遼東)을 점령했다가 원의 반격에 쫓기게 되자 고려를 침범하였다. 고려에서는 이미 1354년에 원의 요청에 따라 군사 2,000명을 원에 파견한 적이 있다. 1357년에는 김득배(金得培)를 서북면홍두군왜적방어도지휘사(西北面紅頭軍倭賊防禦都指揮使)로 삼아 홍건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하지만 1359년 12월 모거경(毛居敬)이 4만 명의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와 의주(義州) · 정주(靜州) · 인주(麟州)가 함락되었다. 또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암(李嵒)을 서북면도원수로, 경천흥(慶千興)을 부원수로, 김득배를 도지휘사로 삼아 침입을 막으려 했으나 철주(鐵州)와 서경(西京)이 계속해서 함락되었다. 이에 이암 대신 이승경(李承慶)을 도원수로 삼고, 다음 해 1월에 2만 명의 군사를 보내 서경을 탈환하였다. 또 2월에는 정주 · 함종(咸從) · 안주(安州) · 철주 등지에서 이들을 섬멸해 압록강 이북으로 몰아내었다.
 
이 후 홍건적은 해로를 이용해 풍주(豊州) · 봉주(鳳州) · 안악(安岳) · 황주(黃州) · 안주 등 해안 지방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1361년 10월 반성(潘誠) · 사유(沙劉) · 관선생(關先生) · 주원수(朱元帥) 등이 10만의 무리를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범하였다. 삭주(朔州) · 이성(泥城) · 무주(撫州) · 안주가 함락되고, 흥의역(興義驛 : 牛峰)에 이르러 개경(開京)을 위협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광주(廣州)를 거쳐 복주(福州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파천(播遷)하고 개경은 함락되었다.
 
그 해 12월에 고려는 복주에서 군사를 정비해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다. 또한 각 도에서 20만 명의 군사를 소집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 안우(安祐)를 상원수로, 정당문학(政堂文學) 김득배를 도병마사로,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정휘(鄭暉)를 동북면도지휘사로 삼아 개경을 탈환하도록 하였다. 다음 해 1월에 고려군은 개경에 진격해 적을 대파하고 관선생 · 사유 등을 잡아죽였다. 이에 적은 압록강을 건너 모두 퇴각하였다. 이 후에도 좌정승(左政丞) 유탁(柳濯)을 서북면홍적방어제군도통사(西北面紅賊防禦諸軍都統使)로, 밀직사 이순(李珣)을 도병마사로, 김한귀(金漢貴) 등 12명을 제도병마사로 삼아 재침에 대비했으나, 대대적인 침범은 없었다.
 

의의와 평가

 
이 전란을 계기로 고려에서는 홍건적의 압박을 완화하고자 원과의 제휴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되었다. 이에 1356년 이후 계속되어온 반원정책이 퇴색하고, 1361년에는 정동행성(征東行省)이 다시 설치되었다. 또 다음 해에는 관제가 개혁되어 1356년 이전의 모습으로 환원되었다. 전공을 세운 무장들의 지위도 뚜렷하게 향상되었다. 비록 정세운 · 안우 · 이방실(李芳實) · 김득배 등은 김용(金鏞)의 책략으로 일어난 삼원수 살해사건(三元帥殺害事件)으로 모두 죽임을 당하지만, 최영(崔瑩) · 오인택(吳仁澤) 등은 1363년 흥왕사(興王寺)의 난을 진압하면서 김용을 제거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또한 전란 중 개경을 수복할 때 참가한 이성계(李成桂)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전란을 겪으면서 사회적 혼란과 변화도 매우 컸다. 경기지방의 호적(戶籍)이 없어지는 등 국가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권세가들에 의한 토지와 인구의 탈점이 널리 행해졌다. 그 결과 신분제도의 혼란과 농장의 발달 등이 더욱 촉진되었다.
 
【인용】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참조 카달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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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9년 (5) 백과 1361년 (5) 백과 김득배 (3) 백과 안우 (3) 백과 (3) 이방실 (3) 백과 정세운 (3) 백과 (3) 백과 홍건적의 침공 (3) 백과 홍무제 (3) 백과 1356년 (2) 백과 공민왕 (2) 백과 김용 (2) 백과 (2) 백과 반원정치 (2) 백과 백련교 (2) 백과 영락제 (2) 백과 (2) 백과 이자성 (2) 백과 이조년 (2) 백과 조선 태조 (2)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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